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전쟁
1840년 초 침머만의 <대농민전쟁사개설>을 바탕으로 엥겔스가 농민전쟁을 분석한 글을 마르크스가 간행한 잡지에 기고하였는데 1870년 다시 단행본으로 이 글이 나왔다. 이 글을 보고 형상화한 작품이 [농민전쟁]이다. 1902년 당시 독일은 사회주의가 위세를 떨치며 계급투쟁에 대한 열기가 고조되어 있었다.
[농민전쟁]의 역사적배경은 15세기 말 16세기 초 지배계급을 이루는 봉건영주, 성직자들의 사치스러운 생활을 위해 농민들이 그 부담을 다 떠맡았다. 농민은 소나 말, 그 이하의 취급을 받고 살았다. 농민들은 영주의 토지에서 일을 하였고 자신의 농지에서 올린 소득은 십일조나, 지대, 전쟁세, 제국세 등으로 다 빼앗겼다. 당시에는 영주에게 돈을 바치지 않고는 결혼을 할 수도 없었다. 뿐만아니라 그의 아내와 딸 또한 영주의 소유였던 것이다.
이 때 루터의 종교개혁이 농민의 반란을 일깨운다. 토마스 뮌쩌는 ‘천국이 아닌 지상의 왕국 건설'을 주장하며 도적질을 하지 말라고 설파하는 자들이 농민들을 약탈하고 파멸시키고 있고, 수탈당하는 농민과 수공업자들이 작은 죄를 범하면 사형에 처해진다고 교회의 성직자들과 지배계급을 강하게 비판한다. 15세기 말 부터 유럽 곳곳에서의 간헐적인 농민반란이 1525년 그의 지도아래 독일의 70%에 달하는 농민의 참여로 농민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억압되었던 분노는 봉기로 급속히 퍼져나갔고 무자비한 진압 또한 가속화 되었다.
농민전쟁은‘산더미처럼 쌓인 파괴의 잔해와 나무마다 매달린 농민의 시체'로 참혹산 양상을 띄었고, 마을을 통째로 불태워 약탈과 대량학살까지 저질러 졌다. 이 속에서 토마스 뮌쩌는 고문으로 참수당했고, 농민반란이 들불처럼 퍼지자 루터는 지배계급인 영주와 귀족편에서서 평화를 부르짖으며 조정자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농민의 반격이 심해지자 루터는 ‘미친개를 죽이듯이 두들겨 패고, 목졸라 죽이고, 찔러 죽여아 한다'고 외친다. 농민에 관해서는 어떠한 잘못된 자비도 실천되어서는 안된다고 떠들어댄다.
독일의 농민전쟁은 한 계급이 전체적으로 계급운동에 참여한 독일 최초의 그리고 유일한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 당시가 서양미술사의 꽃이라고 불리는 르네상스시대이다. 이렇듯 유럽 각지에서 농민들의 반란이 끊이지 않을 때 레오나르도 다 빈치, 라파엘, 미켈란절로, 뒤러 등의 거장들이 불후의 명작들을 쏟아낸다. 독일의 조각가이자 목판화가인 리멘슈나이더가 농민전쟁에서 농민들 편에 서서 교황에게 맞섰다는 이유로 투옥되어 심한 고문으로 작품활동을 중단하고 은둔생활을 하다 죽어갔다.
이러한 처참한 역사적 사건인 농민전쟁을 현재적으로 부활시키고자 [농민전쟁] 작업을 한다. <밭가는 사람들>, <능욕>,< 낫을 갈면서>, <무기를 들고>, <폭발>, <전쟁터에서>, <잡힌 사람들>의 7부작으로 완성된다.
콜비츠의 작업순서는 [직조공의 봉기]가 먼저 제작되지만 [농민전쟁]이 [직조공의 봉기]보다 훨씬 앞선 시대적, 역사적 배경을 담고 있다. 그리고 [농민전쟁]연작은 [직조공의 봉기]와 같은 구성으로 진행과정과 감정을 탁월하게 표현해낸 것으로 7개의 대형판화로 주제에 대한 정확한 상황설정, 감정처리, 탁월한 구성과 묘사로 완결성을 유지하고 있다.
이 연작에서도 억압하는 지배자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밭가는 농부의 노고에서, 여인의 능욕 등의 표정과 몸짓, 분노에서 이들을 짓밟는 자들을 간접적으로 더 적나라하게 느낄 수 있다.
