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태움’하는 자본주의, ‘돌봄 혁명’으로 바꿉니다

[지금, 여성 사회주의자] 독일 맑스주의자 가브리엘레 빈커

“박수로는 집세를 낼 수 없다”

  샤리테와 비반테스 병원 노동자들이 14일 시위를 하고 있다. [출처: 융에벨트]

독일 베를린에서 가장 큰 샤리테(Charité) 병원과 비반테스(Vivantes) 병원 보건의료 노동자 2500여 명이 19일째(9월 27일 기준) 파업을 진행하고 있다.

코로나19 대유행으로 세계 보건의료 노동자들은 ‘영웅’으로 박수받았지만, 노동조건은 뒷걸음질 쳤다. 그 때문에 코로나19 대유행 이후 전 세계 보건의료 노동자들은 파업과 시위를 일으켜 노동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싸웠다. 미국 비영리 연구기관 책임연구센터(ARC)가 코로나 이후 84개국에서 600회 이상의 파업 행동에 관한 보고를 접수했다고 밝힐 만큼 이들의 행동은 대대적이었다.

베를린 보건의료 노동자들이 파업에 나선 것도 극심한 노동 강도 때문이다. 앞서 샤리떼 병원에서는 2015년 일자리 증대와 노동 안전 보장을 위한 파업 투쟁이 일어나 독일 최초로 간호사당 환자 수 기준을 단체협약으로 명시했다. 하지만 현재도 베를린 간호사들은 야간 업무 시 1인당 환자 30여 명을 책임져야 할 만큼 노동 강도가 셌다. 이 같은 조건에서 파업에 나선 노동자들의 첫 번째 요구사항은 간호사당 환자 수를 20명으로 조정하라는 것이었다.

베를린 보건의료 노동자들의 또 다른 요구 사항은 ‘동일 노동, 동일 임금(TVöD für alle)’이다. 파업에는 2개 병원이 직고용한 노동자와 자회사 노동자가 함께 참여하고 있는데, 직고용 노동자는 공공부문 단체협약에 따라 임금을 받는다. 그러나 이 협약은 청소, 주방, 유지보수, 세탁 등을 책임지는 자회사 노동자에게는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이들 업무가 15년 전 신자유주의적 개혁의 일환으로 설립된 자회사에 외주화돼 같은 보호를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일한 업무를 수행하더라도 직고용 노동자와 간접고용 노동자의 임금 차이는 약 800유로에 달한다.

이러한 베를린 보건의료 노동자들의 파업은 여러 면에서 역사적이다. 2011년 이후 보건 분야의 모기업과 자회사 노동자가 함께 파업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특히 무기한 파업은 근래 역사상 처음이다. 그것도 파업일 수를 19일까지 기록할 만큼 현장의 파업 의지가 강하다. 이번 파업은 전투적인 여성 운동으로도 주목을 받고 있다. 보건의료 분야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다수는 여성이며,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의 일자리는 항상 저임금이라는 점에서 여성의 사회경제적 권리 보장을 위한 투쟁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파업 시위 현장에선 “병원에서 자본주의는 나가라”라는 구호가 나올 만큼 근본적이기도 하다.

돌봄 혁명 네트워크

비단 이번 파업뿐 아니라 독일에선 최근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운동이 힘을 얻고 있다. 대표적으로 9월 26일 부동산 대기업 사회화를 목표로 ‘도이체 보넨 엔트아이그넨(Deutsche Wohnen & Co. enteignen)’ 운동이 발의한 주민투표가 찬성으로 가결됐다. 함부르크와 베를린에서는 에너지 재공영화 정책을 도입했으며 보육·학교·의료·간병 등 사회 재생산 시설의 사회화를 주요 의제로 제안하는 돌봄 혁명 네트워크(Care Revolution Netwerk)도 주목을 받고 있다. 돌봄 혁명 운동은 ‘미래를 위한 금요일(Fridays for Future)’ 등의 사회운동과 함께 이번 베를린 보건의료 노동자 파업 투쟁을 가장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집단 중 하나이기도 하다.

돌봄 혁명 네트워크는 우리에겐 생소하지만, 이미 8년이나 된 굵직한 조직이다. 간단히 소개하면 유·무급 돌봄 노동자와 돌봄이 필요한 이들의 사회적 권리를 증진하기 위한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궁극적으로는 페미니즘 이론과 정치를 계승하며, 무급 가사 및 유급 돌봄 분야의 중요성을 사회적 투쟁의 중심에 두고, 이윤이 아닌 인간의 필요에 따른 연대 사회로의 이행을 목표로 하는 조직이다. 2014년 3월 가사, 건강, 요양, 교육, 주거, 성노동 등 80여 개 단체와 개인들이 나서 “좋은 삶과 더불어! 전 세계의 모두를 위해!”라는 모토로 돌봄 혁명 네트워크를 결성했다. 여기에는 독일을 비롯해 오스트리아와 스위스에서도 참여하고 있다.

