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리중심일자리 노동자들이 노동권을 요구하고 있다. [출처: 비마이너] |
가장 ‘생산적’인 노동=가장 ‘파괴적’인 노동?
글로벌 금융위기로 수많은 이들이 고통을 겪던 2009년, 골드만삭스 직원의 1인당 평균연봉이 41만 달러(5억 원 가량) 인상됐다. 비판이 쏟아지자, 당시 골드만 CEO였던 로이드 블랭크파인은 말했다. “골드만이 지나친 보수를 받는 사례로 종종 언급된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언급하지 않는 것은, 골드만 직원이 생산하는 1인당 순소득이 업계 평균보다 몇 배나 많다는 점이다. 골드만 직원들은 세상에서 제일 생산적인 사람에 속한다.” 얼핏 이 말이 사실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골드만은 2008년 위기에도 다른 금융자본에 비해 적절히(?) 대응했고, 그 후에도 엄청난 매출을 올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한 게 있다. 골드만은 2008년 위기의 주범이 지 않던가? 골드만은 말 그대로 경제를 망치지 않았던가? ‘제일 생산적’이라는 사람들은 어쩌다 그렇게 세계를 ‘파괴’하게 된 걸까? 이들은 정말로 ‘제일 생산적’인 사람들이긴 한 걸까?
유사한 질문을 금융 투기 활동을 넘어 산업 자본에 투입되는 모든 노동에 던져보는 것도 불가능한 건 아니다. 당신들이 더 많은 ‘가치’를 생산했다고 자부할수록 더 많은 삶이 무너진다면, 그것을 마냥 ‘생산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심지어 당신들이 주도해 온 생산 시스템이 초래한 기후위기는 인류 절멸까지 예고하고 있지 않은가? 이 시대 최대 역설 중 하나는 세계 창조와 가장 거리가 먼 활동들, 심지어 세계를 가장 잘 파괴하는 활동들조차 ‘가장 생산적’이라 명명되고 있다는 사실인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면 2010년대 ‘사실상 쓸모없는 노동’을 칭하는 ‘불쉿잡(Bullshit job)’ 담론이 유행하고, ‘생산 없는 이윤’에 광범위하게 문제가 제기됐던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일자리 보장제, 국가책임 일자리 등 ‘공공적 가치 생산’에 초점을 둔 대안 일자리 담론이 코로나 팬데믹 동안 광범위하게 퍼진 것도 마찬가지다. 파국을 목전에 둔 지금은 ‘노동’ 과 ‘생산’ 개념의 대전환이 그 어느 때보다 시급하다.
지난 5월 29일 구성된 정부 여당의 ‘시민단체 선진화 특별위원회’ 위원장 하태경은 마침 본인도 모르게 ‘노동이란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을 재소환했다. 특위는 그간 정권의 기조에 맞춰 사회운동 진영의 ‘범죄화’에 집중하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를 ‘선진화해야 할 본보기’로 지목하는 한편 전장연의 제안으로 여러 지자체에서 시행 중인 ‘권리중심 중증장애인 맞춤형일자리’(권리중심일자리)를 보조금 불법 사용의 대표 사례로 꼽았다. 권리중심일자리는 그간 노동시장에서 배제되어 온 최중증장애인을 우선 고용하여, 이들이 ‘UN장애인권리협약캠페인’을 하고, 실질화하도록 지원하는 일자리다. 이 일자리 노동자들은 권익옹호활동, 문화예술활동, 장애인식개선 직무를 통해 이 과업을 수행하는데, 이 과정에서 ‘집회’ 역시 주요한 수단이 된다. 그런데 하태경은 이 노동자들이 ‘불법 집회’에 참여했다고 주장하며, 급기야 ‘지방자치단체보조금관리에관한법률’ 위반 혐의로 수사를 의뢰했다. 하태경이 퍼뜨린 ‘괴담’이야 향후 수사를 통해 진상이 드러나면 그만이다. 더 큰 문제는 진실이 드러나기도 전에 그의 행보가 이미 이 일자리의 존속 자체를 위협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태경은 자신 있게 말했다. “중증장애인 일자리가 ‘일반인’과 똑같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미술, 음악 등 취미활동도 지원 대상으로 인정했습니다. 하지만 집회, 시위 참여까지 일자리로 인정하는 건 너무 지나치지 않습니까.” 마침 지난해 말부터 전장연에 대한 공세에 앞장서 온 서울시도 이 일자리 노동자들의 ‘집회 참여’를 문제 삼고, 권리중심일자리를 없앨 계획을 밝혔다. 애초에 서울시는 하태경처럼 이 일자리 직무를 ‘진짜 노동’으로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게 아닐까? 그러거나 말거나, 권리중심일자리를 통해 처음으로 ‘시혜의 대상’이 아니라 ‘생산의 주체’가 된 이들, 자신의 노동에 엄청난 자부심을 느끼고 있는 중증장애인 노동자 400명은 이로써 순식간에 해고 위협에 처했다.
