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은 집단 따돌림이었다. 이상하게도 당시의 감정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단지 아이들이 운동장에 나가 뛰어놀고 있을 때 혼자 빈 교실에 남아서 책을 읽던 기억, 선생님이 다소 걱정스럽게 ‘너는 왜 나가서 놀지 않니?’라고 물어보던 기억, 그때 빈 책상 위로 미끄러지던 햇빛의 질감을 기억한다.
또한 나는 아직도 박. 영. 희라는 이름을 기억한다. 당시 아이들을 몰고 다니던 짱의 이름을 지우지 못한 걸 보면, 나름의 내상은 상당히 깊었던 모양이다. 사실 옛날 시골 초등학교의 집단 따돌림이란, 요즘 일어나는 일들에 비하면 순박하기 짝이 없었다. 그저 아이들은 나를 자신들의 놀이에 끼워주지 않은 것뿐이었다. 기껏해야 눈을 흘긴다던가 소리를 지른다던가 두 갈래로 땋아 내린 머리를 잡아당긴다던가 하는 정도였다.
나는 아버지의 잦은 전근으로 초등학교 입학하고부터 거의 한 해 한 번꼴로 전학을 했다. 성격도 내성적이라 친구를 사귀는 것이 쉽지 않았는데, 2학년인가 3학년인가 전학지인 H읍에서 그런 적극적인 거부감에 맞부딪친 것이다. 따지고 보면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다. 조그만 은행 지점장이라해도 촌에서는 유지급이어서 나는 유지의 딸답게 당시로선 흔치 않던 백화점 발 빳빳한 기지 원피스에 일본제 백팩 란도셀을 멘 모습이었다. 그 시절 그런 차림은 화보에서나 볼까,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은 아니었으니 아이들에게 나는 외계인처럼 이상하고 이질적인 존재였을 것이다.
덕분에 나는 외톨이가 되었다. 그러나 덕분에 책을 많이 읽게 되었고, 텅 빈 교실에서 혼자 남아있을 때의 그 적막감을 이해하게 되었다. 창문 너머 바람에 실려 오는 아이들의 생기 찬 목소리들이 방안의 정적을 더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어쩌면 그때부터 나는 온 세상 ‘외톨이’들의 고립감에 대해 쉽게 감정이입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웠던 것도 같다.
2.
초등학교 5학년 때 아버지가 해직되었다. 제3공화국이 수립된 이후, 정부 부처와 국영기관장들이 전면 물갈이되던 시기, 시골 촌구석의 국영은행 지점장에게까지 그 여파가 닥쳐 전임지에서 일어난 창고 화재 책임을 묻는다며 해직 통지가 왔다고 들었다. 어머니와 주변 사람들이 청와대에 탄원서를 낸다며 부산하게 들락거렸는데, 지금 생각하면 애당초 하나마나한 일이었다.
어쨌든 그래서 우리 일곱 식구는 사택에서 쫓겨나 길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고지식한 아버지는 유학하는 조카들 학비 대고 집안 기둥 노릇하느라 재직 중 집 한 칸을 마련해두지 못했다. 덕분에 도시로 나왔지만, 시골 유지였던 우리 집은 하루아침에 도시 하층민으로 전락했다. 우리 가족사의 파란만장은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그러나 그 전락은 나의 상상력을 확장하는 데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
고지식한 아버지는 세상살이 수완에는 젬병이어서 아버지보다 열 살이나 나이 아래였던 어머니가 생활전선의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섣불리 장사 같은 걸 시작했다 다 말아먹고 결국은 어머니가 봇짐장사 같은 일까지 하게 되었다. 도매상에서 자질구레한 물건을 떼다 시골 마을에 파는 그 일이 무슨 대단한 호구지책이 될 거라 생각했을까 싶지만, 시골 유지 사모님으로 우아하게만 살아온 어머니가 낸 그 용기는 실로 경이로운 것이었다. 물론 그 일도 오래가진 못했다. 그러나 그 시절 어머니가 지나가는 말처럼 했던 이야기는 사금파리처럼 가슴에 박혀 지금도 가끔 쨍한 상처를 드러낸다.
그때 우리가 살던 바닷가 소도시에는 산 중턱을 가로지르는 산복도로가 있었다. 어느 날 장사 길에서 돌아오는 길에 어머니는 그 산복도로 정류장에서 버스를 내렸다. 아직 해는 남아있었고, 길에 내려서니 도시의 앞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였다.
