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노동환경을 가늠하는 화장실이라는 리트머스

[여성, 노동의 기록]

예전에 봐서 기억도 가물가물한 영화 ‘노스 컨츄리’에서는 광산에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를 쫓아내기 위해 주인공이 용변을 보고 있는 간이화장실을 남성 노동자들이 흔들어 넘어뜨려 오물을 뒤집어쓰게 하는 장면이 있었다. 또 다른 영화 ‘히든 피겨스’에서는 주인공이 일하는 곳에서 800미터가 떨어진 화장실을 뛰어 다녀오는 장면이 나온다. 인종 분리 조치로 인해 주인공은 유색인종 화장실을 이용해야 했는데 화장실에 다녀오려면 왕복 40분이 걸렸다. 그 장면들을 보며 욕지거리를 하며 혀를 찼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런데 그 기억이 무색하게 몇 주 전 화장실에 가기 위해 기관차에서 내려 화장실이 있는 객차를 향해 전력 질주를 하는 철도노동자의 이야기가 기사화됐다. 남성 기관사는 임시방편으로 봉지를 챙기기도 한다지만 여성 기관사들은 꼼짝없이 도착지까지 용변을 참거나 짧은 정차 시간 동안 전력 질주를 해야 한다고 한다.

그보다 앞서 지난 3월 3일 건설노동조합 여성위원회는 건설 현장에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가 화장실이 부족하거나 청결 문제로 인해 화장실 사용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제기했다. 여성 노동자의 화장실 이용 문제는 켜켜이 쌓여온 문제다. 지난해 민주노총 여성위원회가 ‘여성 노동자 일터 내 화장실 이용 실태 및 건강영향 연구’ 보고서를 발행하고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뤘다. 여성 노동자들의 일터 내 화장실 환경과 이용 실태, 건강 문제뿐만 아니라 여성 노동자들이 ‘왜’ 화장실 접근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화장실이 있더라도 ‘왜’ 사용하기 어려운지 등 일터의 화장실을 둘러싼 노동환경과 노동강도, 문화, 인식 등 여러 측면에서 조사를 진행했다.

많은 사람이 여성 노동자가 거의 없는, 일부 낙후된 건설 현장의 이야기로만 알고 있을 화장실 문제는 꽤 오래전부터 광범위한 노동자들에게 심각하게 존재해 온 문제다.


입사 후 기아자동차 한 공장의 생산라인에서 15년 동안 혼자 여성이었다는 한 여성 노동자는 처음 배치되고 한동안 여성 화장실이 없어 멀리 있는 사무실 화장실을 다니느라 눈치를 봐야 했다고 이야기한다. 법원의 불법파견 판결로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정규직으로 채용해야 했던 현대자동차와 기아자동차가 가장 먼저 부딪힌 문제도 여성 화장실이었다. 정규직 라인에 몇 명 없던 여성들이 대거 들어오니 당장 여성 노동자들이 사용할 화장실을 만들어야 했던 것이다.

기아자동차는 여성 화장실과 휴게실이 없다는 이유로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정규직 전환 과정에서 배제하기도 했다. 현대자동차 또한 생산 공장이 넓어 공장 중간에 화장실이 있지만 여전히 남성 화장실만 있는 경우가 있어 여성 노동자들이 화장실 이용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여성 화장실을 설치하기 위해선 노동조합 대의원의 동의를 얻어야 하는 데 남성대의원들이 동의해주지 않는 문제도 있다.

이동 방문노동자들의 화장실 사용은 더욱 어렵다. 지난해 민주노총 여성위원회의 ‘여성 노동자 일터 내 화장실 이용 실태 및 건강영향 연구’에서도 이동 방문노동자의 경우 ‘근무 중 화장실 사용이 대체로 불가능하거나 전혀 가능하지 않다’는 응답은 57.76%로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또한 근무 중 개방형 화장실이나 공중화장실을 사용한 경험이 있다고 답한 86.34%의 응답자 중 62.28%가 개방형 화장실이나 공중화장실에서 안전 문제를 느낀 적 있다고 답했다. 방문한 가정 등에서 화장실을 이용하는 것도 한계가 있다. 그러다 보니 이동 경로에 있으면서 사용이 가능하고 그나마 안전한 화장실의 위치를 확인해두는 것이 일상이라고도 한다.

지난 3월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제기한 건설노조의 경우 현장 여성 조합원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진행했는데 30.6%의 여성 노동자가 화장실이 너무 멀거나 더러워서 이용하지 못한다고 응답했다. 또한 화장실에 손 씻을 세면대가 없거나 휴지가 비치돼 있지 않은 경우도 많았다. 이에 더해 응답자의 65.7%는 화장실 이용이 불편해 물을 마시지 않은 경험이 있었고, 식사를 조절한다는 응답도 31.3%에 달했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최근 국정감사에서 밝힌 자료에 따르면 LH 아파트 건설 현장 176곳 중 11곳은 화장실을 하도급업체 건설노동자들에게 개방하지 않고 있고, 144곳은 공용 양변기를 사용해 남녀노동자가 한 화장실을 사용해야 했다. 그나마 남녀가 구분된 화장실은 대부분 건설 현장 출입문 쪽에 배치돼 여성 노동자들의 접근성이 현저히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몇 년 전 큰 투쟁을 했던 톨게이트 여성 노동자들도 화장실을 갈 수 없어 물을 마시지 않거나 소변을 참아 방광염이나 만성 변비, 질염을 겪는 등 건강상 문제가 있다고 토로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다음 날인 10월 25일, 민주노총 여성위원회는 ‘성평등단협의 고용상 성평등 확대를 위한 정책과 전망’ 국회 토론회를 연다. 민주노총의 성평등단협안에서도 여성 노동자들의 화장실 이용에 대한 요구가 담겨 있다. 화장실 환경 등으로 인해 발병하는 비뇨기과 질환에 대한 건강검진 포함, 여성 화장실 시설 확충 및 개선 등이 그것이다.

여성 노동자인 우리는 왜 가장 기본적인 권리를 위해서도 싸워야 할까. 화장실에 가고 싶을 때 화장지가 있는 깨끗한 화장실에서 편하고 안전하게 용변을 보고 깨끗한 물이 나오는 세면대에서 비누로 손을 씻고 걸어서 다시 일터로 돌아오는 것조차 왜 요구해야 하는 싸움이 돼야 할까.

국립환경연구원에서 밝히는 여성의 화장실 사용 시간은 1회 평균 3분이다. 열차가 쉬는 1분 30초 동안 화장실로 뛰어가 용변을 보고 다시 돌아와야 하는 철도노동자에게 객실차량 1대마다 있는 화장실은 왜 기관차에만 주어지지 않았을까. 수백, 수천의 사람이 일하는 공장에 여성 노동자가 들어올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않아 기본적인 화장실조차 만들지 않는 건 어디서부터 차별이 만들어져 있는 것일까.

화장실에 가기조차 힘들어 물도 못 먹고 식사도 조절해야 하는 여성 노동자.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공중화장실에서 죽임까지 당하는 여성 노동자. 서럽고 치열한 생존을 위한 싸움이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