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대 국회에서 여성의원은 57명으로 역대 가장 많은 수를 기록했고, 지역구 당선자수(29명)는 비례대표(28명)를 앞질렀다. 하지만 이러한 성과가 무색하게 기존 정치권을 바라보는 여성의 시선은 점점 싸늘해진다. 2월 3주 차 정당 지지도 설문조사에서 무당층이라고 답한 여성은 15.2%로 전년 동기 대비 5.2%P 늘었다. 지지 정당이 없다고 답한 여성도 13.1%로 전년 동기 대비 5.2%P 늘었다.1
지난 1년 사이 정치인의 권력형 성폭력 사건이 연이어 터졌다. 지난해 4월 총선 직후 오거돈 전 부산시장의 성폭력 사건이 공론화됐고, 7월엔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성추행 사건이 드러났다. 가해자들이 속한 더불어민주당(민주당) 안팎에서 2차 가해가 벌어졌다. 진보정당들 또한 위성 정당 사태와 당내 성폭력 사건 등으로 지리멸렬한 모습을 보였다.
“오랫동안 진보정치가 희망이라고 믿었는데 배지 앞에 그렇게 무너지는 것을 목격하고 무기력하게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어요. 그때부터 지금까지 폐허를 걷고 있는 기분이 들어요.”
신지예 한국여성정치네트워크 대표는 지난해 3월, 8년간 몸담은 녹색당을 탈당했다. 탈당의 계기는 위성 정당 사태가 컸지만, 가부장적 당내 문화에 대한 반발이기도 했다. 탈당 직전엔 당직자에게 성폭력을 당해 이를 공론화했다.
폐허가 된 진보정치에서 여성의 정치세력화를 꿈꾸는 신 대표를 서대문에서 만났다. 서대문갑은 그가 총선에서 출마한 지역구이기도 하다. 마침 지난 1월 22일 성폭력 가해자가 징역 3년 6월의 형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된 터라 관련 사건의 진행 과정과 그의 근황을 먼저 물었다.
“여성의 정치세력화를 위한 활동들이 날 회복시킬 것”
“성폭력 피해자에게 일상을 회복해야 한다, 자기를 돌보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잖아요. 그런데 피해자마다 살아온 인생과 성향이 다르기 때문에 회복 과정도 각기 다르다고 봐요. 제 성격상 쉬면서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면 더 우울해지거든요. 저에겐 여성의 정치세력화를 도모하는 과정이 곧 치유 과정이에요. 박원순 사건을 비롯한 정치권 성폭력 사건에 대해 함께 싸우면서요. 제 꿈을 위해 나아가는 일련의 활동들이 저를 회복시켜줄 것이라 믿어요.”
신 대표는 성폭력 경험으로부터 온전해지기 위해 10년 이상이 걸렸다고 했다. 그는 아동 성폭력 생존자였다. 지난해 일어난 성폭력 사건에서 그가 조금 더 단단한 마음으로 사건에 대응한 것은 어렸을 적부터 내적 충돌과 치유를 훈련해 왔기 때문이다.
[출처: 민영영] |
“어렸을 때 당한 성폭력은 사법 절차가 아닌 사적인 방식으로 처리됐어요. 부모님이 그놈을 잡아서 발가벗겨 회초리로 때렸죠. 멀리서 그 모습을 훔쳐봤던 기억이 나요. 어느 날 집에서 숙제하고 있는데 저도 모르게 그 당시 생각에 빠졌어요. 오랫동안 가만히 있던 저를 엄마가 깨우셨어요. 그때 엄마는 ‘너무 힘들어하지 마. 그때 있었던 일은 네 개인의 인생에서 보면 정말 코딱지만 한 일이야. 널 상처 줄 수 없어’라고 해주셨어요. 그 이후로도 내적인 싸움은 계속됐지만, 그때 엄마의 말은 저에게 한 줄기 빛과 같았습니다. 이 땅의 여성들에겐 성폭력 고리를 끊고 다음 세대에 태어날 여성들이 조금 더 안전한 사회에서 살 수 있길 바라는 어떤 소명이 있는 것 같아요.”
성폭력으로부터 안전한 지대, 안전한 여성은 없다는 것은 지난 1월에 있었던 정의당 대표의 성추행 사건 때도 드러났다. 모든 대의기관 및 위원회 구성에 여성을 50% 이상 배치한다는 강령이 돋보였던 녹색당 역시 성폭력 고리를 끊는 데 실패했다. 신 대표는 자신에게 일어난 성폭력 사건은 당내 여성 정치를 억압했던 시도들과 연결해 살펴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가부장적인 당내 문화가 한 여성 정치인을 향한 성폭력까지 가능하게 했다는 것이다.
