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시위의 정점과 제도 개혁의 딜레마

[기고] “흑인 생명이 중요하다(The Black Lives Matter)”에서 “경찰기구 폐지”까지(Defund the Police!)

미국 인종차별 시위가 경찰제도 전반에 대한 급진적인 개혁 요구로 비화하고 있다. 6월 6일 주말이후 시위는 “흑인 생명이 중요하다(The Black Lives Matter)”보다 경찰 개혁 나아가 경찰기구 폐지라는 급진적인 구호로 뒤덮였다. 이런 시위대의 구호에 대해서 의회와 정당, 시민사회는 받아들이면서도 각각 온도 차이를 보이고 있고, 미국 시위의 향후는 한국에서 진행된 광우병 시위처럼 매일 밤마다 진행되는 시위와 제도개혁을 둘러싼 공방전의 투트랙으로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전체적으로 보면 미국 인종차별 항의시위는 한국의 2008년 광우병 반대 촛불시위와 2016년 박근혜 퇴진 주말 촛불 양자를 혼합한 모습으로 보인다. 매일 시위대는 밤만 되면 나온다. 이는 광우병 시위대가 매일 밤마다 ‘촛불’집회를 시작하여, 사실상 대규모 시위를 한 달여 끌어간 모습과 유사하다. 하지만 또한 다양한 집단들, 공화당 대선 후보였던 미트 롬니 상원의원이나 문제의 백인경찰이 소속됐던 미네아폴리스시의 시장까지 참여하는 주말 집회 시위의 양상은 축제와 시위, 행진을 섞은 모습으로 2016년 한국의 박근혜 퇴진 촛불과 비슷하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할 것은, 약탈의 모습은 사라졌지만 이 항의시위가 애초에 약탈과 폭력 시위까지 한때 급속히 치달았던 시위였고 여러 가지 이유로 서서히 완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점에서 미국의 이번 인종차별 항의시위는 근본적으로 평화시위 프레임에 초반부터 갇혀있던 한국의 박근혜 퇴진 촛불 시위와 다르다. 양상에서 초기의 ‘폭력 시위’와 급진화, 반정치(anti-politics)적 양상은, 이에 놀란 현 체제로 하여금 유화적 제스처를 취하게 만들면서 그 자체로는 급속히 탈 급진화되어가고 있는 점은 한국의 광우병 촛불 시위와 비슷하지만 말이다. 여하튼 초기 흑인들이 주도하던 폭력시위는 이후 백인 다수를 포함한 복수의 다양한 사회집단들이 참여하는 평화시위가 서서히 대체해나가는 ‘복합적인’ 항의시위의 연쇄 양상을 보이고 있다. 그와 함께 시위는 단지 흑인 차별과 백인 경찰의 비무장 흑인 살해를 넘어서, ‘경찰 테러리즘’에 대한 공분과 제도적인 변화의 요구를 대중적으로 확산시키고 있다.

여기서 트럼프 대통령의 시위에 대한 강경 대응과 발언이 시위의 대중화에 기폭제가 된 것도 분명해 보인다. 백인들 다수가 이 시위에 참가하고 있는데, 이들 다수는 민주당 진보파들이고, 이들은 이번 인종차별시위를 반 트럼프 시위로 바라보고 참여하고 있다. 이는 한국의 박근혜 퇴진 촛불과 유사하다. 촛불이 민주당의 비판적 혹은 무조건적 지지자들과 기존의 반 박근혜 투쟁을 전개해왔던 사회진보진영이 모이면서 거대한 광화문 촛불집회를 함께 만들고, 여기에 보수 일부도 가담하면서, ‘87년 체제’를 사수하려는 ‘범민주연합’이 구성되었었다. 그 결과가 박근혜 탄핵 및 수감, 그리고 앞당겨 실시된 대통령선거에서 문재인 씨의 대통령 당선과 자유주의 정당의 집권이었다.

