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 백기완 선생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셨다

개성공단은 자본주의 원시 축적단계 들어갔나

백기완 선생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셨다. 지난 22일 남북정상회담이란 말을 호되게 꾸짖으시면서 ‘뚝샘들의 만남’으로 바꾸라는 충고는 단순한 말바꾸기 놀이가 아니었다. 남북의 두 정상이 과연 온 몸이 물이 되어 메마른 땅을 적시는 생명의 ‘뚝샘’이 될 수 있을까?

몇 주 전 우연한 기회가 되어 개성공단을 찾았다. 북한 노동자들이 6만 원 정도의 월급을 받으며 일하는 로만손 공장 안 작업실 복도에 쌓여 있는 ‘QC'라 적힌 서류 뭉치들이 눈에 들어 왔다. ’QC'. 말 그대로 ‘품질관리’ 아닌가. ‘품질관리’라는 단어뿐일까? 자본주의 아래에서 쓰이는 경영기법이 북한 노동자들 작업장에까지 스며들었다. 개성공단은 작년 생산량이 1억6천6백 달러였고 2012년이면 200억 달러에 이를 것이라 한다.

개성공단 사업 구상을 설명하던 아리따운 북한 여성의 입에서 투박하면서도 감칠맛 나는 목소리를 따라 자본주의 사회에서 익숙한 단어들이 튀어 나왔다. 2천만 평 규모로 조성될 개성공단 주변은 여전히 메마른 땅이었다. 자본의 세례를 아직은 덜 받아 공기가 오염되어 있지 않은 덕택으로 햇살은 따가웠지만 후덥지근하지 않았다. 개성공단 주변을 흐르는 자그마한 실개천으로 개성공단이 과연 뚝샘의 공단이 될 수 있을까? 얼마 남지 않은 미래에 이 메마른 땅으로 자본의 물줄기가 도도하게 흘러갈 예정이다.

북한 노동자들이 ‘화장실’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남한 사람들이 ‘위생실’이라는 말을 쓸 정도로 남북이 돈독해졌다는 말과 함께, 얼마 전 북한 노동자들과 임금협상을 했다는 말도 들었다. 현대 측은 1년에 5%로 임금인상 폭을 정해 놓았다고 하면서 중소기업가들의 투자를 독려했다. 임금인상 걱정하지 말라고. 6만 원 정도의 월급에 5% 임금인상이라, 개성공단은 바야흐로 자본주의의 원시적인 축적 단계에 들어간 느낌이었다. 주당 노동시간은 55시간이라는 말도 들었다. 현재 북한화폐 시세로 6만 원이나 되는 큰 돈을 받는데, 장시간 저임금 노동이라는 말은 개성공단 북한 노동자들에게 어울리지 않는 단어 같았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개성공단에서 생산되는 상품들은, 또 어디로 흘러가 경제적인 불평등을 야기시킬 것인가? 북한 인민군 장교급들이 많다는 개성에 남북한이 공단을 내어 주고 받은 것은 북한 인민들을 배제한 또 다른 특혜 아닌가? 그렇다면 개성공단은 뚝샘이 공단이 아니지 않은가? 과연 이런 식으로 해서 백기완 선생님의 말처럼 온 천지에 희망이 넘치는 누리하제의 세상이 올 것인가?

현지 인민군의 소개말처럼 여인이 길게 누워 있는 형상을 닮았다는 송악산을 바라다보면서 개성공단 주변으로 자본의 징후가 느껴졌다. 이 명박 한나라당 후보가 말한 대로 북한의 1인당 GNP가 3천 달러가 된다면, 이건 또 무슨 뜻일 것인가? 북한도 남한처럼 토건국가로, 자본국가로 서서히 발걸음을 내딛을 것이라는 뜻인가? 금강산을 구경 다니는 남한 관광객들이 북한의 땅을 보러 다닌다는 풍문이 그저 풍문일 것인가? 북한 땅마저 투기와 자본의 식민지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 백기완 선생의 말대로 북한의 개혁 개방이란 말은 우리 자신의 주체적인 발화가 아니라 부시의 입을 빈 간접화법이다.

개성공단이 우리 입장에서 나오는 주체적인 발화의 대상이 되려면 어떤 전제조건이 필요할까? 6자회담의 한계 안에 갇혀있는 노무현정권의 한계를 돌파하면서 정전협상을 종전협상, 평화협상으로 변화시키려면 어떤 작업이 먼저 필요할까? 개성공단의 자본화, 더 나아가 북한의 자본주의화가 전제된다면 그것이 가능할 것인가?

그러나 그것보다 더 먼저 전제되어야 할 것이 있다. 한반도의 평화체제를 옥죄고 있는 지구적인 차원의 문제, 즉 한미자유무역협정이 그것이다. 한미자유무역협정이 파기되지 않는 한 한반도의 평화체제는 요원해 보인다. 개성공단을 방문하던 날 검은 선글라스에 빨간 셔츠를 입은 김현종이 동반했다. 남북자유무역협정 사전정지 작업을 하러 나타난 것처럼 여겨졌다. 점심시간 북한 사람들과 식당의 다른 홀로 들어가는 김현종을 보면서, 아뿔사, 무슨 남북정상회담이란 말인가! 하는 생각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미국이 반대하는 개성공단 원산지 규정을 김현종이 해결하러 온 것은 아닐 터였다.

그렇다면 10월 초에 있을 남북정상회담이란 뚝샘들이 만나자는 것이 아니라, 개성공단의 자본화를 통해 북한을 미국의 입맛에 어울리는 남북자유무역협정의 테이블로 끌고 나오려는 것 아닌가? 한미자유무역협정은 개성공단, 동북아평화체제 구축을 감싸고 있는 두터운 외피다. 그 외피를 벗어던져 동해 바다에 버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