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12일 갈월동 민중의료연합 회의실에서는 유럽연합(EU)과 미국을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는 자유무역협정(FTA)의 지적재산권 조항에 대한 토론회가 열렸다. “자유무역협정(FTA)과 의약품 접근권/지식에 대한 민중의 권리”라는 주제로 열린 이번 토론회에서 발제자들은 최근 FTA의 체결이 무역관련지적재산권협정(TRIPs) 플러스, 세계무역기구(WTO) 플러스, 관세및무역에관한일반협정(GATT) 플러스 식으로 강화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특허 및 저작권 등이 기존의 국제조약과 비교할 때 뚜렷이 강화되고 있으며, 이것은 일반 국민들을 비롯하여 민중의 지식에 대한 권리를 심각히 제약할 수 있다고 비판했다.
FTA 추진 배경과 현황, 의약품 특허와 접근권, FTA의 지적재산권 조항의 문제점, 미국의 스페셜 301조에 대한 법률적 검토 등 크게 네가지 주제로 나뉘어 진행된 이번 토론회는 투자협정·WTO 반대 국민행동이 주최했으며, 민중의료연합, 정보공유연대 IPLeft, 진보네트워크센터에서 주관을 맡았다.
양자간 FTA 체결 박차의 배경
최근 몇 년 사이, EU와 미국 등 선진국들을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는 새로운 경제블럭화는 개발도상국들을 비롯한 후진국에 대한 자본의 경제 지배를 더욱 공고히 하고 있다. 2005년 전후, 세계경제는 유럽연합(EU), 미주자유무역지대(FTAA), 동아시아자유무역지대의 3개의 거대한 경제블럭으로 나누어 질 것이라는 전망이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이미 공론화 되어 있다.
▲ 지역별로 협상이 체결되었거나 진행중인 자유무역협정 현황
미국은 캐나다 및 멕시코와 함께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를 체결하고, 2005년에 중미공동시장(CACM), 안제스공동시장(ANCOM), 카리브공동체(CARICOM), 남미공동시장(MERCOSUR)을 통합해 쿠바를 제외한 아메리카대륙 34개국이 참여하는 미주자유무역지대(FTAA) 출범을 예정하고 있다. 세계대전 이후 위축된 유럽의 경제적 위상을 복원하기 위해서 1993년에 출범한 유럽연합은 유로화라는 통화통합까지 이뤄냄으로써 유럽 국가들의 단일시장 형성을 위해서 박차를 가하고 있다. 유럽연합은 남미공동시장(MERCOSUR)과의 자유무역지대 추진을 통해서 급속히 진행되고 있는 미국의 FTAA에 대응하고 있다.
또한 NAFTA는 아태경제협력체(APEC)를 유럽연합은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를 통해서 아시아 시장에서의 유리한 입지를 위해 경쟁하고 있다. 최근 불거지고 있는 한․중․일 자유무역지대 형성의 시도는 선진국들의 경제블럭화에 상대적으로 위기감을 느낀 동북아 3개국의 동아시아 경제공동체 결성을 통한 대응으로 보인다.
이런 새로운 경제 블록화 경향에 대해서, 평화인권연대 김지연 활동가는 “미국, 유럽연합을 비롯한 각 국은 관세 철폐, 투자 자유화 등 WTO 도하개발의제를 통해 실현하고자 했던 조치들을 지역별, 양자간 FTA을 통해 시도하겠다며 이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이런 움직임의 배경에는 GATT/WTO 등의 다자간 무역협상이 난항에 빠졌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특히 지난 칸쿤에서 열린 WTO 5차 각료회의의 결렬과 도하개발의제 협상의 난항을 주요 이유로 설명하고, “이러한 난항이 오히려 지역별 또는 양자간 FTA에 박차를 가하게 하는 이유”라고 꼬집었다.
