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식·가상화폐 투자에 따른 수익이 불로소득이라고 규정되는 데 발끈하는 반응을 접하곤 한다. 투자를 하려면 얼마나 많이 공부하고 조사해야 하는지 아냐며, 나름대로 노력하고 애쓰는 일인데 왜 ‘불로(不勞)’냐는 것이다. 요컨대, 시간과 수고가 들며 편하게 얻는 돈은 아니므로 투자 수익을 불로소득이라 하면 억울하다는 소리다. 한자 勞는 ‘애쓰다, 고달프다, 수고하다’라는 의미로, 글자를 풀어 보면 불을 밝히고 밤늦도록 힘을 쓴다는 내용이다. 그 글자만 놓고 보면 투자도 밤늦게까지 열심히만 하면 ‘불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불로소득은 단지 편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번 돈이란 말이 아니다. 알다시피, ‘로’는 노동의 준말이고 불로소득은 노동하지 않고 얻은 이익을 가리킨다. 이때의 노동은 단순히 노력하거나 애쓰는 것과 같지 않고, 그 본질은 사회적인 가치를 생산하는 활동이라는 점이다.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국민의 연간 노동은 그들이 연간 소비하는 생활필수품과 편의품 전부를 공급하는 원천”이라고 했을 때의 노동이 바로 그런 의미다. 치열하게 고민하고 힘쓰는 놀이나 취미 활동이, 열성적인 신자의 종교 활동이 노동이 아닌 이유는 그런 활동이 가치의 생산에 기여하지 않는 까닭이다.
쉽게 바꿔 말하면 노동은 ‘남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다. 사람들은 남들이 필요로 하는 물건을 만들든, 어떤 역할을 해 주든, 즐거운 경험을 안겨 주든, 남에게 도움을 주고 사회 전체를 더 낫게 만들고서 그 대가를 받아 살아간다. 그리고 그것이 일을 해서 돈을 번다는 말의 본래 의미다. 그러므로 노동이란 다른 사람, 사회와 주고받는 상호부조이고 관계라고 해도 좋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쉽게 떠올릴 수 있는 대표 격인 노동 형태는 임금 노동일 것이다. 근로 계약을 맺어 자본가에게 노동력을 제공해 주고 그 대가로 임금을 받는 것이다. 자영업자, 프리랜서들이 하는 일도 많은 경우 사회적 가치를 생산하는 일로, 다른 사람에게 물건이나 서비스를 제공하고 그에 대한 대가를 받는다. 하다못해 물건을 싸게 사서 비싸게 파는 차익을 노리는 상거래 행위도, 물건이 상대적으로 모자란 곳에 더 공급되게 함으로써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물건의 원활한 유통에 기여하므로 경우에 따라선 노동일 수 있다.
이런 잣대를 대 보면 주식·가상화폐 등의 투자를 위해 공부하고 시간과 수고를 들이는 것은 노동이 아니다. 관련 정보를 수집하고 시세 차트를 보며 소유권 증명서를 사고파는 일은 딱히 남에게 도움이 되지 않고 사회적 가치를 생산하지 않는다. 처음 기업이 주식을 발행할 때 사는 건 기업이 가치를 생산하는 활동에 자본을 대는 투자 행위로 간접적으로 관여한다고 할 수도 있지만, 이미 발행된 주식의 소유권을 이리저리 옮기는 것에는 그런 효과도 없다. 식량이 유통되는 것과 달리 주식이 이동하는 것은 사람들의 삶을, 사회를 딱히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지 않는다.
그럼 다른 사람의 돈을 맡아서 금융 투자를 대신해 주는 직업은 노동일까? 자산을 관리하고 수익을 돌려줘(물론 손해를 돌려줄 때도 적지 않지만) 고객에게 도움이 되니 거기까지만 보면 노동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시야를 더 넓혀 보면 수익의 원천이 되는 금융 투자 행위가 사회적 가치를 생산한다고는 보기 어렵다. 딱히 유의미한 사회적 가치를 생산하지 않는 일은 많기에 그리 특이할 건 없다. 가령 노동력을 제공해 주고 임금을 받지만 무의미하고 불필요한 업무를 하는 직업들을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는 ‘불쉿 잡(bullshit job)’이라고 명명하기도 했다.
