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남 창원시 마산자유무역지구에서 퇴근선전전을 하고 있는 한국산연 해고노동자들 [출처: 연정] |
300일 넘게 빈 공장을 지키는 노동자들
“마산수출자유지역 뒷문, 작업이 끝나고 쏟아져 나오는 인파는 무려 한 시간이 지나도록 이어져 나간다. 넓은 아스팔트를 메운 젊은이들의 무거운 발걸음 소리는 지는 해와 함께 땅속으로 스민다. 해고의 위협에서 오는 불안, 관리층과 외국인의 인격적 무시, 힘겨운 노동에 대한 박한 보수, 판에 박은 듯한 단조로운 작업 등 수많은 문제점들을 안고 이들은 내일 또 다시 이 문을 들어서게 될 것이다.” (「마산수출자유지역의 실태」, 이창복, 『창작과 비평』 1974년 겨울호)
47년이 지난 2021년 5월 14일 저녁 무렵, 경남 창원시 양덕동 마산자유무역지구(구 ‘마산수출자유지역’) 3공구. 공단은 적막하다. 작은 2차선 도로를 사이에 두고 연식이 느껴지는 단층 건물과 최신 아파트형 공장이 있다. 간혹 음식점이나 의료시설도 보인다.
마산자유무역지구(구 ‘마산수출자유지역’, 이하 ‘수출지역’)는 ‘수출자유지역설치법’(1970년)에 따라 외국인의 투자 유치로 수출을 진흥하고 고용을 증대한다는 목적으로 1973년에 완공된 한국 첫 번째 자유무역지구다. 28만평의 부지에 총 3개 공구로 만들어진 수출지역에는 최대 3만6천 명(1987년)의 노동자가 근무하기도 했다. 수출지역 입주 기업들은 소득세·법인세·제산세·취득세 등 조세 면제·감면, 저렴한 임대료(대지 평당 월 60원, 표준공장 평당 월 580원), 수출입 영업세와 관세·물품세 전액면제 등의 혜택을 받아왔다. 이들은 전자·전기·기계금속·화공·공예·섬유 등 노동집약적인 공장에 한국의 20대 여성노동자들을 저임금(일본의 경우, 자국의 6분의 1 수준)으로 고용하여 막대한 이윤을 남겼다. 또한, 외국인 투자기업 노동조합 결성과 노동쟁의를 규제하는 국내 법조항을 이용해서 노동자들의 요구를 억압하고, 자본 철수와 해고를 무기로 노동 강도를 강화했다. 일본에서 ‘한국은 기업 활동의 낙원’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1987년 위의 노조 결성 제한법이 폐지되면서 수출지역에 민주노조가 만들어지고 노동자들의 투쟁이 활성화되자 외국 자본의 철수가 본격화된다. 1990년대 이후 수출지역 내 노동자 수는 매년 감소하여 지금은 87년도의 5분의 1밖에(2019년 5400명) 되지 않는다. 외국 기업들은 온갖 혜택 다 받고 빠르면 3~4개월에서 1년 안에 투자한 자본금을 모두 회수하고(이창복, 위의 글 참조), 그 뒤로도 20~30년 이상 이윤을 챙겨 떠났다. 한국수미다전기와 한국TC전자, 한국웨스트전기, 한국산본 등의 사업장이 그 사례다.
공단 그 길 끝에 한국산연이 있다. 붉은 장미가 피어있는 담벼락, 나무와 꽃이 심어져 있는 마당을 상상했지만 그런 곳은 없었다. 덩그마니 놓여있는 3층짜리 시멘트 건물 한 채가 47년 된 일본 산켄전기의 한국공장 한국산연이다. 오직 효율성과 비용 절감만을 고려해 만들어진 건물이다. 한국산연은 1973년 수출지역에 일본 산켄전기가 100% 출자해 설립한 회사로, 전원장치와 트랜스·CCFL(냉음극 형광램프)·LED 등의 전기전자 부품을 생산해왔다. 한국산연도 다른 입주기업과 마찬가지로 모든 혜택을 다 받았다.
당 회사는(한국산연) 2021년 01월 20일자로 폐업이 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잠겨 있는 건물 입구 유리문에는 공들여 쓴 것 같지 않은 폐업 공고문과 폐업 사실증명서가 붙어 있다. 해질녘 바닷바람에 나부끼는 소원지에 둘러싸인 빈 공장이 을씨년스럽다. 그 빈 공장 앞 천막 농성장에 306일 째 사람이 살고 있다.
