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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약이라는 이름으로 다가왔던 만성골수성백혈병 치료제 '글리벡'은 이제 한국사회에서 가장 유명세를 타는 약물임과 동시에 가장 시끄러운(?) 약으로 통한다. 글리벡은 임상실험을 거치지 않고 환자에게 투여되는 동정적 사용법이 적용된 우리나라 최초의 사례를 만들었고, 2개월이란 유례없이 신속한 검토기간을 거쳐 품목허가를 받기도 했다. 작년 6월부터 시작된 글리벡 약가를 둘러싼 '노바티스'와 정부의 지리한 싸움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데, '노바티스'는 글리벡 한 캡슐당 25,005원이라는 가격을
고집하고, 보건복지부는 줄곧 17,000원대를 고수해 왔으며, 환자들과 시민단체들은
글리벡 시판가격 인하와 보험적용 확대를 계속 요구해 왔다.
작년 11월 19일 정부가 글리벡의 보험약가 상한액을 노바티스가 당초 제시한 가격보다 30% 낮은 100㎎ 캡슐당 17,862원으로 고시하자, 한국 노바티스측은 고시된 글리벡에 대한 보험약가에 불응하고 당초 제안한 25,005원의 가격상한선을 보험약가산정 관련 법령에 따라 재신청하는 한편, 글리벡의 약가관련 업무를 진행하고 있는 에델만코리아(통상홍보 분야 전문 컨설팅 회사)는 "글리벡의 약가는 국제적 합의를 이룬 가격"이라며 "이번 약가결정으로 인해 미국 대외통상무역부(USTR)로부터 강도 높은 통상문제가 제기될 것임"을 경고하기도 했다.
정부의 약가 고시 후 1주일이 지난 11월 27일부터 서울시내 일부 병원에서 환자들이 약을 받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하자, 국내의 진보적 보건의료 단체와 Oxfam을 비롯한 11개 해외단체들이 글리벡 공급 중단을 규탄하고, 대한의사협회까지 노바티스를 비난하고 나서자, 노바티스는 12월 5일 약가결정이 될 때까지 한시적으로 환자들에게 글리벡을 무상공급하겠다고 발표하면서, 글리벡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글리벡 사건은 정부의 보건정책(현재 글리벡의 보험적용에는 '만성기' 환자가 제외되는데, 이것은 보험을 적용받기 위해서 환자가 좀 더 아플때까지 기다리도록 강요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과 건강보험의 구조적 문제점 등 우리 나라 보건의료 체계의 총제적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는데, 다국적 제약기업에 대응한 환자들 최초의 약가 투쟁이 전개되고 있다는 점과 환자와 보건의료 단체가 연합한 최초의 연대 투쟁을 만들었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특허에 의한 독점 가격과 약의 접근성 제한'이라고 하는 의약품 특허의 모순에서 글리벡 사건이 조금도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을 지나칠 수 없다. 사실 글리벡 논쟁에서 특허(글리벡의 기본특허 CH 921083는 국내에 특허 제261366호로 등록되어 있고, 3건의 특허가 진행중에 있다)는 표면화되지 않은 숨은 이슈라 할 수 있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노바티스가 혁신적 신약을 개발했다는 인식이 특허권을 통한 보상의 정당성에 심정적 기여를 하면서
특허 문제가 묻혀 있기도 하다. 그러나, 글리벡의 개발과정을 살펴보면, 노바티스가
글리벡의 정당한 특허권자로 보기는 어렵다. 글리벡이 노바티스의 단독 연구결과가
아니라는 점은 특허의 정당성에 심각한 의문을 제기하고, 특허를 무기로 생산단가의
38배에 가까운 가격을 노바티스가 고집하는 것은 '먹을 수 있는 가격'이 고려되지 않은 '이윤 추구'로만 특허가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노바티스를 포함한 다국적 제약기업에게 의약품은 환자에게 공급할 '약'이 아니라 이윤추구를 위한 '상품'에 더 가깝다. 구매력이 없는 소비자에게는 '상품'이 공급되지 않는다. '약'을 '상품'으로 고정시키는 제도의 중심에 특허가 자리잡고 있다.
상품을 약으로 복원시키고 약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는 싸움에는 보건의료 정책도 중요한 역할이 필요하지만, WTO 각료선언에서도 밝힌 '공중의 건강이 특허권에 우선한다'는 원칙을 관철시키는 방향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이러한 싸움은 '약'의 공공성 뿐만 아니라 특허제도의 공익적 지향을 현실로 구현하는
것이다. 공공의 이익을 위한 특허의 강제실시 경험이 없는 전무한 우리 사회에서 공익을 위해 특허권이 제한될 수 있고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합의와 실천이 글리벡 사건을 통해 이루어져야 하며, 이 과정에서 공익을 위한 특허발명의 강제실시는 특허권의 남용에 대한 제재조치가 아니라, 특허권자의 이익 이외의 더 큰 이익을 위한 특허권자의 희생을 더 강조한다는 사실도, 특허권에 우선하는 '공공의 이익'을 구체적으로 해석하는 데에 반드시 참조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