하지만 미국의 현재 시위는 한국의 광우병 시위나 박근혜 퇴진 촛불시위와 위의 여러 측면들에서 차별성이 있고, 나아가 미국의 현재 시위의 불확실성과 위기의 증폭 가능성을 여전히 열어두고 있다. 이미 지적했지만 초기에 급진화됐던 시위의 양상을 체제내적으로 포섭하고, 제도적인 개혁에 대한 동의를 끌어내거나 합의를 보긴 쉽지 않을 것이다. 근본적인 문제로 ‘구조적 인종주의’와 흑인 불평등을 지적하고 있지만 그것의 해법은 매우 요원한 문제다. 특히 인종주의란 단지 인종차별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계급적 위계질서를 유지하는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점을 놓치지 말아야한다. 미국에 인종차별이 있고 한국에 계급 차별, 노동차별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단순 비교의 문제가 아니다. 미국은 인종차별의 체계를 계급적 차별로 잘 녹여내고 재생산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질서는 흑인들 중에서 계급 상층으로 이동한 이들도 포함한다. 단순히 흑백 갈등이나 구조적인 인종주의가 아니라 계급문제와 중첩된 인종주의를 ‘구조화된’ 차별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반면 당면한 시위대의 요구는 과연 제대로 제도적 개혁으로 이어질 것인가. 당장 “Defund the Police!”라는 구호가 전면에 배치되고 있다. “Black Lives Matter”만큼, 그리고 그것을 서서히 대치하며 이 구호가 전면적으로 외쳐지고 있다. 지난 주말 시위부터 그렇다. 그리고 Defund the Police(경찰 예산을 폐지하라)는 구호 옆에 “Abolish the Police Dept.”(경찰기구를 폐기하라)라는 구호나 “경찰 테러리즘 해체” 등의 더 선명한 구호도 있다. “흑인 생명이 중요하다”는 구호가 미국을 지탱하는 경찰테러리즘에 대한 문제제기로 바뀌고 있다.

이에 대해서 양대 정당들, 주의회 정치인들이 한마디씩 한다. 하지만 대부분은, 미네소타 주의회 의원인 흑인 의원의 발언처럼, 경찰예산 폐기하라(Defund the police)는 구호를 “dismantling the police”가 아니라 경찰 예산을 제대로 ‘공안’을 위해서 써야한다는 말로 해석하겠다고 하고, 경찰 폭력을 막기 위한 여러 입법들을 잇달아 내놓고 있다. 근데 나온 것들은 여전히 매우 부족하다. 문제 경찰의 블랙 리스트화, 권한 남용 경찰에 대한 조속한 기소 등의 수준이다. 이것으로 “Defund the Police”라는 아주 새로운 구호를 내건 시위대의 요구에 부응할지 의문이다.

하지만 이미 말했듯이, 한국의 광우병 촛불이나 박근혜 퇴진 촛불이 한편으로 지루한 평화시위 퍼레이드가 한참 이어지고(다른 기폭제나 새로운 ‘봉우리’가 없이), 결국 박근혜 일당의 구속 수감으로 엘리트간의 교체가 일어나는 것이 가장 큰 성과였듯이, 미국 역시 다른 한편에서 경찰제도 개혁의 문제가 전면화 되면, 시위는 다시 ‘제도정당정치’의 주변부로 밀려날 가능성이 높다.

잠정적으로 현재에 대해 진단하면, 언제나 무위로 그쳤던 인종‘시위’ 혹은 ‘폭동’의 역사로 보면, 이번 시위는 어떻게 보면 큰 결과를 내는 것으로 보이지만, 또 어떻게 보면 체제적인 위기를 잘 넘기는 과정이기도 하다. 경찰개혁에 대해서 경찰 예산의 축소와 재배치가 어느 정도 될지는 미확정적이지만, 국가 공안기구를 ‘해체’하는 일은 이 정도의 시위와 저항 스케일만으로는 달성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그는 한국의 ‘적폐청산’으로 수렴돼버린 박근혜 퇴진 운동이 보여주는 바이다. 경찰기구, 검찰기구, 사법기구의 폐지가 아니라 개선 개혁조차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시위가 폭력적이냐 평화적이냐는 시위의 양상은 시위의 성과를 미리 예정하지 않는다. 박근혜 퇴진 주말시위가 한창이던 무렵에 한국의 경우 인구대비 150만 명이 시위에 참여하면 그 시위는 완전한 승리를 향하는 불회귀점을 넘는 것으로 간주하는, 일종의- ‘이론’이라기보다는-속설이 회자하였다. 하지만 한국의 촛불시위 역시 초기 1차-4차까지 주말집회의 양상과 폭발력이 그 다음의 경로를 거의 결정하다시피했다. 150만 명이 모인 4차 시위 전에 자유주의, 보수 세력 양자가 시위에 반응하였다. 물론 시위의 새로운 기폭제가 등장하거나 시위가 새로운 세력의 투입으로 저항 에너지를 정비해 새로운 정점을 만들어내면 시위는 다른 목표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 즉 양봉이 되면 말이다. 크게 보면 러시아혁명이 그런 경우였다.