천막 농성장에 들어가자 사람의 온기가 느껴진다. 가지런하게 정리된 생수와 커피, 프라이팬, 냄비, 즉석조리 식품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부산영사관과 LG전자 창원1공장 등 하루 투쟁 일정을 마치고 돌아온 노동자들이 천막 안에서 쉬거나 밖에서 담소를 나눈다. 짧게는 10년 길게는 32년 동안 한국산연에서 일해 온 노동자들이다. 이들은 지난 1월 20일 모기업인 일본 산켄전기의 일방적인 폐업(법인해산)으로 해고되어 일본 산켄전기의 위장폐업 철회·한국산연 공장 정상화·해고자 복직을 요구하며 투쟁하고 있다.
청산자금 100억 원으로 공장 재가동 요구했지만
오후 5시, 노동자들이 현수막을 챙겨 4차선 도로를 건너 마산항 제3부두 정문 앞으로 간다. 퇴근선전전을 하기 위해서다. 회사 앞에는 오가는 사람이 없어 왔지만, 이곳 역시 가끔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과 차량 외에 인적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 경남 창원시 마산자유무역지구 한국산연 공장 [출처: 연정] |
작년 7월 9일, 퇴근선전전을 하던 노동자들은 일본 산켄전기 홈페이지를 통해 이사회에서 한국산연 해산을 결정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폐업을 막기 위해 공장 앞에 천막을 치고 경남도청과 창원시청 · 부산영사관 · 청와대 · 국회 · 산켄전기 서울영업소 등에서 투쟁을 했다. 하지만, 산켄전기는 폐업을 강행하고 16명의 생산직 노동자가 해고된다. 회사는 십여 년 간 지속된 누적손실로 더 이상 정상적 경영이 불가능하다며, 연간 50억 적자를 본다고 주장했다. 한국산연의 인력과 생산규모를 감안할 때 가능하지 않은 액수였다.
“적자 근거를 요구하니 손익계산서하고 대차대조표 3년 치만 주는 거예요. 적자 원인을 알기 위해서는 세부적인 내용이 필요한데, 그건 안주고 자기네들한테 유리한 자료만 준 거죠. 그동안 새로운 제품 생산이 필요하다고 계속 얘기했는데 회사는 전혀 듣지를 않았거든요.” (오해진 한국산연지회 지회장)
7월 9일 이후 진행된 노사 교섭에서 회사는 위로금을 받고 나가라는 요구만 계속 했다. 산켄전기가 청산자금으로 책정한 금액은 10억 엔(약 100억 원)으로, 노동자들에 대한 위로금 통상임금 60개월 치가 포함된 금액이다. 노동조합은 차라리 그 돈으로 새로운 아이템을 개발하고 설비를 보충해서 공장을 재가동하라고 요구했으나 회사는 고용에 대한 그 어떤 대안도 제시하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남은 민주노조 한국산연지회
“저 처음 들어왔을 때만 해도 사람이 많았어요. 출퇴근 시간에는 저 정문하고 후문에 밀물 썰물처럼 몰려갔다 몰려오고 그랬어요, 신호등 있는 데도 사람들이 빽빽하게 서 있고. 그때는 걸어서 출퇴근 하는 사람이 많았거든요. 근데 어느 순간 사람들이 나가고 자동차를 많이 타고 다니게 되니까. 봄에는 여기 벚꽃이 많이 피어요. 점심 먹고 동료들하고 후문까지 걸어 갔다 오고 그랬어요.”
▲ 경남 창원시 마산자유무역지구 한국산연 공장 앞 천막농성장 [출처: 연정] |
1994년 한국산연에 입사하여 27년 근무하다 해고된 이정희 씨가 이야기한다. 수출지역 노동자 수가 1만5천 명 이상 되고, 한국산연에 20대 여성노동자 100명이 근무하던 때였다. 그때 정희 씨는 전원공급장치 에스엠피에스 생산 업무를 했다. 2천 년대 초반 CCFL(LCD 디스플레이 백라이트 광원) 생산 공정이 도입돼 남성노동자가 대거 입사하면서 많을 때는 500~600명이 4조 3교대 근무를 할 때도 있었다. 쉬는 시간과 점심시간이면 회사 매점이 북적거렸다.