미주자유무역지대(FTAA), 미-싱가폴 FTA, 한-칠레 FTA, 한-일 FTA 등 이미 체결되었거나 협상 중인 FTA 는 WTO를 통해 그동안 추진되었던 무역자유화 조치들을 고스란히 포함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더욱 강력한 조치를 취하고 있는 상황이다. 또한 지난 해 6월 방콕에서 열린 APEC 정상회의에 참가한 각국의 정상들은 ‘각 회원국이 WTO의 목표 진전에 기여하는 방향으로 지역무역협정(RTA)과 FTA를 추진할 것’을 선언하기도 했다. 김지연 활동가는, “WTO와 마찬가지로 FTA 역시 민중의 삶의 모든 영역을 상품화시키고, 시장논리를 전 사회에 강요함으로써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한 자본의 전략이며, 이에 따라 민중들의 생존권, 필수 공공서비스에 접근할 권리, 사회·문화적 가치 등은 희생을 강요당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민중 의약품 접근권 제약
‘특허권의 미래와 의약품 접근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발제를 한 민중의료연합 권미란 활동가는 최근에 진행되고 있는 FTA가, 각국에서 의약품을 저렴하고 형평성 있게 공급하기 위한 노력들을 차단하고 있으며, 각 정부의 주권이자 무역협상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되는 의약품의 가격정책, 판매승인, 관리제도에 대한 수정을 요구하고 FTA 협상 대상으로 삼고 있다고 주장했다. 실제 FTA에서의 특허 관련 조항이 기존의 TRIPs 보다 강화되고 있으며, FTAA에서는 특허 허여일로부터 최소 20년간 특허보호를 요구함으로써 TRIPs보다 3 ~ 5년간 특허기간 더 연장할 수 있다. 나아가 의약품의 경우 판매승인과정에서의 지연에 대한 보상까지 요구함으로써 특허기간이 더욱 확대될 수 있다는 것이 권미란 활동가의 주장이다.
의약품의 특허에 대한 민중 통제권의 하나인 강제실시권도 FTA에서는 기존의 TRIPs 보다 상당히 축소되고 있다. 권미란 활동가는 “TRIPs에서는 각국이 자국의 법률에 따라서 강제실시권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해 놓았지만, FTA에서는 공공의 비상업적 목적, 공표된 국가의 비상사태, 급박한 응급상황에 대해서만 정부의 요구에 따라 강제실시가 허여되어, 실제로 사적부분에서 강제실시를 사용할 수 있는 조건은 거의 없으며, 강제실시로 인한 생산품을 판매하거나 수출도 거의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그 외에도 특허출원후 5년간 강제실시 불가, 병행수입금지, 특허대상의 확대 등 대부분의 지적재산권 조항들이 기존의 TRIPs 보다 강화되는 방향으로 협상이 체결되고 있다.
이런 문제는 곧바로 한국에도 심각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한국과 같은 의약품 생산 및 제공 구조가 취약한 나라에서는 FTA의 체결은 곧 초국적제약자본에 대한 종속을 심화시킬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미국은 그동안 FTA와 미통상법을 통해서 각국의 의약품 정책과 의료제도를 미국식으로 바꿀 것을 요구해 왔으며 이는 초국적제약자본의 이해를 그대로 대변하고 있다. 권미란 활동가는 이런 문제의 돌파구의 하나로써, 의약품 및 생명에 관한 보건정책, 제도는 무역협상 대상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지식에 대한 민중의 권리
진보네트워크센터의 오병일 사무국장은 “지식 문화 산업의 성장과 시장 자유화가 진행되면서, WTO와 FTA 협상에서 지적재산권이 갈수록 중요한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으며, 지적재산권의 국제적 규율은 각국의 법제도 및 지식․문화의 생산․소비 과정이나 민중의 기본권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주장했다. FTA에서의 지적재산권 조항은 WTO TRIPs를 기반으로 해서 그보다 더욱 강화하는 형태로 진행되고 있으며, 특히 2005년 체결을 목표로 진행 중에 있는 FTAA는 TRIPs를 포함한 전반적인 지적재산권 이슈를 포괄하고 있다는 점에서, 각국의 FTA 지적재산권 조항의 모델이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
기존의 지적재산권 관련 국제협정과 비교해 볼때, FTAA에서 새롭게 쟁점이 되고 있는 사항들은 ▲ 저작인접권자들에게 공중전달권 부여 여부 ▲ 일시적 복제를 “복제”의 개념에 포함시킬 것인가 ▲ 보호기간의 연장 ▲ 인턴세 도메인 네임의 상표권 보호 등 다양하다. 특히 FTAA에서는 각 권리에 대해서 TRIPs에서 인정하고 있는 것보다 보호기간을 더욱 확대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상표보호기간은 기존의 TRIPs에서 규정한 7년에서 10년으로 저작권의 경우는 저작자 사후 50년에서 70년으로, 자연인이 아닌 경우에는 95년으로, 방송사업자의 권리는 20년에서 30년으로 제안을 하고 있다.