[농민전쟁]에서도 역시 케테콜비츠는 피지배계급의 피끓는 분노를 너무도 적확하게 포착하여 리얼리즘의 정수를 느끼게 한다. 작품하나 하나가 고도의 예술성을 담보한 탁월한 작품이다. 작품을 만나면 그녀의 가슴을 대하는 느낌이다. 아주 오랫동안 작품을 보고 또 보고 느끼길 바란다.
첫번째 <밭가는 사람들>을 완성하기 위해 9개의 상황을 설정하고, 6개의 상황을 제작하였다고 한다. 이 구도는 레핀의 부두노동자(1870-1873)와 비슷하다. 밭가는 농부들의 노고가 보는 이에게 그대로 이전되면서‘영차'하며 당기거나 밀어주고 싶은 심정을 느끼게 한다.
<능욕>에서는 케테콜비츠의 작품에는 나타나지 않는 식물의 세부적인 묘사로 특이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처참한 상황에서의 흐드러진 꽃의 세부묘사는 찢겨진 여인과 화사한 꽃을 대조시킴으로서 당시의 몸서리치는 모욕, 허탈, 슬픔과 노여움이 그대로 전이되며 영주와 귀족에 대한 분노를 한층 고조시킨다.
이 연작의 반전이 이루어지는 <낫을 갈면서>는 앞의 두 작품보다 먼저 제작된 작품이다. 습작과 변형말고도 12가지의 상황설정이 있었던 작품이다. 농민들의 힘든 노동과 여인의 능욕을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비장한 각오와 폭풍전야의 긴장을 느끼게 하는 작품으로 한 인물의 심리를 포착하고 있다. <무기를 들고>는 날카로운 창과 낫을 들고 나선형 계단을 물밀듯이 밀려드는 사람들. 참아왔던 분노를 무장을 하고 봉건영주와 귀족을 처단하러 간다. 계속 이어지는 사람들을 밝은 빛으로 처리하여 분노와 힘의 크기를 표현하였고, 대각선 구도의 치솟아 올라가는 구도로 역동성과 열기를 표현하고 있다.
[농민전쟁] 연작에서 <폭발>은 [직조공 봉기]의 <폭동> , 1899년의 <봉기>를 이어가는 것으로 한 주제에 대한 깊은 탐구을 느낄 수 있고 (이것은 케테콜비츠의 전 작품을 관통하는 특성을 보인다). 또한 혁명적인 예술가로서 대중봉기에 대한 의지를 표현하고 있다. 또한 봉기의 들라크르와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처럼 농부를 독려하며 ‘하늘을 나는 여인’을 침머만의 <대농민전쟁사개설>에서의‘검은 안나’로 등치시킨다. <폭발>에서 ‘검은 안나’(등진 여인)는 군중과 함께하는투쟁하는 여성으로 발전한다.
흑백의 대조로서 표현한 <전쟁터에서>는 개선된 부식법을 사용하여 밤의 어둠을 나타냈다. “고통은 아주 어두운 빛깔이다”고 말한다. 봉기이후의 처참한 상황을 자식을 찾는 어머니의 모습으로 어머니의 손을 세밀하게 묘사하고, 손과 죽은 자의 얼굴과 램프의 빛만 밝게 표현하고 나머지는 어둠과 별 묘사 없이 표현하였다. 가슴 뭉클한 안타까움이 느껴진다.
<죄수들>이 마지막 작품으로 살아남은 자들은 모두 결박당한다. 비록 승리하지 못한 투쟁으로 잡힌 몸들이 되어 고개숙이고, 슬픈 눈으로 하늘을 응시하고, 지쳐 쓰러져가지만 영주와 귀족에 대한 분노와 울분은 그대로 남아있다. 농민의 단단한 어깨와 팔, 다리, 담담한 표정에서 새로운 투쟁에 대한 결연한 의지를 읽을 수 있다.
[농민전쟁] 연작은 5년간의 작업으로 1908년 완성되고 ‘역사미술학회’에 의해 출판되었다. 농민전쟁 연작을 마치며 그는 독일 판화가의 제1열에 우뚝 서게 된다. 연작은 러시아에서 2월 혁명이 일어나 세계적으로 사회주의 사상이 보급되고 사회주의 운동이 활발한 속에서 제작되었다. 이 시기에 독일에서도 계급투쟁이 격렬하여 사회주의자들은 사상 유례없는 선전선동을 하게 되는데 케테콜비츠는 사회주의자 예술가로서 투쟁의 열기를 북돋웠다. 또한 자신이 가진 능력의 최상의 것을 투여했다고 자부하였던 작품이다.