“당 내부에서 위성 정당 논의를 준비하는 팀이 있었는데 공동운영위원장이었던 저는 해당 정보를 전혀 듣지 못했어요. 동시에 제가 누굴 때렸다는 둥, 직장 내 괴롭힘을 했다는 둥 저를 음해하는 소문들이 퍼졌어요. 제 뒤에 NL, PD가 있다는 얘기들도요. 제가 성폭력을 당하기 반년 전부터 이런 소문들이 떠돌았는데 하승수 당시 공동운영위원장이 ‘평등문화침해사건’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내부 공론화를 시키더라고요. 저는 전운위(전국운영위원회)에 독립된 조사위원회를 꾸려서 조사해달라고 요구했는데 부결됐고요.
총선 대응에서도 제 의견이 패싱됐어요. 총선 준비가 안 되고 있어 재촉했더니 하 씨는 제가 평등문화를 침해했기 때문에, 저 때문에 못 한다고 이야기했어요. ‘2020 여성출마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외부 펀딩으로 1억5000만 원을 모아왔는데 세부 항목이 아니라고 3 천 만 원만 집행하더라고요. 녹색당 예산안엔 그동안 쭉 세부항목이 없었는데도요. 아니나 다를까 2월에 제가 공동운영위원장에서 사퇴하니 바로 위성 정당 논의를 띄우더라고요. 민주당엔 위성 정당에 최종 합류할 시 3석을 요구했고요. 저의 당내 입지가 좁아지면서 이런 상황을 지켜보고만 있는데 가해자한테 연락이 왔어요. 부산시당 위원장이랑 만나서 저의 허위 소문을 없애는 데 도움을 주겠다고요. 그리곤 저를 유인해 성폭행한 것이에요.”
성폭행 직후 신 대표는 증거를 수집했고 가해자도 성폭행 사실을 인정했다. 하지만 ‘준강간치상’ 사건에서 상해 혐의를 두고 가해자와 피해자가 다퉜다. 신 대표가 먼저 만나자고 요청했다, 신 대표에게 호감을 느끼고 고백했다는 등 가해자의 거짓말도 다수 나왔다. 신 대표는 이러한 이야기를 담아 엄벌에 처해달라며 탄원서를 작성했고, 7,134명이 동참했다. 가해자도 탄원서를 작성했다. 감형을 위해 어린 딸까지 동원했다.
“가해자가 가족들에게 탄원서를 받아왔더라고요. 거기엔 초등학생 딸이 쓴 것도 있었어요. 가해자는 딸이 정신 상담을 받으러 다녀야 할 정도로 충격을 크게 받았다고 했는데 딸을 그 지경에 이르게 만든 게 가해자 본인이잖아요. 성폭력을 저지른 아버지의 죄를 다시 한번 상기 시키고, 탄원서를 쓰게 만든 건 또 다른 폭력입니다. 그것도 아동을 향한 폭력이요. 가해자의 가족이나 지인이 탄원서를 올리면 정상참작의 사유가 되는데 그런 양형 기준 또한 바뀔 필요가 있어요.”
민주당의 ‘그따위 정치’를 끝내기 위해 서울시장 보궐선거에 출마
신 대표는 녹색당을 탈당하고 ‘그따위 정치는 끝났다’라는 슬로건을 걸고 지난해 총선에서 서울 서대문갑에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선거 결과 3.2%의 지지를 받아 3등으로 낙선했다. 이후 페미니즘과 정치에 관심 있는 활동가, 학자, 시민을 모아 11월 한국여성정치네트워크(한여넷)를 띄우고 여성의 정치참여를 확대하기 위한 활동과 피해자 연대 및 지원 등의 활동을 하고 있다. 현재 신 대표는 오는 4월 7일 열리는 서울·부산 시장 재보궐 선거 대응으로 분주하다. 이번 재보궐 선거에서 신 대표의 목표는 명확하다. ‘성폭력을 심판하는 선거’를 치르는 것이다.