‘집회’는 곧 ‘생산의 장’, ‘권리생산 노동’이란?
시민단체를 선진화하겠다며, ‘장애인단체’를 제1 타깃으로 삼은 사람이 ‘장애인’을 ‘일반인’으로 규정하는 ‘후진적 발상’을 가지고 있다는 건 결코 간과할 수 없다. 하긴 국민의힘과 긴밀한 공조 속에서 1년에 보조금을 수천억을 받아 가며 ‘전장연 때리기’에 앞장서고 있는 ‘선진적(?) 시민단체’ 한국지체장애인협회장이 ‘전장연’을 ‘기형아’라 묘사할 정도니, 그가 이 정도 인식 수준에 머무는 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한편 이만큼이나 하태경의 ‘시민단체 선진화의 기수’로서의 자격을 의심케 하는 건 무엇보다도 그의 ‘후진적 노동관’이다. 이미 상당수 비장애인에게 ‘직업’인 예술을 단순히 ‘취미’로 묘사하고, ‘무능한 장애인’들에게 마지못해 ‘이 정도는 시혜적으로 인정해 줄 수 있다’는 발상은 어떤가? ‘취미’와 ‘노동’의 경계는 언제나 그렇게 확고한가? 나아가 시민단체 활동가의 집회, 시위 참여는 정말로 노동이 될 수 없는가?
▲ 한 노동자가 자신을 해고하지 말라며, 오세훈에게 편지를 썼다. 서울시는 권리중심일자리를 ‘객실 관리, 책 정리, 마트 물품 정리, 캠핑장 관리, 재래시장 안내,어르신 안부 확인’ 일자리로 바꾸려 한다. 이 ‘경증장애인’ 일자리에서마저 배제돼 온 이들은 더 물러설 곳이 없다. [출처: 전국권리중심중증장애인맞춤형공공일자리협회] |
흔히 ‘노동’을 일반적인 ‘임금노동’과 같다고 보거나, ‘자본의 성장에 기여할 수 있는가’ 여부로 그 적합성을 판단하지만, 사실 노동이 갖는 의미는 여기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윤은 세계가 아니다. 이윤 증식이 세계를 생산한 게 아니다. 심지어 이윤 증식을 위한 노동 시스템은 세계를 파괴하고 있다. 노동은 이윤 증식에 투입되는 임금노동 활동에 한정되는 게 아니라, 세계와 타자를 돌보고 재구성하는 다양한 활동들을 포괄한다. 유용한 것이 시대에 따라 변화하면 당연히 노동의 범주도 변한다. 자본 입장에서 마련된 ‘생산성’ 기준에 맞춰 생산되는 ‘상품’만을 노동생산물로 인정해야 한다는 생각은 오직 이 시대에만 통용될 수 있는, 그러나 실은 이 시대에도 이미 부합하지 않는 환상에 불과하다.
실제로 임금노동 바깥의 ‘생산’ 없이 이 ‘세계’는 유지 및 재구성될 수 있는가? 자본 중심의 생산성 기준에 맞춰 ‘노동 범주’를 제한했을 때 벌어지는 심각한 사태 중 하나는 인간의 생존과 다양한 사용가치 생산을 위해 이뤄지는 수많은 활동이 그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당연히 임금노동에 투입되는 노동력을 재생산하기 위해 이뤄지는 숱한 불인정 노동들이 포함된다. 세계를 돌보고 공적 가치를 생산하는 활동, 즉 사회운동 활동가들이 그동안 꾸려 온 집회에서의 다양한 활동들은 어떤가?
