#1. “애국이냐 이적이냐”
일본의 경제보복 사태가 해결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으면서, 일본 제품 불매운동도 고조되는 분위기입니다. 적극적으로 불매운동에 동참하지 않더라도, 가령 마트나 편의점에서 일본 맥주를 살 때 눈치가 보인다거나 좀 께름칙한 기분이 들기도 하죠. 친정부 성향의 한 라디오 방송에서는 요새 매일 불매운동 인터뷰를 내보내기도 하더군요.
정부는 일본이 수출규제를 강화한 반도체 핵심 소재를 국산화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겠다며 ‘비상조치’를 내놓습니다. 노동부 장관은 지금의 사태가 “사회적 재난에 준하는 것”이라고 규정하면서, 해당 소재 개발과 관련된 업종에서는 주 52시간으로 묶인 노동시간 제한을 풀겠다고 합니다. 자본가들은 ‘규제 때문에 그동안 핵심 소재 개발을 할 수 없었다’고 주장하며 화학물질을 비롯한 산업안전 관련 규제를 풀어달라고 요구합니다. 일본의 경제보복 책임을 한국 정부 탓으로 돌리기에 여념이 없는 자유한국당조차도 이에 화답해 ‘주52시간 예외, 화평법(화학물질의 등록 및 평가 등에 관한 법률) 개정 등 규제 완화나 필요한 여러 노동법 개정 문제 등을 패키지로 가져오면 초스피드로 처리해주겠다’고 나경원 원내대표가 직접 말했죠.
이 상황에서, 제한 없는 노동시간과 무엇인지도 모를 화학물질 노출에 반대한다면, 노동자들은 ‘이적행위’를 하게 되는 걸까요? 한국에서 반도체를 생산한 지 수십 년이 지났습니다. 그동안 이뤄지지 않았던 ‘핵심 소재 국산화’가 갑자기 노동자들을 무제한 노동으로 갈아 넣는다고 마법처럼 실현될까요? 지금도 반도체 생산 공정에서 노동자들이 온갖 화학물질에 둘러싸여 일하다 희귀병에 걸려도 삼성은 어떤 물질을 취급하는지조차 ‘영업비밀’이라며 밝히지 않는데, 여기서 규제를 더 완화하라면 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을 또 죽음으로 내몰겠다는 걸까요?
반도체 산업에서 핵심 소재 국산화가 단시간 내에 결코 이뤄질 수 없다는 건 자본가들 스스로가 가장 잘 알 겁니다. 지난 수십 년간 국산화 시도가 없었던 것도 아니었고, 지금까지 그것이 이뤄지지 않았기에 그 긴 시간동안 그들 자신이 핵심 설비와 소재를 일본에서 수입했죠. 결국 ‘애국이냐 이적이냐’ 프레임을 가장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건 자본가들입니다. 이 국면에서조차 그들은 어떻게 하면 노동자들을 더 갈아 넣을 수 있을지 골몰하는 거죠. 핵심 소재 국산화에 실패하더라도 그들은 무제한 노동과 화학물질 규제 완화라는 확실한 이득을 챙기는 겁니다.
#2. 불매운동, 국산화, ‘현실 외교’… 일본이 멈출까
분명 일본의 이번 경제보복은 식민지배의 죄악을 부정하는 아베 정부에 책임이 있습니다. 그에 대한 분노가 일본 제품 불매운동으로 드러나는 것도 대중적 반감의 가장 직접적인 표출일 것입니다. 문제는 이 사태를 ‘불매운동과 소재 국산화’로 해결할 수 없다는 점이고, 나아가 설령 양국 정부가 ‘외교적 해법’으로 모종의 합의를 마련한다고 하더라도, 앞으로 한‧일 간 긴장은 더욱 높아질 수밖에 없는 구조적 원인이 존재한다는 점입니다.