짐플리시시무스
1909년 케테콜비츠는 하이네, 알베르트 랑겐 등이 활동하고 있었던 풍자 시사주간지인 [짐플리시시무스]에 사회비판적인 그림을 싣기 시작한다.
<가내노동>에서는 대도시 생활의 힘든 삶, <임시숙박소>의 프롤레타리아의 즐거운 일상, 혼자된 여자의 고단한 삶, 실직, 배고픔과 절망, 원하지 않는 임신 등 노동자 가족의 전형적인 불행들을 감동적으로 묘사한다.
4년여의 이 작업을 통해 중요한 양식의 변화를 가져왔다. 자신의 회화적인 착상을 직접 모델을 이용, 꼼꼼하게 발전시켜서 동작 몸짓을 하나하나 힘들여 완성했으나 이제 밑그림을 재빨리 그려내고 본질적인 요소를 집중하기 위해 세부묘사를 생략한다.
“신속하게 완성해야 한다는 것, 대중적으로 표현해야만 할 필요성, 그러면서도 <짐플리시시무스>를 위해서도 예술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가능성을 확보하는 것, 그렇지만 그 무엇보다도 늘 나를 새롭게 사로잡아 오래도록 충분히 다 말하지 못해온 것을 대중 앞에서 더 자주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 이 모든 것이 나로 하여금 유달리 이 작업에 애착을 느끼도록 하였다. 단 하나 나쁜 점이 있다면 내가 이 잡지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후부터 아이들이 스스럼없이 이 잡지를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도 더 이상 이 잡지가 저속하다는 이유로 그들의 눈에 안 띄도록 감출 수는 없게 되었다.”
이것은 [짐플리시시무스]에 기고하는 케테의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지만 그의 예술관을 엿볼 수 있는 대목으로 예술이 계급투쟁과 노동자계급 의식 형성에 적극적인 역할을 담당해야 하는 예술의 당파성을 견지하고 있다.
“ 이제 어디에서나 모두가 궁핍과 싸워나가는 과정에 내가 참여해 줄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것은 당연한 요구이며 정상적인 일이다. 나는 정말로 기꺼이 나의 작품으로 이 일을 도울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일은 기분내키는 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곧바로 큰소리를 듣게 된다. 빨리해! 노인복지를 위해! 아동복지를 위해!”
게르하르트 슈트라우스는 <콜비츠연구서>에서 “독일 조형예술가들 중에서 노동자 계급내의 민중성을 케테가 포괄한 세계에 필적할 만큼 획득하거나 최소한 그러한 경지에 버금가는 사람은 없다”고 주장한다.
이렇듯 짐플리시시무스>에 기고된 작품들은 노동자의 일상적인 슬픔과 기쁨을 민중적으로 표현하였다.
전쟁
일곱개의 목판화로 [전쟁] 연작은 1922-1925년에 걸쳐 완성된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많은 젊은이들이 지원병으로 전쟁터에 나가고 콜비츠의 둘째아들 페터도 지원하였다. 1914년 10월 10일 임관한 18살의 페터는 20일 후 전사통지서로 돌아온다. 콜비츠는 아들을 잃은 슬픔에 힘든 삶을 보내며 자신의 슬픔을 작품으로 승화시킨다.
<희생>은 제단에 희생물을 바치듯 두 손으로 어머니가 아이를 무엇인가에게 바치고 있는 그림이다. <북두>라는 잡지에 실려서 1931년 최초로 콜비츠를 중국에 소개한 이 작품은 노신과 그 동료들의 공감을 샀고, 중국의 미술학도들에게 영향을 미쳐서 중국 목판화 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해골모습의 병사, 우는 병사 등으로 무의미하고 절망스러운 전쟁을 <지원병들>이 표현하고 있다.
전쟁연작은 전쟁이 남긴 상처를 표현하는 것으로 전쟁으로 인한 한 사람의 죽음과 연관된 부모와 부인, 자식, 어머니들을 표현해 냄으로써 전쟁의 참혹함을 전하고 있다.