파편화된 세상의 노동과 소득
나는 지난해 어느 계간지가 주최한 좌담에서 주식 투자에 관해 ‘아무런 공익적 기여 없이 시세 차익을 얻는 게 과연 정당한가’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 좌담을 읽은 한 독자가 남긴 독후감이 참 인상 깊었다. ‘내가 공무원도 아닌데, 왜 돈 버는 데 공익적 기여를 고려해야 하는지?’ 내가 이야기한 것은 넓은 의미의 공익, 곧 사회적 가치의 생산에 기여하는 노동 없이 사회적 가치를 가지는 화폐(소득)를 얻는 것이 정당하지 않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그 독자는 공익은 공무원이나 공직자나 생각할 일이라고 답했다. 아마도 많은 ‘재테크’ 투자자들이 마찬가지 생각일 것이다. 이제 사람들은 돈을 벌어서 쓴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노동이 어떻게 사회와 연결돼 있는지 인식하지 않는다.
투자 수익은 불로소득이 아니라는 항변 역시 우리 사회가 노동을 사회적 관계 속에서 인식하지 못하게 된 현실을 반영하고 있는 것 아닐까. 우리가 자본주의에서 경험하는 노동은 많은 경우 남에게 도움이 되는 일, 사회에 기여하는 일이 아니라 파편화되고 소외된 행위다. 지시받은 업무, 시장에서 돈이 되는 활동만이 가치 있게 여겨지고 노동이 사람과 세상과 맺는 관계는 잘 보이지 않게 된다. 따라서 자신이 얼마나 고생했는지가 중요해지고 소득은 노력과 고통에 대한 보상으로 인식된다. 우리가 학교에서부터 체득하는 바이기도 하다. 입시 공부를 할 때 그 공부가 어떤 의미인지, 사회적으로 어떤 가치가 있는지는 중요치 않으며, 노력해서 높은 서열을 차지하면 보상이 주어질 거라는 기대만 남는다. 월급을 받기 위해 힘든 업무를 해내는 것과 차익을 얻기 위해 자료를 분석하고 고민하는 일에 무슨 차이가 있단 말인가? 이런 생각은 성공한 자본가들이야말로 가장 부지런하고 남들보다 혁신적이기에 돈을 버는 것이라는 서사로까지 이어진다.
그러나 불로소득이 문제인 이유는 개인의 게으름과 도덕성 때문이 아니다. 문제는 사회적 가치 생산에 기여하지 않으면서 사회로부터 가치를 가져간다는 점이고, 그 방식이 바람직한지 여부다. 불로소득의 종류는 다종다양하겠지만, 불로소득은 높은 확률로 다른 이들이 생산한 가치나 공적 자원을 가져오게 된다. 특히 주식·가상화폐 등 자산 투자를 통한 단기 수익은 대부분 그렇고, 때론 과거나 미래의 가치를 가져오는 방식으로도 이뤄진다. 최근 비트코인 시세가 폭락하면서 얼마의 돈이 증발했다는 식의 기사가 많이 나왔는데 그 돈은 증발한 것이 아니다. 비트코인이 쌀 때 사서 비싸게 팔아 돈을 갖게 된 사람들은 비싸게 사서 가격이 폭락한 비트코인을 쥐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가져간 것과 다름없다.
