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참세상 자료사진] |
‘멜섭왹비’라는 닉네임을 사용하는 사람이 있다. 말투가 개구지고, 레몬색에 가까운 노란 옷과 하얀 신발이 어울리며, 웃을 때 보이는 덧니가 귀여운 사람이다. 그는 자신을 설명하는 이름 중 하나로 성노동자를 골랐다. 확실히 그건 창녀, 매춘부, 윤락녀, 성매매 피해자보다는 자기소개할 때 내놓기 좋은 이름으로 들린다. 그는 동시에 업주에 의한 성폭력, 임신과 같이 성노동자들이 겪는 문제를 상담해주거나 성노동에 대한 인식 개선 프로젝트 작업을 하는 등 성노동자 권리 운동을 활발히 하고 있는 활동가이기도 하다.
지난 5월 15일, 업무 중에 동의하지 않은 성적 접촉을 겪은 그는 트위터에 다음과 같이 썼다. “정말 죽고 싶다. 만날 때마다 목 조르는 지명(손님)한테 이번에 목은 안 졸리고 항문에 억지로 삽입 당했고 저는 정말 죽고 싶네요.”
‘K*****’이라는 닉네임을 사용하는 한 트위터리안이 이 트윗을 캡처해 올리며 “성매매는 인간을 갉아먹는다. 성매매는 노동이 아니다. 성매매로 돈 못 번다. 지속가능한 삶과 행복을 원한다면 저쪽엔 절대 발 들이지 마세요”라고 쓰면서 ‘멜섭왹비’가 경험한 성폭력 피해의 규모는 엄청나게 확대됐다. ‘멜섭왹비’는 ‘K*****’의 트윗을 뒤늦게 발견하고 해당 발언이 성폭력 2차가해임을 지적하며 사과를 요구했는데, 이에 반발한 수많은 ‘페미니스트’들이 #k*****은_2차가해를_하지않았다 라는 해시태그를 사용하며 ‘멜섭왹비’를 괴롭히기 시작한 것이다. n번방 피해를 중점적으로 다뤘던 반성폭력 단체의 활동가 중 한 명도 문제의 해시태그를 사용하며 “이게 2차 가해라면 반성매매 진영은 다 2차 가해자겠네요”라는 말을 보탰다.
‘멜섭왹비’는 자신의 성폭력 피해를 인정받기 위한 글을 계속 써야 했고, 사건은 더 널리 알려져 남초 커뮤니티, 유머 저장소, 20만 구독자가 지켜보는 유튜브 채널 등에서 함부로 오르내리며 조롱당했다. 이 모든 과정 중에 ‘멜섭왹비’는 자살하라는 메시지를 반복적으로 받게 된다. 괴롭힘을 못 이겨 죽겠다고 말하면 이왕이면 빨리 죽어 달라, 죽는다면서 왜 안 죽냐는 멘션이 공공연히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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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섭왹비’는 2월에도 한차례 고초를 겪은 바 있다. 코로나로 인해 성판매자가 생계를 위협받는 현실을 ‘질병관리본부의 철저한 역학조사가 가져오는 생각지 못한 긍정적 부분’이라 표현한 글에 “코로나 사태로 수입이 반 토막 나 원래 수입대로라면 받을 수 있는 치료도 못 받은 상태로 원룸에서 아픈 몸으로 와식생활하고 있다”며 “다른 업종이 이렇게 파탄 났어도 긍정적인 효과라고 말할 거냐”고 분노했다가 사이버불링을 당했고, 1200명이 넘는 사람이 그의 트윗을 공유해 원색적인 욕설을 퍼부었다. 역시 유머 저장소를 비롯한 여러 남초 커뮤니티에도 퍼졌다.
