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통념에 맞는 교육”
지난 8월 초, 몇몇 초등학교에 ‘외설적’이고 ‘반사회적’이며 ‘포르노 같은’ 책들이 들어갔다. ‘나다움 어린이책’이라는 이름의 사업으로 여성가족부가 민간 기업, 단체와 함께 배포한 책이다. 그 일부를 문제 삼아 사업 폐기, 여가부 해체, 장관 사퇴 등을 외친 이들은 외설적이고 반사회적이라고 했지만 실은 이미 널리 읽히고 호평 받는, 또한 여러 차례의 심의를 거쳐 선정된 성교육 도서들이었다. 이들은 성관계나 자위를 묘사하거나 성별에 관계없이 사랑할 수 있다고 쓴 대목을 트집 잡았다. “동성애 자체, 동성혼 자체를 미화하고 조장하는 내용까지 담고 있어서 많은 우려가 있다”는 국민의힘(당시 미래통합당) 김병욱 의원과 보수 단체들의 항의에 여가부는 빠르게 해당 도서들을 회수했다.
같은 달 말, 울산시 교육청은 성희롱·성폭력 예방 종합대책을 발표했다. 이번에는 그중 하나로 제시된 성교육 패러다임 전환, 국제 표준에 부합하고 실효성 있는 포괄적 성교육 실시 계획이 트집거리가 됐다. 울산시교원총연합회(울산교총)는 포괄적 성교육이 “동성애 행위를 정상의 범주로 가르치고” “포괄적 차별금지법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며 불만을 표했다. 울산교총은 “정제되고 사회통념에 맞는 교육으로 실시해야 하며 (…) 초, 중등 시기에는 성에 대한 인성교육에 초점을 두어야 하고, 성인에 가까워지는 고등학교 시기에 구체적인 성에 대한 내용을 교육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반사회적이지 않은, 사회통념에 맞는 교육을 요구하는 이들이 있다. 자연스레 궁금해진다. 그들은 지금의 사회를 어떻게 경험하고 상상하고 있는지 말이다. 울산 교육청의 종합대책은 울산의 한 초등교사가 학생과 동료 교사들에게 성희롱 발언 등을 일삼아 온 것이 알려진 후 마련됐다. 그 토대가 된 실태조사에서는 울산시 교직원의 10% 가까이가 성희롱 피해 경험이 있으며 그 절반이 참고 넘어갔다는, 공식적인 문제제기는 3%에 못 미친다는 결과가 나왔다. 내가 아는 한 지금의 사회란 이런 식이다. 어떻게든 통념을 바꾸어야 할 사회다. 교총과는 정반대로,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울산지부는 논평을 통해 종합대책 수립을 “성비위 사건을 개인의 일탈로 축소하지 않고 자성과 변화의 계기로 삼은 것”이라 평했다. 또 성폭력 예방 및 처벌 강화 조치는 물론 “우리 사회의 공고한 성차별과 성폭력적 문화를 거부하며 ‘한 명의 소수자도 배제하거나 차별하지 않는’ 교육”으로서의 포괄적 성교육에도 환영과 지지의 뜻을 밝혔다.
교육과 재생산
꼭 이런 사건과 통계를 들지 않더라도, ‘사회통념에 맞는 교육’이란 언제나 의심스럽다. 지금껏 이 세계를 거쳐 간 그 누구도 이상적인 사회를 살아본 적 없음으로, 사회는 언제나 조금씩 변화함으로, 교육은 필연적으로 사회통념을 벗어난다. 어느 방향으로 어떤 속도로 얼마만큼을 벗어나건, 적어도 더 나은 사회를 상상하고 그를 위해 노력하는 교육이라면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차이를 이야기하는 것이 그 본령일 것이다. 어떤 변화와 어떤 실험을 시도할지에 대해 생각이 다를 수는 있다 하더라도, 무작정 사회통념에 맞아야 한다고―혹은 미화된 과거를 회복해야 한다고―말하는 것만큼은 불가능한 영역이라는 뜻이다. 그런 말을 할 수 있을 가능성은 두 가지다. 교육에 관심이 없거나, 이상적이지 않은 지금의 사회가 너무도 마음에 들거나. “우리 사회를 지탱해 온 올바른 가치관을 붕괴시키는 이러한 위험한 방향성에 대해 울산교총은 강력히 반대를 표명한다”는 말에서, 둘 중 어느 쪽을 읽어내도 어색하지 않다.
이런 말들 곁에 “가족과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성교육”에의 요구가 나란히 놓인다. 한편으로는 임신·출산으로 이어지지 않는 (“쾌락을 추구하는”) 성관계를, 다른 한편으로는 곧 존치 시효가 끝나는 형법 낙태죄 조항을 염두에 둔 말로 읽어도 좋을 것이다. 또한, 더 나은 삶을 위한 교육에의 관심이 일천한 것과 마찬가지로, 태어났거나 태어날 이들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데에도 관심이 없다고 짐작해도 좋을 것이다. 사회통념을 넘어 비로소 가닿을 수 있을 안녕에 관심을 두지 않고서 삶을 소중히 대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테니 말이다. 어떤 이들의 불행을 묵살하고자 하는, 어떤 이들의 고통을 그저 거름으로 삼아 굴러가고자 하는 사회에서 생명은 비천한 곳에 머문다. 통념을 더욱 단단히 굳히려는 교육 곁에서는 다만 생명을 도구 삼아 체제를 유지하려는 재생산만이 가능할 뿐이다. ‘생명’들에게 아무런 자리도 내어주려 하지 않는 이들에게 재생산이란 말 그대로의 재생산, 그러니까 지금의 반복일 뿐이다. 새로운 생명, 새로운 내일이 아니라 오직 영원한 지금만이 욕망된다.
영원한 지금을 바라는 이들에게
사회통념에 맞는 올바른 가치관으로 지금의 사회를 지탱하는 이들, 출산하는 가족만을 도모하는 이들이 누락하는 것이 있다. 지금의 영원한 반복만을 도모하는 이들에게 미래는 없다. 미래는 오히려 지속에 반대하는 이들, 반복을 거부하는 이들에게서만 가능하다. 이곳에 미래가 없다면 그것은 건전한 풍속이 무너져서도 저출산으로 인구가 줄어서도 아닐 것이다. 지금에 반대하고 다른 삶을 모색하는 시도들을 차단했기 때문, 낡은 풍속만을 지켰기 때문, 출산으로든 이주로든 혹은 변화에의 다짐으로든 이곳에 새로 등장한 이들에게 아무런 자리도 내어주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새로 나타날 이들은 어차피 내어주는 자리에는 관심이 없을 것이므로, 어떻게든 무너뜨리고 새 터를 닦을 것이므로, 영원한 지금을 바라는 이들은 상상하지 못할 미래를 우리는 마주할 것이다. 그들이 상상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이들이 일굴 미래다. 이 글은 쓰고 있는 지금은 9월 28일 국제 ‘안전한 임신중지의 날’(International Safe Abortion Day)을 며칠 앞둔 시점이다. 2017년 이날 한국에서는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이 출범했다. 여전히 ‘낙태를 조장’하고 ‘생명을 경시’한다는 비난을 받는 이들이 당시 출범 기자회견문을 맺은 문장들을 다시 한 번 새겨 본다.
“진정 생명을 그토록 소중히 여긴다면 ‘낙태죄'를 폐지하고, 여성과 태어날 아이, 이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모든 이들이 제대로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실질적인 변화를 만드는 일에 국가와 사회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것이다. 우리는 앞으로도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재생산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싸움을 계속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