그동안 돌봄 혁명 네트워크는 10여 개 지역에 네트워크 지부를 꾸려왔다. 매년 정기 포럼을 개최해 각 지역 의제를 공유하고 여러 지역에서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다. 특히 지난해부터는 ‘돌봄을 위한 광장(Platz für Sorge)’이라는 이름의 운동을 발의하고 코로나19 이후 더욱 중요해진 돌봄 노동의 경험을 공유하며 사회적으로 개진해왔다. 대표적으로 독일 프라이부르크에선 좌파와 페미니스트 그룹, 기후와 이주 및 보건단체 등으로 구성된 45개 단체가 ‘돌봄을 위한 광장’ 연합을 만들었고, 집회에는 매회 150~200명이 참가하고 있다. 이러한 돌봄 혁명 네트워크는 2008년 금융위기와 긴축 이후 진행된 독일 돌봄 운동 중 가장 큰 주목을 끌었다는 평을 받는다.

  가브리엘레 빈커 [출처: https://www.gabriele-winker.de/]

그리고 이 돌봄 혁명 네트워크의 논지를 대표하고 있는 이가 페미니스트이자 마르크스주의자인 가브리엘레 빈커(Gabriele Winker)다.

빈커는 돌봄 혁명 운동의 발의자로 함부르크 공대 노동-젠더-기술학과 교수로 일하며 이론적 분석과 학문적 발견을 정치 행동으로 연결시키고자 시도해온 지식인이다. 그는 돌봄 혁명을 제안하기 전부터 주로 신자유주의 시대 여성노동계급에 기술이 미치는 영향과 그 가능성, 그리고 마르크스주의와 페미니스트-퀴어 이론에 입각해 이들을 정치화하는 주제를 다뤄 왔다. 또 함부르크 페미니스트 집단에서 활동하며 정부 정책이나 사회 이슈에도 목소리를 내왔다. 돌봄 혁명 개념을 처음 제안한 것은 2009년이었으며, 이때부터 관련 담론을 이끌고 있다. 빈커는 정부의 긴축 정치와 사회 재생산 위기 속에서 ‘대항세력’으로서의 사회 운동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으로 동료 활동가들을 찾기 시작했다고 밝힌다.

사회 재생산 위기와 기후 위기

독일 사회에서 돌봄 노동의 비중은 막대하다. 그러나 유급노동의 경우 대부분 저임금 일자리이며 가정 내에서의 노동도 보상받지 못한다. 독일에서 역시 이 노동의 대부분을 여성이 떠맡고 있다. 단적으로 빈커가 지적했듯, 2012/2013년 독일 ‘시간 사용 연구’에 따르면, 전체 노동시간의 약 3분의 2가 유급 또는 무급 돌봄 노동으로 이뤄졌다. 여성은 가정과 자원활동으로 무급 돌봄 노동의 60% 이상을 제공한다. 동시에 직업 분야에서는 보건 및 건강관리, 교육과 양육, 가사 등 업종 노동자의 80%가 여성이다.

이 같은 독일 돌봄 노동의 현실은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이 경제와 복지, 가정 정책 모두에 관철된 결과다. 주지하듯, 서독은 전후 동독과 분리된 뒤 서구 복지국가의 경로를 밟아왔다. 그러나 1970년대 자본주의 위기가 심화하며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이 도입되고 특히 2000년대 하르츠 개혁에 따라 불안정 노동이 확대하고 사회안전망이 후퇴하며 사회 양극화가 심화해왔다.

여성들은 복지국가 시절 가족 임금제 아래 가정에서 무급 돌봄 노동에 종사하다 일-가정 양립 정책에 따라 사회에 진출하지만 동시에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속에서 비정규직 일자리로 편입됐다. 그러나 가정 내 무급 돌봄 노동에 대한 지원은 제한돼 여성들은 그 부담을 계속 떠맡아야 했다. 단적으로 빈커가 독일 사회학자 디트마르 호블러(Dietmar Hobler) 연구를 토대로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수십 년간 진행된 노동유연화에 따라 2019년 여성의 주당 평균 노동시간은 30.5시간으로 1991년에 비해 3.9시간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노동시간의 하락은 불안정한 고용계약과 소득의 감소로 이어지는 노동권의 후퇴를 의미한다. 실제로 1991년에 여성 비정규직 비율은 30.2%이었으나 2019년 46.1%로 증가했다. 또한 2015년 4분의 3 이상의 어머니(77.9%)가 비정규 노동을 하며 가사노동을 병행했다.

  가브리엘레 빈커가 2015년 3월 로자룩셈부르크재단 포럼에서 발표하고 있다. [출처: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Ann_Ferguson,_Sabine_Plonz,_Gabriele_Winker,_Sharzad_Mojab.jpg]

빈커는 1970년대 여성운동이 남성의 경제력에 여성을 종속시키는 부양모델(Ernährermodell)에 강력하게 반대했으나 결국 자본의 입맛대로 관철됐다는 점을 강조한다. 자본으로서는 복지국가 시절 가족 임금제와 사회보장 혜택을 수반하는 포디즘 체제보다 세계적으로 자유화된 시장에서 모든 노동자가 각각 자신의 수입을 책임지게 해 남성과 함께 여성노동자로부터 더 많은 잉여가치를 착취하는 게 더 이득이 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재생산 비용을 최소화하면서도 적절한 노동력 공급을 원하는 신자유주의의 이 같은 모델은 자기모순에 빠질 수밖에 없다고 빈커는 지적한다.