[출처: 민영영] |
“민주당을 견제하기 위해 시민단체, 시민들이 제 역할을 해야 하는데 목소리 내는 곳이 별로 없단 생각이 들어요. 정당법, 선거법에 따른 제약도 크죠. 이번에 우상호 의원 규탄 기자회견을 하는데 선관위에서 우 의원 비판 현수막은 설치할 수 없다고 연락이 오더라고요. 공직선거법 90조는 선거 180일 전 부터 선거에 영향을 미치는 시설물 설치를 금지하고 있는데 저는 몰랐어요. 한번은 경고에 그치지만 다음부턴 벌금을 물겠죠. 선거가 정치인들의 잔치로 전락하지 않으려면 후보자의 정책과 사상에 대한 응원과 비판이 자유로워야 하는데 선거 180일전부터 이를 막아두는 거죠. 민주당은 박근혜 정권 시절 이전부터 이런 악법들을 바꾸겠다고 했는데 거대 의석을 가졌으면서도 안 하고 있죠.”
민주당은 재보궐 선거 공천을 위해 당헌을 손바닥 뒤집듯 개정했다. 민주당은 ‘당원의 의지’에 따른 결정이라고 했지만 26.35%의 당원만이 당헌 개정을 위한 찬반 투표에 참여했다. 자정 능력이 사라진 여당에서는 2차 가해 역시 계속 벌어진다. 서울시장 예비후보 우상호 의원은 설 연휴 하루 전 SNS에서 ‘박원순이 우상호고, 우상호가 박원순이라는 마음가짐’으로 서울시정을 돌보겠다며 박원순 전 시장 유가족을 격려했다. 박원순 사건 피해자는 “공무원이 대리처방을 받도록 하고, 시장의 속옷을 정리하게 하고, 시장 가족들이 먹을 명절 음식을 사는 일들도 정책으로 계승할 것인가”라고 반발하는 입장문을 내기도 했다.
▲ 신지예 대표는 지난 5일 서울시청 앞에서 6명의 서울부시장 후보들과 함께 서울시장 보궐선거 출마선언식에 나섰다. |
서울시장 성폭력 사건 대응에 적극적으로 결합하고 있는 신 대표는 연정의 일환으로 여러 분야의 부시장들과 함께 출마를 앞두고 있다. 이 팀의 이름은 ‘팀서울’이다. 2016년 20대 총선부터 세 번의 선거를 치러낸 신 대표에겐 네 번째 선거다. ‘2021 미투선거 시국회의’에서 각 분야의 고민을 모았고, 부시장을 강화해 협력 정치를 해보자는 이야기가 모였다. 부시장 의제와 후보는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중학생 때부터 사회운동에 뛰어든 신 대표는 여러 풍파에도 오늘보다 내일이 더 빛나는 정치를 꿈꾼다.
“아무도 여성을 대변하지 않고, 성폭력 사건을 해결할 의지가 없어서 팀서울을 꾸리게 됐습니다. 시민이 유권자이자 정치인으로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을 열어내고 싶어요. 정치는 시민들로부터 만들어질 때 가장 가치 있고 큰 힘을 가진다고 생각합니다.
민주화 세대의 정치는 이제 유효기간을 다했어요. 그들이 잘못 번역된 철학서들을 읽어가며 나라를 다시 세우자고 한 게 20대 때예요. 그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대통령 직선제라는 시대적 과업을 이뤘고, 지금은 권력을 잡고 좌지우지하면서 가부장 정치를 하고 있잖아요. 다음 정권은 페미니스트들이 잡아야죠. 지금 페미니스트들이 다들 지치고 힘들어서 숨어있는데요. 남극의 펭귄들이 혹한의 추위를 이겨내는 방법은 거대한 무리를 지어 뭉쳐있는 거예요. 워낙 각자도생의 시대라 살아남기가 쉽지 않아요. 외로우면 괴롭잖아요. 느슨한 연대라 할지라도
모여 앉을 수 있는 연대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이곳에서 우린 끊임없이 말하고 논의하면서 여성주의 정치를 만들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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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미터 2월 3주 주간통계표] 리얼미터, 전국 만 18세 이상 남녀 3,010명 조사, 2021년 2월 22일. 표본오차 ±1.8%P(95% 신뢰수준), 2021년 2월 22일에 확인함. [리얼미터 2월 3주 주간통계표] 리얼미터, 전국 만 18세 이상 남녀 2,512명 조사, 2020년 2월 24일. 표본오차 ±2.0%P(95% 신뢰수준), 2021년 2월 22일에 확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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