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금지법, 우리의 삶을 셀 수 있도록

[레인보우]

헤아릴 수 없는 차별

10명. 지난 6월 29일 정의당 장혜영 의원이 대표 발의한 차별금지법안의 발의자 명단에 이름을 올린 의원의 수다. 14년. 지난 2006년 국가인권위원회가 입법추진을 권고한 후 여러 차례의 시도에도 이 법이 제정되지 못한 채 흐른 시간이다. 헤아릴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간 차별에 시달린 이들의 수, 그들이 그렇게 보내야 했던 시간, 그들이 맞서 싸워야 했던 시간. 삶의 곳곳에서 촘촘하게 죄어 오는 그야말로 너무 많은 차별을 너무 많은 이들이 겪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차별을 다루는 공적인 언어가 부재한 가운데 너무 많은 차별이 차별로 인식되거나 규정되지 않기에, 차별은 말 그대로 헤아려지지 않은 채 계속되고 있다.

한편으로는 보수정당과 보수기독교가 주축이 돼 차별금지법 제정을 (또한 생활동반자법 제정, 군형법 추행죄 조항 개정, 지역자치단체 인권조례 제정 등을) 전방위적으로 방해했고 또 한편으로는 평등과 민주를 표방하는 유력 정치인들이 그에 부화뇌동했다. 예컨대 과거 대선에서 차별금지법 제정을 공약했던 문재인 현 대통령은 2017년 대선에서는 한국기독교총연합회 소속 목사들을 만나 차별금지법 제정에 따른 “불필요한 논란을 막아야 한다”라며 “당의 입장이 확실하니까 염려하지 않으셔도 괜찮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번 발의에 동참한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2명에 불과하다. 그 사이 셀 수 없는 삶들은 또한 세어서는 안 되는 것이 되기도 했다. 사회적 혼란이니 역차별 우려니 하는 악의적 수사들이 무기가 돼, 차별을 호소하는 일 자체를 차단했다.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해고당한 이들, 경전에 반하는 동아리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정학당한 이들, HIV 감염인이라는 이유로 진료를 거부당한 이들, 국적을 이유로 복지제도에서 배제당한 이들, 동성이라는 이유로 혼인신고를 거부당한 이들이 있다. 혹은 여성이거나 어리거나 장애인이라는 사실이 여전히 합리적이고 설득력 있는 ‘이유’가 돼 이들의 경험은 차별로 여겨지지 않는다.

장애인차별금지법이나 고용평등법 등 몇 가지 개별 영역에서의 차별금지를 명시한 법들이 있지만 차별은 그처럼 특정한 주체에게 특정한 방식으로만 가해지는 것은 아니다. 차별을 포괄적으로 규정하는 국가인권위원회법이 있지만 강제력 없는 위원회의 시정 권고는 다른 정부기관에조차 충분히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차별을 알아채고 개입하며 평등한 관계를 실천하는 힘”

2007년 처음으로 정부안이 발의된 후, 차별금지법안은 여러 차례 발의됐다. 대부분 ‘임기 만료폐기’로 끝났고 일부는 자진 철회됐으며 종종 성적지향, 성별정체성 등의 언급이 삭제된 채 발의되기도 했지만 꾸준히 논의 선상에 있었다. 연이은 보수정권 역시 관련 위원회를 운영하거나 국정과제로 언급하는 등 형식적인 수준으로나마 논의를 진행했다. 그러나 현 정권은 대선후보 시절부터 제정 반대 입장을 밝혔고, 얼마 전 임기가 종료된 20대 국회에서 역시 단 한 차례도 발의되지 않았다.

이번 안이 발의된 이튿날 국가인권위원회는 평등 및 차별금지에 관한 법률, 약칭 평등법 제정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시안과 함께 국회에 표명했다. 또한 그로부터 며칠 지나지 않아 국회 홈페이지에 포괄적 차별금지법 입법을 촉구하는 시민청원이 등록됐다. 2013년에 발의됐다가 이내 철회된 두 개의 안과 2012년 발의됐으나 2016년 임기 만료로 폐기된 한 개의 안 이후로, 수년 만에 국회에서의 논의가 재개된 것이다. 차별금지법제정연대는 앞에서 언급한 시민청원의 동참을 호소하며 차별금지법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차별금지법은 서로의 동료가 되고자 하는 시민들의 평등역량을 높입니다.”

차별금지법은 단순히 차별을 금지하거나 피해자를 구제하는 도구가 아니라, 그 자체로 “차별을 알아채고 개입하며 평등한 관계를 실천하는 힘”이라는 뜻이다. 그렇다. 차별금지법은 강력한 처벌이 핵심이 아니기도 하지만,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곧바로 강력한 처벌이 수행되기는 어렵다. 남녀고용평등법이 존재함에도 공공연히 남성이 우대를 받고, 노동법이 존재함에도 최저임금 위반부터 노조파괴 공작이 흔하게 이뤄지는 것과 마찬가지다. 아마도 차별금지법의 시작은, 서로가 서로의 차별을 의식할 수 있게 하고 그로써 평등을 만들 수 있게 하는 일일 것이다.

우리의 삶을 셀 수 있도록

비로소 우리의 차별을, 우리의 삶을 셀 수 있게 될 것이다. 몇 가지의 차별을 몇 차례 당해 몇 시간을 고통받았다고 말할 수 있게 되리라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차별을 차별로 의식하고 말할 수 있게 되리라는 의미에서다. 삶으로 여겨지지 않았던 것들과 삶이 될 수 없었던 것들을 삶으로 만들 수 있게 되리라는 의미에서 말이다. 비로소 우리의 차별이, 우리의 삶이, 지워지지 않게 될 것이다. 심지어는 차별이 여전하다 해도, 지워지지 않고 이야기될 수 있다면 삶은 전혀 다른 것이 되곤 한다.

차별을 말할 수 없다면, 애초에 차별을 알아챌 수 없다면, 평등은 불가능하다. “차별을 알아채고 개입하며 평등한 관계를 실천하는 힘”이 없다면 존엄도 행복도 불가능하다. 누군가의 특정한 차별행위를 처벌하거나 누군가를 특정한 차별로부터 보호함으로써 사회의 질서와 성원의 안전을 도모하는 성벽이 아니라 오히려 삶 대 삶으로서의 자유로운 만남을—그러므로 때로는 (평등한 사이의) 충돌을—비로소 가능하게 해 줄 새 터가 절실하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그 토양을 비옥하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