아울러 빈커는 이러한 신자유주의 시대 가족정책은 돌봄 부담을 가진 사람들의 노동시간과 출산율 증대를 목표로 하는 경제 성장을 위한 정책이었으며, 그 혜택은 고소득 전문직 여성계층에 집중됐다고 말한다. 단적으로 빈커가 제시했듯, 2012/2013년 독일 ‘시간 사용 연구’에 따르면 2012년 독일의 상위 10%가 정부 가족정책에 따른 급여의 13%를 받은 반면, 하위 10%는 7%만을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빈커는 이러한 사회 재생산 위기 속에서 전문 인력 부족과 살인적인 노동 강도, 제3 세계로의 위기 전가 등의 문제가 야기됐다고 본다. 그러나 자본은 오히려 노동조건을 악화하고 이성애와 인종, 성과주의에 기초하여 임금 수준을 차별화해 경쟁을 심화하는 방법으로 체제를 유지하고자 했다. 결국 기득권층은 이러한 경제체제를 위해 민주주의를 후퇴시킬 수밖에 없고, 그 때문에 사회 재생산 위기 속에서 권위주의 정부들이 등장하고 있다는 게 빈커의 분석이다.

한편, 빈커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후위기 또한 사회 재생산 위기와 동일한 원인을 가진다고 강조한다. 지속적인 경제 성장이 필요한 자본은 사회적, 환경적 자원을 무한히 착취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연대 사회

그러나 돌봄 혁명 네트워크는 돌봄이 인간 현존의 조건이자 민주적 사회 발전을 위한 전제 조건이라고 본다. 그래서 돌봄은 기본권이며 여성이 떠안아야 할 문제가 아니라 사회가 책임져야 할 몫이라고 강조한다. 돌봄이 제3세계의 희생으로 해결돼서도 안 된다고 본다.

결과적으로 돌봄 혁명 네트워크는 돌봄의 가치가 보장되기 위해선 자본주의 체제의 변혁이 수반돼야 하며 대안 체제에서도 돌봄이 중요한 요소로 작동해야 하는 즉, 돌봄 혁명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자본의 이윤이 중심이 된 화폐화 된 평가가 아니라 인간적 필요를 경제의 중심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빈커는 돌봄 혁명을 위한 4대 변혁 정책으로 ‘대폭적인 노동시간 단축’과 ‘조건 없는 기본소득’, ‘기업과 기관의 사회화와 민주적 구성’, 그리고 ‘다양한 생활 방식을 지원할 수 있는 연대적인 조직 형식으로서 커먼스(Commons)를 건설’하자고 제안한다. 그리고 이 운동을 이끌어가기 위한 첫 단계로 지역마다 돌봄위원회를 만들어 공적인 사회 인프라의 민주화를 추동해나가야 한다고 제시한다. 여기서 빈커는 돌봄 기업과 기관의 소유권을 일반 대중에게 이전(사회화)해 사람들이 어떤 보살핌을 받고, 치유되고, 교육을 받고 싶은지 스스로 결정할 수 있게 하는 것이 필수 조건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돌봄 혁명은 주로 여성인 돌봄 주체들에 대한 사회적 차별과 배제를 주목하고 이들의 목소리에 힘을 실어 이윤이 아닌 ‘좋은 삶’을 위한 운동을 조직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하지만 아직 거대 담론 중심이고 또 체제 문제를 우회해 실현 경로가 불투명한 구석도 있다. 무조건적인 기본소득의 경우에는 좌파 내에서도 20년 가까이 논란이 돼 왔지만 이를 불식시킬 만한 설득력 있는 새로운 대안이 없는 게 아쉬운 대목이기도 하다.

다만, 빈커가 자본주의의 대안으로 제안하는 연대 사회의 모습은 사실 사회주의, 나아가 공산주의 사회 모델과 유사하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빈커 역시 “인간의 이익은 이윤 지향적인 자본 축적을 통해서는 실현될 수 없고, 오직 집단적 행동과 결속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는 근본적인 인식이 (돌봄 혁명의) 공통된 연결점”이라며 “이런 점에서 돌봄 혁명을 지향하는 정치활동은 반자본주의적 정책을 강화하고 사회주의적 비전에 대해 새롭게 돌아보는 토론을 불러일으킨다”라고 밝힌다.

파업 3주 차에 접어들고 있는 베를린 보건의료 노동자 수천 명 또한 더 이상 자본주의적 삶이 아닌 돌봄 혁명을 통해 모두의 좋은 삶이 사회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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