가령, 지난 2018년 기준으로 한국이 일본에서 수입한 품목 가운데 소비재 비중은 6.5%에 불과하다고 합니다(<경향신문> 7월 22일자 보도). 대일 수입액 대부분은 설비와 소재 등 생산재와 중간재가 차지한다는 거죠. 결국 한국의 최종소비자들이 일본 의류나 맥주를 불매한다고 하더라도, 그 파급력은 일정 부분 제한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생산재와 중간재의 경우 그 소비자는 국내 자본가들이니, 이들이 불매운동에 동참해 자신들의 생산을 중단할 공산은 없다고 봐도 무방할 겁니다. 반대로 수출 규제 품목이 늘어나지 않기만을 바라겠죠.
한편 소재 국산화의 경우, 오랜 기간에 걸쳐 상당한 비용 투하가 필요한 일입니다. 더군다나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죠. 게다가 이미 일본에서 양질의 소재를 생산하고 있는데, 이걸 새로 개발하기 위해 (기업이든 정부든) 돈과 시간을 쏟아 붓는다는 건, 한‧일 갈등 문제를 배제하고 본다면 일종의 중복 투자이고 자원 낭비입니다. 설령 ‘노오력’ 끝에 특정 품목의 국산화에 성공한다고 해도, 양국 갈등이 지속한다면 일본의 추가 수출 규제에 의해서든 리스크를 피하기 위해서든 다른 품목들에 대한 국산화 압력도 받게 되겠죠. 이렇게 되면 간편하게 수입해서 쓸 수 있었을 소재들을 직접 개발하는 데 계속 자원을 투입해야 할 겁니다. 구성원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 데 사용할 수도 있었을 사회적 부와 자원이 낭비되는 거죠.
더 큰 문제는, 지금의 체제에서 한‧일 간 갈등이 심화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 구조적인 문제의 배경에는 미국이 있습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미국은 동북아 지역에서 중국을 봉쇄하기 위해 일본의 재무장을 적극 독려해 왔습니다. 아베 정부가 일본 자위대의 역할을 공격적으로 확대하는 것을 가장 환영했던 것도 미국이었죠. 이는 일본의 우익 지배세력을 부추기면서, 한국과 지속적으로 갈등을 빚을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듭니다. 중국과 미국의 패권경쟁이 심화하는 만큼, 미국은 더욱 일본의 군사화를 요구할 것이고 일본 지배세력은 이에 호응해 팽창과 도발의 강도를 높여갈 겁니다. 그렇기에 미국에 ‘중재’를 요청하는 것 자체가 허망하기 짝이 없는 일이죠. 2015년 ‘위안부’ 합의를 종용한 게 바로 미국 오바마 정부였습니다.
결국 한국과 일본을 엮고 있는 이 체제를 바꾸지 않는다면, 갈등은 반복될 겁니다. 양국의 노동자들은 ‘애국’을 앞세운 각자의 자본가들에게 착취당하면서도 도리어 서로를 증오하게 되고, 막대한 사회적 자원을 낭비하거나 군비 지출에 쏟아 붓는 것을 지켜봐야 하는 악순환이 계속되겠죠. ‘현실 외교’라는 미명 하에 일본 우익의 도발에 굴복하지도 않으면서 한‧일 양국 민중이 진정 적대와 증오를 청산하고 함께 번영하는 새로운 질서, 바로 사회주의적 한‧일 관계를 상상해볼 때입니다.
#3. 사회주의적 한‧일 관계
사회주의 일본은 무엇보다 미국의 ‘동북아 대변인’ 노릇을 거부할 것입니다. 미국의 군사기지 역할도 더 이상 수행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제국주의적 패권 경쟁에 뛰어들어 막대한 군비를 지출하는 한편 전쟁 위협을 고조시키는 것은 일본 민중에게 하등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미국과의 군사동맹을 단절함으로써, 사회주의 일본은 군사적 팽창을 부추기는 구조적 문제로부터 벗어나게 됩니다. 대신 군사적 팽창에 쏟아 붓던 사회적 자원은 온전히 일본 민중의 삶의 질을 높이는 데 사용할 수 있게 되겠죠.