오병일 사무국장은 FTA 지적재산권 규정이 국내에 미칠 영향에 대해서, 실제 법제의 개정을 통해서보다는 외국정부나 기업을 통한 ‘실제집행의 강화’에 초점이 맞추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이미 한국은 미국의 통산업력에 굴복하여 정보통신부 공무원에게 소프트웨어 불법복제를 단속하는 사법경찰권을 부여하는 세계에서 유례없는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또한 한국에서는 글리벡 이슈를 통해서 의약품 특허를 통한 건강권 침해의 문제, 인터넷 비즈니스 모델 특허의 도입으로 인한 인터넷의 자유로운 발전 제약, 디지털 도서관의 원격 접근 금지 등 여러 가지 사례들이 사회적인 문제로 대두하고 있다.
이렇듯 FTA를 포함해서 현재 체결되고 있는 지적재산권 관련 국제협정이 증가할수록 기술, 지식, 문화와 관련된 국내 상황에 맞는 적절한 정책을 시행하는 것이 앞으로 더욱 힘들어질 것이며 나아가 이러한 정책이 국내 민중들의 요구에 기반하여 형성되기 보다는 국제조약이나 협상에 더욱 기반하게 될 것이라고 오병일 사무국장은 꼬집었다.
“공격적 일방주의 성격의 스페셜 301조”
‘스페셜 301조 보고서에 관한 법률적 검토’ 발제를 맡은 정보공유연대 IPLeft의 남희섭씨는 스페셜 301조가 미국이 1988년 종합통상법을 제정하면서 1984년 개정법에서 적용되던 지적재산권 보호를 이유로 한 통상압력의 내용을 크게 강화한 조문을 말한다고 설명했다. 또한 스페셜 301조는 미국의 해외시장개발정책을 규정하고 있는 일반 301조를 그 근간으로 삼고 있으며, 외국정부에 대하여 협상과 수정을 요구할 수 있고 만약 미국이 만족할만한 타협을 얻어내지 못한다면 보복조치를 의무화한 법이라고 덧붙였다.
외국의 정부기간과 국제기구는 물론 미국 내 학자들까지도 301조에 대해서 상당히 비판적인 입장이다. 이들은 301조가 실제 미국의 외국 무역관행을 재판대에 올려 불공정여부를 심사하고 판결을 내리는 ‘판사이자 배심원이며 또 그 결과까지도 시행하는 사형집행인’의 1인 3역을 동시에 담당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있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의 2002년 보고서는 이런 비난들이 ‘공격적 일방주의’라는 표현에서부터 ‘부패하고 뇌물을 받는 위협수단’이라는 표현에 이르기까지 강대국 논리의 상징으로서 부정적 의미로 때로는 잔인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번 토론회에서 FTA와 지적재산권 문제에 대한 대응책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논의가 진행되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번 토론회는 그동안 가시화 되지 못했던 FTA의 지적재산권 관련된 조항의 문제점을 사회적으로 공론화 시키고, 이와 관련된 투쟁 과제 및 토론의 근거를 제시한 첫 번째 토론회였다는 점에서 중요하다고 하겠다. 민중의료연합, 정보공유연대 IPLeft, 진보네트워크는 앞으로 대응팀을 꾸려 구체적인 대응책을 마련해 나갈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