물론 어떤 이들은 ‘활동’과 ‘노동’을 개념적으로 엄격히 구분하려 하지만, 현실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집회 하나를 꾸리는 데도 수많은 노동이 투입된다. 어떤 이는 집회의 기조를 고심하고, 보도자료를 작성하고, 발언자를 섭외한다. 어떤 이는 참여자를 조직하고, 현수막을 걸고, 무대를 설치하며, 음향을 체크한다. 어떤 이는 퍼포먼스를 준비하고, 발언문을 준비하고, 피켓을 만든다. 중요한 것은 이 다양한 노동이 모여 이 세계를 재구성해 오면서, 비로소 기존에 권리를 보장받지 못했던 이들의 권리가 ‘생산’되었다는 사실이다. 권리란 단순히 선언에 그친다면 공허할 뿐이다. 권리란 누군가를 배제하는 공간을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 공간으로 전환할 것을 요구하는 과정에서, 즉 ‘권리생산 노동’ 과정에서 비로소 실현된다. 집회는 정말로 ‘권리의 발명’을 위한 ‘생산의 장’이다(물론 세계를 ‘파괴’하는 집회도 있긴 하다).
전장연이 권리중심일자리를 고안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였다. 권리중심일자리 이전부터도 ‘임금노동이 불가능한 자’로 규정된 ‘불구들’은 ‘상품’을 직접 생산하지는 않았을지언정, 이 세계가 필요로 하는 수많은 것들을 ‘집회’를 통해 생산해 왔다. 단적으로 만약 장애인들이 비장애중심주의적 세계에 맞서 시위를 진행하지 않았다면, 지하철 엘리베이터는 설치되지 않았을 것이다. 저상버스는 물론, 수많은 공간에 접근권도 개선되지 않았을 것이고, 장애 관련 법과 제도도 계속 ‘후진적’ 상태에 머물렀을 것이다. 심지어 이들이 ‘생산한 권리’와 ‘공적 가치’는 장애인을 넘어, 인구 모두에게 유용하게 쓰이고 있다. 지하철 엘리베이터에는 왜 비장애인들로 가득한가. 집회를 꾸린 장애인을 힐난하는 이들조차 이들이 생산한 제도의 혜택을 누리는 경우는 없는가.
권리중심일자리는 그동안 ‘가장 일을 못 한다’고 여겨져 온 이들, 심지어 만성적인 ‘장애인 시설화’와 ‘빈곤’ 등 여러 조건 탓에 이러한 방식으로조차 세상과 관계 맺지 못해온 이들에게 이 생산의 영역에 참여할 기회를 열어 준 일자리다. 그리고 이 일자리가 시행되고 고작 3년 동안 참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어느 지역에서는 권리중심일자리 노동자들의 접근권 모니터링을 거쳐 지역사회 접근권이 개선되었다. 어떤 노동자들이 만든 문화예술작품들은 장애인 차별의 현실을 알리면서, 그 자체로 기존 ‘정상성의 관점’과는 전혀 ‘다른 관점’이 이 세계에 현존함을 대중들에게 보여줬다. 어떤 노동자들은 기자회견과 집회 발언을 통해, 중증장애인 당사자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들을 시민들에게 건넸다. 한국 정부가 비준한 ‘UN장애인권리협약’의 핵심 내용을 핸드북으로 만들어 집회 현장과 일상 곳곳에서 배포하는 노동자들도 있었다.
그동안 이 사회에서 전혀 보이지 않던 이 중증장애인들의 출현은 그렇게 이 세계 곳곳을 새롭게 재구성해 왔다. 대게는 방치와 동정의 대상, 기껏해야 돌봄의 대상에 그쳤던 이들이 이제는 스스로 세계를 돌본다. 이 ‘생산’ 활동은 정말로 하태경과 서울시가 말하듯, 그렇게나 문제가 많은 일자리인가?