가령 현재 일본에서 아베 정부가 추진하는 (전쟁 가능 국가로의) 개헌보다 관심이 높은 이슈는 바로 연금 문제와 소비세 인상입니다. 일본 금융청은 지난달 한 보고서를 제출했는데, ‘앞으로 노령 인구 연금이 부족해 각 가구가 자체적으로 2억 원 가량의 추가 자금을 마련해야 할 것’이라는 내용이어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죠. 아베 정부는 이에 대해 제대로 해명하지 않고 황급히 이 보고서를 ‘접수하지 않는’ 것으로 사태를 무마하려 했습니다. 한편, 아베 정부는 재정 적자를 이유로 2014년에 이어 올해 또다시 소비세를 인상할 예정입니다. 모든 국민이 부담하는 소비세는 올리는 반면, 자본이 부담하는 법인세는 계속 깎아줍니다. 아베 정부는 2014년 34% 수준이었던 법인세를 2018년 29%까지 끌어내렸고, 20%로까지 부담을 낮춰주겠다고 밝혔습니다. 이 와중에 2019년 국방비는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고, 아베 정부는 장기적으로 국방비를 2배가량 증액하겠다는 목표를 세워두고 있습니다. 구성원의 필요를 제1의 존재목적으로 하는 사회주의 정부에서 결코 방치할 수 없는 일이죠.
팽창의 근본적 원인을 제거한 사회주의 일본에서야말로 식민지배에 대한 진정한 자기반성과 사과가 가능할 것입니다. 일본의 군사적 팽창을 구조적으로 부추기는 지금의 체제에서는 과거 일본제국 시기를 ‘부활시켜야 할 영광’으로 끊임없이 복기할 수밖에 없죠. 그렇기에 지금 일본의 지배자들이 과거에 대한 반성과 사과를 하지 않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그들에게 그 과거는 단순히 지나간 일이 아니라 ‘다시 실현해야 할 미래’일 테니까요. 반면, 과거에도 일본 제국주의를 규탄하며 탄압 속에서 식민지 민중과 함께 싸웠던 게 바로 일본 사회주의자들이었습니다. 사회주의자들에게 제국주의는 일본을 포함해 주변국 민중을 전쟁으로 밀어 넣은 재앙이죠.
팽창에 대한 거부와 식민지배에 대한 사과를 바탕으로, 사회주의 일본과 한국은 미국 패권 전략에 따라 억지로 맺은 ‘동맹’이 아니라, 진정 양국 민중의 상호 화합과 번영을 위한 친선 관계를 맺고 온전한 우방국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지금의 무역 분쟁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단초를 찾을 수 있게 됩니다.
#4. 사회주의와 자유로운 무역
자본주의는 지구 전체로 뻗어나가면서 국제적인 공급사슬을 형성하고 생산력을 비약적으로 발전시켰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자본 간 경쟁, 국가 간 경쟁, 제국주의적 갈등으로 그 생산력을 효율적으로 사용하지도 못한 채 무수한 중복투자와 과잉생산, 교역의 제한도 동시에 가져왔죠. 지금 한‧일 간 경제적 갈등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물질적으로만 본다면, 각자가 강점을 가진 분야에 집중해 서로 교역하고 보완할 때 더 큰 경제적 이익을 누릴 수 있지만, 교역에 제재 조치를 취하면서 한쪽에서는 상대방이 필요로 하는 물품을 제대로 공급할 수 없고 다른 한쪽에서는 공급받지 못하는 물품을 조달하거나 새로 개발하기 위해 자원을 투입해야 하죠. 이건 돈과 시간의 낭비입니다.