“주식을 팔아서 이익을 본 사람이 있으면 사서 손해 본 사람도 있다는 뜻이다. 예외는 없다. 소위 ‘슈퍼 개미’라 불리는 투자자가 번 1억 원은 다른 누군가(혹은 여러 사람)의 주머니에서 빠져나온 돈이다. (중략) 도박꾼 여럿이 각자 가진 밑천을 모두 걸고 도박을 할 때, 판돈의 크기는 처음이나 마지막이나 똑같다. 딴 사람과 잃은 사람이 갈릴 뿐이다. 그들이 밤새워 수행한 노동은 사회적으로 아무 의미가 없다. 노동을 통한 부의 증가가 없다는 점에서, 증권투자는 본질적으로 도박과 다르지 않다.”(1)
게다가 불로소득의 증가는 불평등을 확대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인간의 시간과 역량은 한정적이고 각자 큰 차이가 없다. 그렇기에 노동의 대가로 벌 수 있는 소득도 그렇게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반면에 자본을 소유·경영하거나 자산을 투기하거나 부동산 임대료를 받는 것에는 그런 한도가 없다. 자산이 많을수록 유리하고 더 많은 기회를 가지며, 때로는 직접적으로 남의 돈을 가져올 수도 있다. 결국 불로소득이 무제한 허용되는 사회는 누구나 부자가 될 기회가 있는 사회가 아니라, 자산이 많은 사람이 더 유리한 사회, 불평등이 더 심각한 사회일 것이다. 우리가 불로소득을 비판하고 경계하는 것은 이처럼 생산하고 교환하고 소비하는 경제 활동은 모두 사람과의 관계 속에 있고 바람직한 사회를 만드는 데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근로소득이 좋다는 게 아니라
언제부턴가 ‘경제적 자유’라는 말이 곧잘 들려온다. 처음 들었을 때는 청소년들이 경제적 계약 행위를 스스로 못하거나 은행 계좌를 보호자에게 관리당하는 문제를 비판하기 위한 개념인가 싶었다. 하지만 그 실상을 들여다보니 충분한 불로소득을 확보함으로써 여유로운 생활을 누리고, 가능하다면 임금 노동을 하지 않아도 되는 조건을 말하는 것이었다. 경제적 자유가 화두가 된 것은 일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임금 노동이 괴롭고 불행하며 불안정하기까지 한 탓이리라. 그럼에도 이 말에는 어폐가 있다. ‘자유’라는 표현이 마치 이를 개인의 문제이자 권리인 것처럼 느끼게 하지만, ‘충분한 불로소득’이라는 것 자체가 타인을 착취하는 위치에 서기를 바라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지속 가능하거나 바람직하지도 않다.
사실 우리에게는 이미 경제적 자유와 맥락은 다르지만 비슷한 개념이 있다. 생존권이고 인권이다. 세계인권선언은 “모든 사람은 자신과 가족의 건강과 안녕에 적합한 생활 수준을 누릴 권리, 실업·질병·장애·배우자 사망·노령 또는 기타 불가항력의 상황으로 인한 생계 결핍의 경우 이를 보장받을 권리를 가진다”라고 밝히고 있다. 모두가 부자가 될 수는 없겠지만 모두가 인간다운 생활을 누리고 안정적으로 생존할 권리는 이미 선언돼 있고, 실현돼야만 한다.
불로소득을 비판할 때 곧잘 인용되는 말이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라는 성경 구절이다. 이는 곧 노동, 특히 임금 노동과 근로소득을 상찬하는 것처럼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그러나 자본주의에서의 임금 노동은 인간이 생존을 위해 자기 자신을 시장에 내놓게 하고, 노동을 소외시킴으로써 수많은 문제를 낳고 있다. 결국 사람들이 불로소득을 선망하게 된 원인은 이러한 임금 노동 제도와 자본주의에 있다. 불로소득이 고생하지 않고 공짜로 벌어서 문제인 것이 아니듯이, 고생해서 벌었다고 임금 노동이 정당한 것도 아니다. 임금 노동과 근로소득에만 집중하면 능력주의에 따른 소득 격차를 정당화하고, 어린이·노인·장애인 등 노동 능력이 모자란다고 여겨지는 이들에 대한 차별로 이어질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에게는 불로소득이 필요하다. 사회의 공적 절차를 통한 복지 급여가, 꼭 현금 급여가 아니어도 주거, 교육, 의료 등을 보장하는 ‘사회임금’이 필요하다. 장애운동에서는 ‘개인이 지닌 현재의 조건 및 능력에 비춰 볼 때 그 활동이 사회 구성원의 물질적, 정서적, 정신적 삶에 기여하는가’를 기준으로 공공시민노동을 개념화하고 소득을 지급하자고 제안한다. 이렇게 보면 존재 자체, 다른 사람과 맺는 관계 자체가 노동이다. 노동과 소득을 사회적 관계에서 인식하고, 존재 자체의 가치를 인정하는 데서부터 불로소득을 극복하는 힘이 나올 것이다.
<각주>
(1) 현재욱, 《보이지 않는 경제학》, 인물과사상사, 249~25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