▲ 전장연에서 발표한 만평. 하태경 시민단체 선진화 특위 위원장이 ‘전장연 죽이기’ 과정에서 사용한 ‘시민단체 3대 카르텔’론 등 괴담 유포를 풍자하고 있다. [출처: 피델체] |
‘시민단체 선진화’, ‘노동 개념’의 전환을 동반할 수 있기를
국가가 너무나도 자주 제 기능을 하지 못하여 쉽게 잊히곤 하지만, 누군가의 권리를 생산하고 공공적 가치를 생산하는 건 분명 국가의 역할이다. 사회운동 단체는 긴 시간 동안 국가의 그러한 ‘생산’을 보조해 왔고, 국가가 그러한 역할을 제대로 못할 때는 비판의 날을 세워 가며 그 역할을 대신해 오기도 했다.
권리중심일자리도 마찬가지다. 마침 2014년 ‘UN장애인권리위원회’는 한국 정부에 “공무원, 국회의원, 언론, 대중에게 ‘UN장애인권리협약’을 공론화하고 교육시킬 것”과 “장애 인식 제고 캠페인을 벌일 것”을 권고했다. 그러나 정부는 사실상 이 권고를 전혀 이행하지 않았고, 이에 2022년 위원회는 한 번 더 한국 정부에 “장애인단체와 장애인 당사자의 참여를 통해” 이 캠페인을 수행할 것을 권고했다. 중증장애인 당사자들을 공적 차원에서 고용하여 ‘권리생산 노동’을 수행하게끔 지원하는 권리중심공공일자리는 이 권고안에 정확히 부합한다. 이게 ‘범죄’라고? 한국 정부가 비준하여 “국내법과 동일한 효력을 가지는” 'UN장애인권리협약'의 정신과 그 정신에 따른 권고를 위반하는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이들은 도리어 하태경과 오세훈 서울시가 아닌가?
권리중심일자리에 대한 서울시와 ‘시민단체 선진화 특위’의 공격이 권리중심일자리를 넘어 시민단체 모두에게로 이어질까 봐 두렵다. 그동안 숱한 사회운동 단체 활동가들이 ‘초-저임금’으로, 심지어 ‘무급’으로 지금껏 ‘권리생산’ 과정에 참여해 왔다. 적지 않은 활동가들이 빈곤과 과로에 시달리다 별수 없이 활동을 중단했다. 그리고 그만큼 사회운동의 역량은 약화하고 있고, 또 그만큼 이 사회의 ‘권리생산’과 세계 돌봄의 역량도 약화하고 있다. ‘시민단체 선진화 특위’의 목표가 정부 비판 세력 말살이 아니라, 정말로 ‘시민단체 선진화’라면 이들의 우선적 과제는 이 활동가들의 권리생산 활동, 세계를 돌보는 활동들을 공적 차원에서 더 안정적으로 지원하는 것이다. 시민단체 활동가들이 수행해 온 ‘권리생산 노동’과 ‘세계 돌봄’의 가치를 인정하고, 더 많은 시민에게 이 노동을 장려하는 것이 ‘시민단체 선진화’의 과제다. 그러고 보면 권리중심일자리는 당신들이 없애야 하는 일자리가 아니라, 당신들이 시민단체 선진화 과정에서 나아갈 방향의 청사진을 제공해 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난 2020년, 국정감사에서 한 권리중심일자리 노동자는 말했다. “제게 일자리는 돈을 버는 활동, 그 이상입니다. 저는 중증장애로 인해 집과 시설 안에만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 일자리는 제게 없었던 자신감을 만들어 주었고, 사람들과 같이 살아가는 통로를 열어 주었습니다. 전 교통약자들에게 꼭 필요한 저상버스를 저상버스가 아니라 그냥 ‘버스’라고 불러도 될 때까지 저상버스의 필요성을 홍보하고, 저상버스 보급률 높이기에 최선을 다할 겁니다.” 그는 언젠가 또 이렇게 덧붙였다. “우리는 세상을 바꾸는 노동을 합니다!”
나는 확신한다. 이 노동자가, 이 노동자와 함께 광장에 나서 권리를 노래하는 중증장애인 노동자들이 골드만 노동자들보다 훨씬, 아니 더 정확히는 이들과 달리 ‘생산적’이다. 이 노동자들을 해고하는 것은 시민단체 ‘후진화’를 넘어, 노동 개념의 퇴보를 가져올 것이다. 하태경과 오세훈 서울시, 당신들은 역사에서 어떻게 기억되고 싶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