사회주의에서 교역은 대단히 자유롭게 이뤄질 겁니다. 한 국가에서 구성원들이 필요로 하는 모든 재화를 자체적으로 생산하는 건 지극히 비효율적일뿐더러 궁핍해지기 십상이죠. 자본주의에서 이른바 ‘자유무역’이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이 구성원들의 다양한 필요를 풍요롭게 만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국제적인 자본이 최대한의 이윤을 뽑아내도록 하는 데 그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가령 공공부문에 ‘자유로운’ 자본 투입을 강제하기 위해 민영화를 요구한다거나, 환경이나 안전 등의 문제로 규제를 가하면 ‘투자자에게 손해를 끼쳤다’며 무지막지한 손해배상 소송을 거는 등의 행패가 비일비재한 거죠. 또 한편으로는, 무제한적인 시장 경쟁이 펼쳐지면서 상대적으로 취약한 상대국 산업 기반을 무너뜨리고 그에 따라 대량 해고나 구조조정을 야기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회주의에서의 자유로운 교역은 지구적 생산의 물질적 풍요를 온전히 누리면서도, 노동자들이 피해를 뒤집어쓰는 사태를 방지하는 게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사회주의에서의 모든 경제활동은 자본의 이윤 축적이 아니라 구성원들의 필요 충족이죠. 이는 교역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됩니다. 가령, 사회주의 일본과 한국이 교역을 한다면, 양국 국민들이 필요로 하는 재화와 서비스가 무엇인지를 먼저 확인할 겁니다. 이미 방대한 경제 통계를 전자시스템으로 처리하는 현대에서, 그리고 국제적 기업들이 모두 수요에 따른 생산 계획을 수립하는 오늘날 이는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죠.
그렇게 구성원들의 욕구를 파악한다면, 한‧일 양국의 생산능력을 따져보게 될 겁니다. 물론 모든 품목에 대한 생산능력을 일일이 따질 필요는 없습니다. 기존에 일정하게 뿌리내린 생산분업 체계가 있을 테니까요. 국내 생산보다 수입이 더 효율적이라면, 얼마든지 수입해서 쓸 수 있습니다. 그렇게 아낀 자원은 구성원들을 위해 다른 분야에 투입할 수 있으니 결코 손해라고 볼 수 없죠. 단, 국내에서 같은 품목을 생산하던 노동자들의 경우에는 한국이 생산을 집중할 다른 분야에서 일자리를 제공하거나 충분한 보수를 지급하면서 직업훈련기간을 가질 수 있도록 보장해야겠죠. 무엇보다, 한‧일 양국 모두 노동자와 시민들이 직접 선출한 대표들이 교역 조건을 함께 논의하고, 양국의 선출된 대표기구에서 확인받게 될 겁니다. 교역의 결과 누군가에게 일방적인 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말이죠.
평등한 관계 위에서, 일방적으로 피해를 당하고 생존권을 박탈당하는 일 없이, 모두가 풍족한 생산력의 결과를 누리는 자유롭고 개방된 교역. 하지만 자본주의는 이 평화로운 교역 조건을 끊임없이 스스로 파괴합니다. 요새 수많은 ‘경제계 인사들’이 ‘자유무역 회복’을 위해 일본과 ‘외교적 협상’에 나설 것을 주문하더군요. 그런데 한국과 일본을 묶고 있는 국제질서와 권력구조가 바뀌지 않는다면, 경제를 무기로 한 도발과 갈등은 언제 다시 터져 나올지 모릅니다. 그때마다 다시 불매운동이나 국산화 운동, 혹은 ‘현실 외교’를 반복해야 할까요? 1925년, 일제는 지금의 국가보안법의 모태가 된 “치안유지법”을 제정합니다. 여기에서 조선과 일본의 사회주의자들을 ‘국체를 변혁하려는 자’로 규정해 가혹한 탄압을 가했죠. 90여년이 지난 지금, 우리에게 불매운동보다 더 필요한 건 바로 이게 아닐까 합니다. 일본과 한국의 ‘국체를 변혁하려는 자들’이 손을 다시 잡는 것 말이죠. [워커스 5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