“또래가 많아서 재밌었어요. 누가 제사 지내고 음식 싸오면 쉬는 시간에 모여서 먹고, 점심시간에 현장에서 재기차기도 하고. 밥 먹고 나면 노동조합 사무실 소파에 앉아서 수다 떨고 그랬어요. 노동조합 간담회를 할 때도 있고, 많이 피곤하면 잠깐 잠을 자기도 하고. 정말 청춘을 다 바친 공장인데. 한편으로는 섭섭하고 한편으로는 마음 짠해요. 저한테는 한국산연이 그런 존재죠. 어차피 다른 데 가서 일을 해야 되는 거면 산연에서 일 하고 싶어서 투쟁을 선택했어요. 산연에는 노동조합도 있으니까. 저번보단 힘들 거 같긴 한데, 끝까지 투쟁하려고요.” (이정희)
이정희 씨의 한국산연 역사 큰 한 축에는 노동조합이 있다. 정희 씨가 입사하던 때는 잔업을 의무적으로 해야 하고, 지각이나 조퇴도 있을 수 없었다. 노동조합(한국노총 소속)에 건의를 했지만, 반영되지 않았다. 노동조합 사무실에 조합원들이 마음 편히 드나들 수도 없었다. 1995년 한국산연에 민주노조가 만들어지고, 상급단체를 한국노총에서 민주노총으로 변경했다. 이제 명희 씨는 더 이상 강제 잔업을 하지 않았다. 노동조합의 승인 없는 잔업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한국산연 노동자들은 1997년 인도네시아로 이전하려는 회사에 맞서 300일 넘게 투쟁해서 승리한다. 단협에 정리해고 시 반드시 노동조합과 합의해야 함은 물론 2년 간 고용 유지 의무를 명시하고, 여성노동자가 결혼이나 임신과 상관없이 정년까지 근무할 수 있는 일터를 만들었다. 또, 산전·산후 휴가를 만들고, 임신을 한 노동자의 야간노동 금지, 수유 중인 노동자들을 위한 별도 라인 신설과 수유시간 보장 등 지금으로서도 상상하기 힘든 노동조건들을 쟁취해냈다. 한국산연지회는 수출지역에서 가장 마지막까지 남은 민주노조다.
“옛날에 제가 지회 사무장 할 때인데요. 점심시간에 누나들 스물 댓 명이 앉아서 이야기하는데, 정말 시끄럽거든요. 저는 항상 밥을 먹고 밖에 나갑니다. 그 기억이 굉장히 오래 남아 있습니다. 그때가 그리워요.” (양성모)
양성모 씨는 2003년 CCFL 생산을 막 시작할 때, 기계를 관리하고 보수하는 오퍼레이터로 입사했다. 신입 남성노동자들이 ‘누나들 앞에서 감히 말도 못하던’ 때였다. 민주노조를 만들고 큰 승리를 경험한 여성노동자들은 두려운 게 없었다. 양성모 씨는 일본 산켄전기가 LED의 등장으로 사양산업이 될 CCFL 사업을 확대하면서 대규모 적자를 보게 됐다고 했다. 회사는 전성기 때 이윤은 다 챙겨가고 사업이 부진하자 모든 책임을 노동자들에게 전가했다.
화해 권고에 대한 산켄전기의 대답
지난 47년 동안 산켄전기는 한국산연에서 7번 희망퇴직 공고를 하고, 세 차례 생산 사업부 철수를 시도했다. 산켄전기는 지난 2016년에도 경영악화를 이유로 생산 부문을 폐지하고 생산직 노동자 69명을 해고했다. 그리고 지방·중앙노동위원회의 부당해고 판정과 1년간의 일본 원정투쟁 끝에 희망퇴직자를 제외한 16명이 복직을 한다. 회사는 복직을 시키면서 노동조합과 공장의 정상화를 위한 제반조치를 하겠다는 합의를 했지만, 그동안 단 1%도 기계 생산설비에 투자하지 않았다. 일본 산켄전기는 의도적으로 ‘돈이 안 되는’ 사업을 한국 공장에 배치해 적자를 만들었다. 그리고 코로나19로 노동자들의 일본 원정투쟁이 어렵게 되자 갑자기 계획에 없던 한국산연 폐업을 결정했다. 일본 산켄전기가 정말 깨끗하게 한국 땅을 떠났다면 노동자들은 다른 선택을 했을까?
