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버니 샌더스 페이스북 페이지] |
지난해 AP통신은 2020년에 치러지는 미국 대통령 선거가 ‘인종주의자 vs 사회주의자’라는 프레임 대결로 나아간다고 보도했다. 이는 트럼프 대통령이 민주당의 유색인종 여성 하원의원 4명에게 인종차별적 공격을 퍼부은 것을 계기로, 정권 탈환을 노리는 민주당이 그를 ‘인종차별주의자(racist)’로 몰아세우고, 다시 트럼프 대통령이 민주당의 유색인종 여성 의원들을 ‘사회주의자(socialist)’라고 역공한 상황을 묘사한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우리는 사회주의 악몽이 아니라 아메리칸 드림을 믿는다”, “미국이 절대 사회주의 국가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결의를 다시 다짐한다”라는 반사회주의적인 언명을 반복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대통령 선거를 앞둔 미국에서는 2016년에 이어 ‘민주적 사회주의’ 바람이 세차게 몰아치고 있다. 2016년 미국 대선 민주당 후보 경선에서 ‘민주적 사회주의’를 내걸고 힐러리 클린턴 후보에게 아깝게 패했던 버니 샌더스가 2020년에 재출마해 현재까지 득표율과 전국 지지율 1위를 기록하고 있다. 미국 민주당 대통령 후보 선출 전당대회는 올해 7월 13일부터 16일까지 나흘 간 치러질 예정이다. 50개 주에서 열리는 민주당 경선은 2월 3일 아이오와주에서 시작해 2월 25일 현재 뉴햄프셔, 네바다 등 3개 주의 코커스가 마무리됐다.
그 결과 샌더스는 아이오와 주에서 ‘백인 오바마’로 불리는 피트 부티지지(26.2%)에 밀려 아쉽게 2위(26.1%)를 차지했지만, 뉴햄프셔와 네바다에서는 각각 25.9%, 46.8%의 지지율로 1위를 차지했다. 3개주 경선 결과 대의원 확보 수에서도 샌더스는 45명으로 경쟁상대인 피트 부티지지(25명)와 전 부통령인 조 바이든(15명), 엘리자베스 워렌(8명)을 월등히 앞서고 있다. 이러한 추세에 힘입어 샌더스는 전국 여론조사에서 지지율 1위를 기록했고, 트럼프와 맞대결을 상정한 여론조사에서도 민주당 후보로서는 유일하게 트럼프를 이기는 후보로 거론됐다.
이에 반해 민주당의 주류(중도주의)는 조 바이든 전 부통령, 피트 부티지지, 억만장자인 마이클 블룸버그 전 뉴욕시장 사이에서 갈피를 못 잡고 있다. 그러면서 샌더스 대세론에 흠집을 내려는 움직임을 이어가고 있다. 중도주의자인 오바마 전 대통령은 지난해 11월, 2020년 미국 대선 민주당경선을 두고 “미국은 아직 개선을 바라지, 혁명적 변화를 바라는 나라가 아니”라고 언급하며, 샌더스나 워렌 등이 내놓은 진보적 정책에 대해 비판적 견해를 표출했다. 뉴욕타임즈는 최근 러시아가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버니 샌더스를 지원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기사를 내보냈다. 두 후보가 미국 군사력의 해외 팽창에 반대하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는 것이 배경이다. 이는 민주당 경쟁 후보들이 ‘샌더스=공산주의자’라는 색깔론 공세를 펼칠 근거를 제공했다는 논란을 낳았다. 민주당 주류는 샌더스가 내세우는 ‘민주적 사회주의’가 중도층의 등을 돌리게 한다며 비판적인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한편 샌더스 대세론에 힘을 실은 것은 젊은 청년층과 유색인종이었다. 네바다 주에서 샌더스는 47%에 가까운 지지율을 얻으며 2위(21%)인 조 바이든을 큰 격차로 따돌렸다. 이곳에서 샌더스는 히스패닉 유권자 중 51%의 지지를 확보했다. 17~29세 유권자로부터 65%를, 30~44세 유권자로부터 50% 의 지지를 획득했다. 남성(38%)과 여성(30%), 대졸(27%)과 대졸 미만(40%) 유권자 집단에서도 2위와 두 자릿수 격차를 벌리며 지지기반의 다양함을 보여줬다. 아울러 샌더스는 노동조합 상층 지도부가 아닌 아래로부터 노동자들의 자발적 지지흐름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출처: 버니 샌더스 페이스북 페이지] |
이 같은 샌더스 대세론은 일찍이 예견된 것이기도 했다. 우선 샌더스가 내세우고 있는 ‘민주적 사회주의’에 대한 지지가 높다. 샌더스는 그린뉴딜, 전 국민을 위한 의료보험, 대학 무상등록금, 노조 할 권리 보장 등을 주요 공약으로 제출하고 있다. 그리고 이를 ‘민주적 사회주의’라 통칭한다. 여론조사기관 갤럽에 따르면, 미국에서 밀레니얼 세대 이후 젊은 층의 사회주의에 대한 긍정적 평가는 2010년 이후 50%에 근접해 왔다. 이는 이전 세대인 X-세대와 베이비부머 세대의 30%대와 비교해 매우 높은 수치다. 특히 민주당 지지자인 밀레니얼 세대 중 사회주의를 긍정하는 비율은 70%를 훨씬 상회한다.
사회주의에 대한 긍정적 평가는 샌더스에 대한 지지와 연관성이 높다. 우선 미국의 젊은 세대 사이에서 ‘사회주의’가 우호적으로 확산된 배경은, 2008년 금융위기로 표출된 자본주의 경제 불평등의 심화와 소득 감소, 오바마 정부에 대한 실망이 크다. 이러한 실망과 기대는 샌더스의 ‘민주적 사회주의’ 공약 지지로 연결된다.