“전쟁반대 포스터를 제작해 달라는 의뢰를 받았다. 이 일을 생각하면 나는 즐거워진다. 어떤 목적을 지닌 작품은 순수한 예술일 수 없다고 많은 사람들이 말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내가 작업할 수 있는 한 나의 예술로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의지를 버리지 않을 것이다.” (1922년 여류화가 에르나 크뤼거에게 보낸 콜비츠의 편지 중에서)
“ 나는 전쟁을 형상화해내기 위해 무던히 애섰지만 그것을 포착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야 비로소 내가 말하고 싶어한 것을 어느 정도 말해줄 목판화 시리즈를 완성했습니다. 그 제목은 <희생>, <지원병들>, <부모>, <어머니들>, <과부들>, <민중>입니다. 이 그림들은 마땅히 온 세계를 돌아다니며 이렇게 말해야 할 것입니다. 보시오, 우리 모두가 겪은 이 참담한 과거를.”(1922년 작가 로망롤랑에게 보낸 콜비츠의 편지 중에서)
예술이 무엇을 해야하는지를, 자신이 무엇을 해야하는지를 뚜렷이 인식하며 [전쟁]이란 주제를 다루면서도 노동자계급의 현실을 고발하고 있다.
<전쟁>연작 이외에 반전의 메시지가 담긴 1914년 작인 <근심>, <어머니들>, <작전 중 사망>과 <전쟁은 이제그만!>(1924) <씨앗들이 짓이겨져서는 안된다! >(1942) 등이 있다.
프롤레타리아
<실업>, <기아>, <자식의 죽음>으로 목판으로 구성된 이 연작은 [직조공의 봉기]나 [농민전쟁]에서의 작품을 통해 프롤레타리아의 비참한 삶을 구체적으로 표현한 것과는 달리 더 가까이에서 관찰한 노동자계급의 극단적인 빈곤의 삶을 간결하게 추상적으로 묘사했다.
석판이 부드러우면서 구상적, 구체적인 반면 목판은 거칠고 추상적으로 표현을 하는데 적합하다. 1926년 10월 16일 알프레드 두루스는 [적기]에서 [프롤레타리아 ]연작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하였다.
“그녀는 클링거의 영향을 받고서 졸라, 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 아르노 홀츠, 율리우스 하르트 등의 문학에서 접한 프롤레타리아트의 비참한 삶을 직접적으로 표현하였던 것에서 벗어나 이러한 노동자계급의 빈곤한 삶을 더 가까이에서 더 강하게 예술적으로 형상화하기에 이르렀다. 이것과 나란히 기법도 무른 동판화에서 시작하여 석판화를 거쳐 가장 거친 목판화에 이르렀다. ”
콜비츠는 이 작품에 대해 “이 판화들은 나쁘지는 않다. 괜찮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초기 작품들만큼 내게 절실한 작품은 아니었다. 다만 작업하는 시간이 즐거웠기 때문에 손을 놓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고 말하고 있다.
이 [프롤레타리아] 연작은 1945년 이후의 동독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촉매제가 되기도 한다.
먼저, <실업>을 살펴보면 원근효과로 섬뜩한 느낌을 자아내고 있다. 두번째 작품 <기아>는 열다섯 번이나 구도를 바꾸면서 가장 많은 노력을 기울인 이 작품으로 안타깝게 그림을 구할 수 없다. <빈의 굶주리는 어린이들을 위하여>라는 작품에서도 다룬 주제로 보다 간결하고 추상적으로 강렬하게 표현하였는데 채찍에 맞아 죽어가는 모습을 탁월하게 형상화 한 작품이다. <자식의 죽음>에서는 자전적인 작품이지만 자신의 특수한 사항을 전혀 그리지 않은 채 본질적인 내용만을 표현하였다.
이상으로 [농민전쟁], [짐플리시시무스], [전쟁], [프롤레타리아] 연작을 살펴보았다. 콜비츠의 작품의 힘은 주제를 포착하여 한 화면으로 구성해내는 구성력이 대단하다. 더 이상 그 주제로서는 다른 구상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정확히 포착해 낸다. 또한 감정전달이 그대로 옮겨오는 놀라운 힘을 작품에 새겨 넣는다. 아이의 눈을 통해 엄마의 몸짓을 통해, 농민의 육중한 다리와 어깨에서 그대로 전해진다. 역시 탁월한 예술작품이며, 노동자계급의 예술에서 가장 빛나는 전형으로 자리매김 하는데 조금도 손색이 없다. 케테 콜비츠 작품을 능가하는 노동자계급의 예술을 본 적이 없다. 또한 지배계급예술과 견주어서도 절대적으로 월등한 예술성을 담보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의 작품을 감상한 사람이라면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다음은 케테콜비츠 마지막 글로 [죽음]연작과 플랑카드, 포스터 등 사회ㆍ정치적인 그림들과 일상적인 그림들, 그리고 자화상과 그의 예술세계와 영향에 대하여 다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