▲ 퇴근선전전을 하기 위해 길을 건너는 한국산연 노동자들 [출처: 연정] |
산켄전기는 서울 마곡동 서울영업소를 계속 유지하고, 같은 건물에 LG와 산켄전기의 합작회사(지분 산켄전기 51%, LG 49%) 어드밴스 파워디바이스 테크놀로지를 만들어 연구개발을 하고 있다. 2018년에 산켄전기는 사모펀드(IBKS세미콘PEF)를 통해 구본준 씨(LG그룹 부회장의 아들)가 소유하고 있던 천안 (주)EK(구 ‘지홍’)를 160억 원에 인수하여 한국에서 생산을 계속 하고 있다. 노동자들은 EK에서 출하되는 상품 박스에서 ‘산켄엘렉트릭코리아’ 상호를 발견했다. 위장폐업이 의심되는 정황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최근에 한국산연 건물이 시가의 절반 정도인 9억에 매각이 됐다. 인수자는 구씨 성을 가진 사람과 관련이 있는 31세의 제조업자라고 하는데, 9억 중에 7억을 대출 받았다고 한다.
이러한 위장폐업 정황에도 5월 13일 경남지방노동위원회는 한국산연 노동자들이 낸 부당해고구제신청을 기각했다. 판정에 앞서 경남지노위는 판정을 유보하고 1주일 간 화해 권고 기간을 주었지만, 산켄전기는 그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았다. 노동자들은 산켄전기 서울영업소에 교섭 요청 공문을 들고 찾아갔다가 문전박대 당한다.
“화해 권고 기간에 일본 산켄전기 본사 앞에서 우리 투쟁에 연대하는 일본 시민이 연행이 됐어요. 화해권고에 대한 산켄전기의 대답 아니겠어요? 우리를 포기하게 하려고 그런 액션을 취했겠죠. 지노위 결과는 예상했어요. 한 번에 판결내리기 민망하고 욕 듣기도 싫으니까 책임 회피한 거 같아요. 돈 받고 정리할 기회를 주겠다는 거겠죠. 폐업한 건 보통 답이 없다고 하잖아요. 위장폐업에 대한 정확한 증거 잡기가 어렵기 때문에 천안 EK 같은 경우도 상관없는 회사다 얘기하면 끝나는 거니까.” (백은주)
스무 살에 한국산연에 입사해 20년 동안 근무해온 백은주 씨는 일본에서 그렇게 연대해주는 분들이 있기 때문에 반드시 이길 싸움이라며, 끝까지 싸워 다시 공장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다.
그네들한테 우리를 보여주고 싶어요
은주 씨는 아침저녁 매일 두 시간 씩 바닷바람을 맞으며 현수막을 들고 있다 보니 팔이 많이 아프다고 했다. 바람을 피하기 위해 뒤로 돌아 서있기도 한다. 허리 디스크로 고생하는 노동자도 있고, 암 치료를 받으며 투쟁하고 있는 노동자도 있다.
사람들은 말한다. 회사가 없어지는 건데, 이제 그만 살 길을 찾아야 하지 않겠냐고. 민주노총도 금속노조도 답이 없는 투쟁이라고 한다. 하지만, 16명의 노동자는 오늘도 내일도 바닷바람을 맞으며 현수막을 들 것이다.
▲ 한국산연 공장 앞에서 한국산연 노동자들 [출처: 연정] |
“20대에 들어와서 진짜 몸 바쳐서 일했고 가족들하고 지낸 시간보다 공장에서 보낸 시간이 더 많아요. 그렇게 공장을 키워놨더니 이윤은 자기들이 다 가져가고 자기들이 잘못해서 적자가 난 책임을 노동자들에게 지게해서 5백 명 넘는 인원이 전부 다 쫓겨났어요. 회사는 희망퇴직으로 나갔다고 하지만, 노동자들이 선택한 게 아니잖아요. 사과 한마디 들은 게 없어요. 저희 남아있는 16명이 전부다 지금 상황이 굉장히 안 좋아요. 생계 문제랑 나이도 있고 과거에 싸워온 시간들 때문에 몸이 제대로 작동하는 사람이 별로 없어요. 그래도 투쟁의 끈을 놓기는 싫어요. 그네들한테 우리를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공장에서 30년 일한 노동자들을 하루아침에 길거리로 쫓아내면서 그걸 받아들이라는 건데, 투쟁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거잖아요. 저는 지지 않는 싸움을 하고 있다고 봅니다.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투쟁을 할 테니 그네들이 선택하라는 거죠. 그때까지 우리는 싸움을 계속 할 겁니다.” (양성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