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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우리는 주민등록번호 몇 개의 숫자만으로 언제 태어났고, 나이는 몇 살인지, 어느 지역에서 태어났는지 등의 정보를 쉽게 알아볼 수 있다. 특히, 생년월일 뒤에 바로 등장하는 첫 자리 숫자는 성별뿐 아니라 국적이 한국인지 아닌지, 몇 년대에 태어났는지, 성별은 무엇인지까지 알려준다. 그러니 놀라운 것은 이선희 씨 음반에 정자체로 또박또박 인쇄된 정보들이 아니다. 진짜 놀라운 것은 나의 신상을 일련의 숫자 체계로 분류하고, 이 모든 정보를 국가의 관리 체계 하에 둔다는 것. 그리고 그 모든 일들에 우리는 이미 너무 익숙해져 있다는 것이다.
주민등록번호 안에 담긴 인종주의
주민등록 제도는 1942년 조선총독부령 제32호 조선기류령으로 시작됐다. 그리고 1968년 박정희 정부는 처음으로 모든 국민에게 12자리의 주민등록 번호를 부여했다. 일본 정부는 조선기류령 이전에도 국민들을 인종별로 계층화한 ‘국민 수장제도’를 실시하고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인력과 전쟁물자 공급, 인종주의 통치 수단으로 만들어진 주민등록제도가 군사독재 정권에서 간첩 색출과 국민 통제 수단으로 이어진 것이다.
주민등록제도의 기원이 이처럼 인종주의적 통치 수단이었다는 것은 현재의 주민등록번호 체계가 담고 있는 문제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일본인을 다른 동양 인종보다 우월한 인종으로 여기고 한국인을 열등한 인종으로 취급했던 인식이 국민 수장제도에 담겨 있었듯, 현재의 주민등록번호 숫자 부여 체계도 유사한 특징을 담고 있다. 주민등록번호 뒷자리 지역 코드는 서울과 종로를 0번으로 하는 대도시 중심 체계이며, 성별 코드는 성별 이분법에 근거해 남성을 우선순위로 부여한 체계이기 때문이다. 이 체계를 두고 단순히 ‘임의로 부여된 숫자일 뿐’이라고만 주장할 수는 없다. 실제로 주민등록번호가 존재한 이래 한국 사회에서는 주민등록번호의 유무, 이 번호에 드러난 개인의 정보로 수많은 제약과 차별이 양산돼 왔기 때문이다. 한국인과 외국인, 서울시민과 다른 지역의 주민, 출생 시기, 남자와 여자를 가르는 관리와 통치 체계는 인종주의적 사고에 뿌리를 두고 오랫동안 한국 사회를 길들여왔다.
성별 코드, 굳이 바꾸지 않는 숫자
이러한 문제 때문에 시민사회단체는 오랫동안 주민등록번호를 개인정보가 쉽게 식별되지 않는 난수 체계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국가인권위원회 역시 이와 같은 내용을 권고한 바 있다. 그러나 지난 12월 17일 행정안전부는 결국 지역 번호만 삭제하는 것으로 주민등록번호 체계를 바꾼다는 내용을 발표했다. 한국 사회에서 가장 많은 차별을 양산하는 성별, 출생 시기, 내/외국인을 가르는 뒷자리 맨 앞의 숫자는 그대로 남게 되는 것이다. 주민등록번호는 출생신고와 함께 한 사람의 정체성을 숫자 안에 가둔다. 남자 아니면 여자라는 이분법적인 숫자 체계는 나를 알지 못하고, 내 얼굴도 본 적 없는 사람들로 하여금 나를 단정 짓게 만든다. 정해진 이분법에 들어맞지 않는 사람들은 억지로 끼워 맞춰지거나 존재해서는 안 되는 이들이 돼버린다.
현재의 내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와 상관없이 숫자가 나의 정보를 대신한다는 것은 모욕적인 일이다. 사라져야 할 것은 지역 번호만이 아니다. 주민등록번호가 무작위의 난수 체계로 바뀌고 그와 함께 등록과 미등록, 숫자와 이분법으로 규정짓는 통치 체계와 차별적 인식까지 함께 사라져갈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