성매매로는 돈을 못 번다, 행복할 수 없다는 주장이 득세했던 5월과 달리 그때 ‘멜섭왹비’에게 향했던 비난은 성매매로 쉽게 떼돈 벌면서-행복하게 들린다-세금도 안 낸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대체 ‘멜섭왹비’는 돈을 벌 수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혼란스러운 가운데 내내 일관적인 반응은 자살하라는 저주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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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의 ‘멜섭왹비’는 키스방 출근을 한다. 키스방은 페이가 적고 진상은 많은 업종이다. 성노동을 꼭 해야 한다면 다른 업종에 있는 편이 덜 힘들다. 아마 ‘멜섭왹비’가 나보다 더 잘 알 텐데, 그런데도 키스방은 왜 ‘멜섭왹비’에게 왔을까?
원래 유흥업소에 다녔던 그는 2월 무렵부터 코로나로 인해 손님이 줄어들자 일수까지 고려할 정도로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 그러다 관계 위주 업종으로 옮기자는 실장의 권유를 거절하지 안/못하게 됐고, 거기서 일하는 동안 5월 15일의 성폭력 피해를 경험하게 됐다. 그리고 자신의 성폭력 피해 사실이 유튜브에 올라올 즈음 그 일마저 잃게 된다. 실장이 인터넷에 올라온 조롱 게시글들을 봤을지, 그게 ‘멜섭왹비’ 이야기라는 걸 알아차렸기에 해고를 통보했던 것인지 우리는 정확히 알 수 없다.
8월에, 그는 내게 ‘눈을 떠보면 모두 저만치 앞으로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라고 했다. 이 기억이 괴로운 건 자기 혼자고, 자기 혼자만 여기에 멈춰 있고, 다들 떠난 것 같다는 그의 말은 아마도 사실일 것이다. 누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도 사실은 그렇게 된다. 기회가 닿을 때마다 애써 상대의 입장으로 돌아가 보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우리의 거리는 계속 멀어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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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대로라면 성폭력 피해자의 삶을 손가락질하면서 “저것 좀 보세요. 쟤 저렇게 살다가 성폭력 당했대요. 저렇게 살지 마세요”라고 말하면 안 된다는 비판이 수용되는 선에서 사건이 끝나야 했다. ‘멜섭왹비’가 경험한 피해의 원인은 ’멜섭왹비‘가 감당해야 할 선택-생존하기로 한 것, 이를테면 성노동을 하기로 결정한 것-따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건 전적으로 상대의 의지에 반하는 행동을 강압적으로 실행한 가해자의 잘못이었다. 피해자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이든, 어떤 상황이었든 성폭력 가해는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단지 ’멜섭왹비‘가 성노동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런 상식이 페미니스트들 사이에서도 작동하지 않았다.
나는 성노동자 ‘멜섭왹비’의 역사를 성매매 피해 사례의 도식에 맞춰 다시 서술하면 그를 향한 공격의 규모를 쉽게 줄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빈곤과 질병과 허점투성이인 복지 제도와 당장 먹고 자는 일이 힘든 여자들의 존재와 그들을 이용해 돈을 버는 악한 산업 얘기를 하면 좋아할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렇지만 여기서 그가 성매매 피해자인지 노동자인지 혹은 둘 다인지는 전혀 문제의 핵심이 아닌데도, 그와 당신이 조금도 친하지 않은데도 당신에게 인정받을 만한 방식으로 그의 사생활을 실토해 심판받고 난 후에야 그가 보통의 타인이 갖는 권리를, 최소한의 존중과 배려를 획득할 수 있게 되는 현실은 너무 부당하고 모욕적으로 느껴진다.
‘멜섭왹비’라는 닉네임을 사용하는 사람이 있다. 그것만으로 충분해야 한다. 그는 자신을 설명하는 이름을 고를 수 있다. 동의 없는 성적 접촉을 거부할 권리가 있다. 노동하고, 생계를 유지하고, 생존할 권리가 있다. 이해하기 싫고, 차라리 자살했으면 하는 사람일지라도, 그는 아직 안 죽고 살아있다. 여전히 웃을 때 귀여운 편이다. 나는 살아있는 ‘멜섭왹비’를 위한 노력을 요청하고자 한다. 그가 보낸 시간의 일부분을 소개함으로써 우리에게 기회를 주고 싶다.
*‘멜섭왹비’님의 허락을 받고 쓴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