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13일, 한국 트랜스젠더 성별 정정 역사에 획기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성전환증 진단을 받고 호르몬 투여, 유방 절제 수술 등을 거쳐 남성으로서 생활해 온, 그러나 외부 성기 성형 수술은 물론 생식능력 제거 수술 또한 하지 않은 트랜스젠더 남성 박 모 씨가 수원가정법원에서 성별 정정 허가 판결을 받아낸 것이다. 최근 외부 성기 성형 수술 없이 성별 정정에 성공한 사례는 없지 않았지만, 생식능력 제거 수술을 하지 않은 경우로는 최초의 사례다.
2002년에 김홍신 의원이, 2006년에 고 노회찬 의원이 법안을 발의했고 2008년에는 국가인권위원장이 제정을 권고했지만, 한국에는 아직 성별 정정을 규정하는 법률이 없다. 성별 정정 허가 여부는 물론 판단 기준 역시, 판사가 대법원 가족관계등록예규 〈성전환자의 성별 정정 허가신청 사건 등 사무처리지침〉을 재량껏 적용해 결정한다. 이 예규는 2006년에 제정된 이래 여러 차례 개정됐지만 꾸준히 “현재 생물학적인 성과 반대되는 성에 관한 신체의 성기와 흡사한 외관”을 갖춰야 하고, 나아가 “현재 생식능력이 없고, 향후에도 생식능력이 발생하거나 회복될 가능성이 없”어야 한다는 조건을 달고 있다. 개개인의 신체에 큰 부담이 될 뿐 아니라 비용 부담이 크고, 정보 접근성이 낮은 외과적 개입을 강요하는 것이다.
다만, 원래는 신청인이 이에 대한 확인 문서를 ‘첨부해야’ 하는 것이 필수 요건이었으나, 2020년에 법원이 제출을 요구할 수 있는 ‘참고서면’으로 변경됐다. 마찬가지로, 원래는 ‘허가 기준’이었고 직전까지는 ‘조사사항’이었던 정체성의 일관된 유지 여부, 혼인 여부나 자녀의 존재 등 역시 ‘참고사항’으로 변경됐다. 위의 판결은 이러한 변화와 트랜스젠더 인권 운동에 힘입어 나왔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미래를 낙관할 충분한 근거가 되지는 못한다. 판사의 재량에 달린 문제라는 사실은 여전하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실제로 박 씨 역시 1심에서는 기각 결정을 받아 항고심을 거쳐야 했다. 성기 성형을 하지 않은 트랜스젠더의 성별 정정 사례 역시 개별 법원의 허가 결정에도 일관적으로 적용되는 판례가 되지 못했다. 이에 성소수자차별반대 무지개행동을 비롯한 성소수자 인권단체들은 11월 16일, 국가인권위원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들은 위의 항목들이 참고사항으로 개정됐음에도 여전히 허가 요건으로 작용하며 인간의 존엄성, 자기 결정권, 신체를 훼손당하지 않을 권리 등을 침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기자회견 후에는 트랜스젠더 당사자가 대법원장을 상대로 진정서를 제출했다. 해당 기준을 폐지하는 한편 당사자 심문 시 인권 침해적 질문을 막을 조치 등 처리 절차 개선안 또한 마련하라는 요구였다.
현행 방식은 경제적, 신체적으로 부담이 큰 수술을 본인 의사와 상관없이 강요하면서도 각 법원의 판단이 일관되지 않아 개개인이 모험 혹은 도박을 하게 만든다. 여러 법원의 판단을 받아보기 위해 주민등록지를 옮겨 가며 각지의 법원을 찾는 경우도 있다. 호르몬 치료나 일부 수술, 여타 젠더 표현 등을 통해 주민등록 상과 다른 성별로 인지되는 트랜스젠더의 경우 취업을 비롯한 여러 사회활동에 어려움을 겪는다는 점에서, 이는 생식 기관 수술을 희망하는 사람조차 빠져나오기 힘든 악순환의 구조다.
성별 정정을 하려면 수술을 받아야 하는데 의료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대규모 수술비용을 마련하자니 성별 정정이 되지 않아 취업이 어려운 식이다. 성별 정정을 마치고 원하는 성별로 원하는 삶을 꾸릴 기회가 총체적 난국에 빠진다. 짐작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결과가 나오고서도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신청이 기각돼도 당사자에게 구체적인 기각 이유를 알려주지 않는 경우가 많다― 법원의 성별 정정 판단 절차로 미래의 삶까지 알 수 없는 상태가 되고 마는 것이다. 여러 트랜스젠더들에게 있어 성별 정정은 삶을 완성하는 절차가 아니라 삶을 가능케 하는 기본적인 조건에 가깝다. 대법원 예규의 수술 요건 폐지는 그 삶들이 기댈 최소한의 토대를 마련하는 일이다.
단단하고 밝은 작은 소식들
며칠 후인 11월 20일. 올해도 어김없이 트랜스젠더 추모의 날이 돌아왔다. 이날은 트랜스젠더 가시화 주간의 바로 다음 날이기도 하다. 트랜스젠더 추모의 날을 맞아 트랜스젠더인권단체 조각보는 온라인 전시 ‘기억, 모습, 살아갈 우리 2021’을 개최했다. 트랜스해방전선과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는 “트랜스젠더, 잘 살고 있나요?” 라는 물음과 함께 집회와 행진을 열었다. 잘 살고 있다고 답하기는커녕 한 해의 기억을 곱씹기도 만만치 않은 해다. 트랜스젠더와 그 벗들에게, 올해는 여러 트랜스젠더의 부고를 함께 맞은 해였다. 올해만의 문제는 물론 아니지만.
잘 살고 있다고 답할 수 있도록, 기억을 끌어안고 더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 박 씨가 얻어낸 값진 판결과 이를 모두에게 가능한 일로 만들고자 계속해서 함께 싸우는 이들의 존재, 법원의 강제 전역 취소 판결에 이어 나온 대통령소속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의 고 변희수 하사 사망 사건 직권 조사 개시 결정, 단체협약에서 평등권 보장과 성적 지향, 성별 정체성을 고려한 가족 형태의 인정을 요구하기로 한 금속노조의 모범단협안 개정안. 알 수 없는 삶에 조금 더 단단하고 조금 더 밝은 작은 소식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