하지만 한국의 광우병 촛불도 박근혜 퇴진 촛불도 단봉이었고, 그것도 초기 양상이 결정적이었고, 이후는 3개월에 걸친 지루한 평화시위 즉 ‘보여주기’였다. 누군가 기다렸을지 모르는 새로운 계기점은 결국 발생하지 않았다. 박근혜 퇴진(탄핵)과 수감 이상의 일들은 벌어지지 않았다. 전경련 해체도, 경찰기구 혁파도, 검찰기구의 재편도 과연 누가 고양이의 목에 방울을 달거나 나아가 단두대로 보낼 것인가에서 여전히 답은 없었다. 주체가 없었다. 현 정부는 검찰인사 개혁으로 공안기구 개혁을 도모했지만 보기 좋게 제 발등을 찍혔다. 이후 검찰과 현 집권세력의 권력투쟁은 이미 예고된 셈이었다.

이 점에서 오히려 한국의 촛불시위에 이어 미국의 인종차별 항의시위까지 ‘저항’이 가진 이중성에 필자는 주목한다. 내가 여기서 이중성이란 개념으로 뜻하는 것은 항의시위(protest)의 양상, 제도적 집합행위로의 수렴이 저항 자체의 발전을 봉쇄하는 이중성이다. 단지 미국의 이번 시위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항의시위가 반 권위적이고 ‘반체제적’인 성격, 도전적인 성격을 부분적으로 가지면서도 동시에 체제 유지 보수의 성격을 가지는 양면성이 갈수록 여러 사례들을 통해서 두드러지게 발견된다. 대표적으로 한국의 박근혜 퇴진 촛불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오큐파이 운동, 다양한 사회주의 대안운동, 브렉시트 찬반시위 등 좌우 가리지 않고 보이는 전 지구적인 시위의 양상이다. 과연 왜 시위는 이렇게 체제유지적인 성격이 강화되고 있을까? 사회운동 연구자로서 이는 계속 분석하고 이론적으로 주목해야할 문제라고 본다.

참고문헌

권영숙, “촛불의 운동정치와 87년 체제의 ‘이중 전환’”, <경제와 사회> 2018, vol., no.117, pp. 6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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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배성윤

    체도적인 개혁에
    오타 정정해주세요

  • 아저씨

    글을 볼 때 체제유지적인 성격의 강화는 아닌 것 같습니다. 글쓴이 본인이 연구자라서 현실운동이 강하게 느껴지나 봅니다. 그래서 체제의 유지라고 보면 무난할 것 같네요. 구소련이 무너진 후는 분명 강화라고 읽혀질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글쓴이의 기사를 보건데 그런 강화는 아닌 것 같습니다.

    체제 유지의 예로는
    1프랑스와 같은 배부른 복지
    2자본주의의 물질적 풍요
    3대안세력의 부재

    혁명의 시기라고 하면 기아와 국가간의 전쟁이 필수요소처럼 따라붙지 않습니까. 경찰기구 폐지는 많이 나아간 것 아닙니까. 이것은 자본주의가 그만큼 흐려졌다는 반영으로 보입니다. 자본주의 물질적 풍요는 빈민일지라도 밥 먹고 옷 사입으면 허위의식으로라도 버틸 여지가 생기는 것 같습니다. 두서없이 썼습니다만. 지도력의 부재와 대안조직의 부재가 가장 핵심일 것입니다. 연구하려면 고생하겠습니다. 이행기는 짧지 않고 긴 세월이 걸릴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자본주의의 암흑기라 가정해놓고 연구해도 무난할 듯 합니다. 나도 자본주의의 물질적 진보와 사회구조(인간관계)의 연관성에 대해 고뇌를 해보는 시간을 가졌었습니다. 전자의 측면만 보면 결국 인간성이 무너지는 측면이 있습니다. 인간관계를 고려하지 않는 자본주의의 발전은 그 한계에 직면할 것으로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