둘째는 샌더스가 아래로부터의 ‘풀뿌리 대중’의 자발적 캠페인과 운동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돈과 미디어 선거’로 통칭되는 미국 대선에서 선거자금의 규모는 당락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다. 따라서 후보들은 선거자금을 모으는데 전력을 다한다. 민주당 대선 경선에서 다른 후보들은 본인이 억만장자임을 내세우거나 월가와 대기업 CEO 등의 경력에 기대지만, 샌더스는 자발적 지지자들의 소액기부금을 조직했다. 선거자금의 99%를 자기 호주머니에서 메우는 마이클 블롬버그를 제외하면, 2019년 말 샌더스는 민주당 후보 중 대선자금 모금액 규모에서 1위를 기록했다. 이 중 60% 가량은 200달러 미만의 소액기부금이었다. 이는 샌더스 지지층의 두께와 결집도를 보여주는 지표였다.
셋째는 샌더스의 캠페인과 공약이 아래로부터의 사회운동에 전적으로 기반 한다는 점이다. 대표적 공약인 ‘그린뉴딜’은 ‘Sunrise Movement’와 기후정의운동 등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풀뿌리운동과 연계를 맺고 있다. 또한 ‘연방최저임금 15달러 제공’은 미국 전역에서 펼쳐진 패스트푸드 노동자와 서비스 노동자들이 전개한 ‘15달러 운동’의 연장선에 있다. ‘전 국민을 위한 의료보험’이나 ‘대학 무상등록금’ 등도 마찬가지다. 2017년부터 확대되기 시작한 교사들의 파업, ‘Black Lives Matter’ 운동, 낙태죄 폐지운동 또한 샌더스 돌풍의 강력한 기반이다.
현재 샌더스 대세론의 형성은 △아래로부터의 사회운동과 대중의 자발적 참여 △‘민주적 사회주의’ 정책과 공약 △샌더스라는 인물이 살아온 경험과 이력 등이 맞물려 만들어낸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인민의 정치’의 상징이라 불릴 만하다.
한편 올해 미국 대선에서 주목할 점은 샌더스가 민주당 후보로 결정될지, 그리고 트럼프와의 본선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될지 여부다. 샌더스가 민주당 후보로 결정되기 위해서는 급진적이고 좌파적인 후보에 거부감이 높은 민주당 주류의 흐름을 극복하는 것이 관건이다. 현재까지 민주당 주류인 중도주의는 부티지지, 조 바이든, 블룸버그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터라 샌더스에 대한 견제가 불분명하게 이뤄지지만, 후보 윤곽이 거의 드러나는 3월 3일 ‘슈퍼화요일’이 지나면 샌더스에 대한 견제와 비판이 본격화될 것이다. 여기에 ‘러시아 지원설’같은 가짜뉴스와 루머 확산 등이 결합될 가능성이 높다.
만약 샌더스가 민주당 후보로 선출돼 트럼프 대통령과의 경쟁이 펼쳐지면 2020년 미국 대선은 ‘자본주의 vs 사회주의’라는 대결 구도가 될 가능성이 크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트럼프는 이미 ‘자본주의 vs 사회주의’라는 구도로 대선을 치루겠다는 의도를 표명한 바 있다. 트럼프는 2008년 경제위기 이후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이 높아지고, 미국의 세계경제에 대한 지배 약화가 분명해지는 상황에서 과거 미국 자본주의의 회복과 세계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Great America Again’이란 구호를 내걸고 당선됐다. 반면 샌더스는 자본주의가 낳은 경제적 불평등, 생태계 파괴, 노동자 삶의 악화 등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적 미래로 ‘민주적 사회주의’를 내세우고 있다. 트럼프가 미국 패권으로 상징되는 미국 자본주의의 ‘과거와 현재’를 상징한다면, 샌더스는 ‘민주적 사회주의’로 미국 자본주의의 ‘미래’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과거로의 회귀 vs 미래를 향한 전진’이란 프레임과 구도가 2020년에 펼쳐질지 흥미롭게 지켜볼 일이다.
또 하나 주목해야 할 점은 미국 정치구도에서 민주당(자유주의)과 공화당(보수주의) 이외에 ‘민주적 사회주의’라는 새로운 정치세력이 성장할 수 있을지, 그래서 양당 구도가 무너질 수 있을지 여부다.
샌더스 선거 캠페인의 조직적 배경에는 ‘민주적 사회주의자(Democratic Socialist of America, DSA)’가 자리 잡고 있다. DSA는 지난해 2년에 한 번씩 치러지는 ‘전국대의원대회’에서, 2020년을 거치며 10만 명 이상의 회원을 확보해 대중정당으로 재탄생하자는 전망을 제시한 바 있다. DSA의 회원이자 현재 미국의 차세대 정치인으로 주목받고 있는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 코르테스(약칭 AOC)는 올해 1월 언론 인터뷰에서 “다른 나라에서 조 바이든과 저는 같은 당에 있지 않을 것이지만, 미국에서는 ‘우리’”라고 언급하며, 미국 민주당 주류 세력과의 정치적 차이점을 강조한 바 있다. 경제위기와 생태위기, 정치위기가 맞물린 가운데 프랑스에서는 2017년 공화당과 사회당의 양당구조가 무너지고, 마크롱이라는 신자유주의 정치인이 집권했으며 이후 극우세력이 부상하고 있다. 과연 미국에서는 자본주의적 양당구도가 약화하고 ‘민주적 사회주의’라는 새로운 미래가 열릴지 두고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