어머니는 그 순간 문득 그 바다에 ‘확 빠져죽고 싶었다’고 했다. 그녀는 길가에 쭈그려 앉아 그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날 해가 저물어 캄캄해질 때까지 어머니가 돌아오지 않아 나와 내 동생은 집 앞에 나가 기다렸다. 어두워져서야 돌아온 어머니는 나중에 ‘자식 새끼들 얼굴이 생각나서’ 일어났다고 했다. 내가 들은 건 그 뿐이었다.
그런데도 오래도록 나는 그 시간을 생각했다. ‘확 빠져죽고 싶었다’와 ‘자식 새끼들 얼굴’ 사이의 그 알려지지 않은 시간. 어머니의 그 시간이 마치 나의 것처럼 섬세하게, 화선지가 물감을 빨아들이듯 온 신경을 통해 올올이 전해오는 것이었다. 햇빛이 뛰놀던 바다 위로 노을이 떨어지고, 푸른 바다 빛이 차츰 어둠에 묻혀 지고, 항구의 배와 하늘의 별들이 하나둘 밝혀질 때까지...그 일초 일초의 시간이 지나는 동안 내 어머니가 느꼈을 절망과 고독감이.
3.
한 남자가 지상 25미터의 CCTV 철탑 꼭대기에 있다. 서울 한복판 가장 혼잡한 강남역 사거리에서 빌딩의 불들이 하나씩 밝혀져 불야성이 되는 저녁과 자동차의 물결이 밀물처럼 밀려드는 아침을 내려다보며 말이다. 325번의 저녁과 아침. 그 사이 비 오고 바람 불고 눈 오고 그 사이 여름 오고 가을 오고 겨울 오고 다시 봄이 왔고, 그는 아직 그곳에 있다.
![]() |
[출처: 참세상 자료사진] |
뉴욕타임즈가 엊그제 바로 그 사람, 삼성과 싸우는 해고노동자 김용희씨의 기사를 실었다. 신문의 전면을 세로로 길게 잘라 그가 고공농성을 하고 있는 철탑 사진을 담은 편집은 그 철탑의 높이보다 그 위에 홀로 있는 그의 ‘고립’을 돋을새김처럼 또렷하게 부각해준다.
노조를 만들려고 했다는 이유로 해고 당한지 25년. 그 세월 동안 그는 복직을 위해 노력했고 우리 사회의 절대 강자인 회사를 상대로 보상과 사과를 요구했다. 그러나 회사는 요지부동이었고 그의 인생은 갈갈이 찢겼다.
뉴욕타임즈를 인용하자면 그는 어느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가 이곳에 오르기 일주일 전, 내 아들만큼 어린 삼성의 보안 요원이 내 얼굴에 침을 뱉었습니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습니다. 아, 내가 땅 위에서 할 수 있는 건 다 했구나. 그러나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구나. 그래서 나는 결심했습니다. 이제 나는 이 고공에서 싸우겠다고.”
나와 내 형제들은 더 이상 도시의 하층민이 아니다. 부모의 희생을 디딤돌로 고등교육을 받았고, 아등바등 이 사회의 피라미드를 기어올라 중산층의 지위를 차지했다. 나는 ‘살아남은’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에 깊은 안도감을 느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내 속에는 언제나 그 어린 날의 ‘외톨이’가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다. 중산층의 나는 그 모든 투쟁과 나는 상관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내 속의 그 외톨이는 우리 사회의 관계망에서 절연된 자들의 절망과 고독감에 나도 모르게 공명한다.
고통의 기억이 없는 이들도 있을까? 우리는 우리 각각이 경험한 ‘고통의 기억’이라는 통로를 통해 타인의 고통을 유추하고 감각한다. 그런 경험도 능력도 없는 자들이 세상을 아비규환의 지옥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런 자들에게 세상을 맡겨서는 안 되는 이유다.
기업도 사람이 만드는 것이다. 삼성은 왜 침묵하는가?
정부는 왜 그를 방치하는가?
뉴욕타임즈의 사진을 보며, 나는 그려본다. 한 번도 올라가본 적 없는 25미터 철탑 위 0.5평의 공간에서 내려다보이는 아득한 서울 불빛의 바다를. 높아질수록 거세지는, 그래서 살갗에 에어드는 바람을 느낀다. 바람소리에 섞여 올라오는, 저 아래 저마다의 삶에 취해 만들어내는 도시의 소음을 듣는다.
그것을 상상할 수 있다면, 그의 절망과 고독감이 더 이상 나와 ‘상관없는 것’이 될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