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공 청문회장에서 류찬우 전 풍산 회장을 질타하는 당시 노무현 국회의원 |
노조원들은 회사의 일방적 근무형태 변경으로 임금이 줄자 준법투쟁을 벌였다. 경찰과 회사는 새롭게 뽑힌 민주노조의 싹을 자르기 위해 온갖 짓을 다했다. 노조지부장 선거유세에 참가한 노조원에게 무노동 무임금을 적용했는가 하면 선거관리위원장을 정직시켰다. 회사는 노조가 파업도 하기 전에 전면휴업해 버렸다. 당시 부산의 대표 인권변호사, 이흥록 변호사가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경찰서장, 공장장, 안기부(국정원), 동래구청, 소방서, 세무서까지 총동원된 관계기관 대책회의만 수차례 열렸다. 관할 경찰서장과 보안과장은 한 술 더해 노사교섭장까지 들어와 노조간부를 협박했다.
부산 동래공장 진압 직후 노동자들은 부산대학교에서 농성을 이어갔다. 전노협 부산양산노련은 며칠 뒤 전열을 추슬러서 부산지역의 노동과 시민사회단체를 망라해 부산대 넉넉한터(운동장)에서 풍산 동래공장 살인진압규탄집회를 열었다. 당시 집회 땐 지도부들이 무대 위에 철제의자를 한 줄로 놓고 앉았다. 부산 민변을 대표해 문재인 변호사도 앉았다. 그 옆에 정의헌 부산노련 의장(전 전비연 공동의장)이 앉았다. 집회 중간쯤 군중 속에서 남연모 풍산금속노조 동래지부장이 무대 위로 뛰어 나왔다. 진압현장에서 가까스로 피신한 남 지부장은 경찰의 감시망을 뚫고 마이크를 잡았다. 노동자들의 뜨거운 박수가 이어졌다.
그 순간 정의헌 의장은 문 변호사로부터 귀엣말을 들었다. 정 의장이 기억을 정리하면 대충 이렇다. “우리 노변(당시 노무현 변호사의 애칭)께서 풍산의 자문변호사라서 저희가 이번 사건의 사측 변호를 맡을 수밖에 없습니다. 양해해 주세요.” 노무현 변호사는 78년 판사 옷을 벗고 변호사로 전업해 80년대 법률사무소 대표변호사가 돼 문재인, 정재성 변호사 등 후배 변호사들을 기용, 인권변호사로 날렸다.
장면을 바꿔보자. 88년 하반기 여소야대 정국은 ‘5공 청문회’를 만들었다. 당시 증인으로 불러 나온 이들은 전두환 장세동 등 5공 실세와 전두환 정권에 거액의 정치헌금을 바친 정주영, 류찬우(풍산금속 창업주)씨 등 재벌회장들이었다. 의원들은 워낙 거물인 증인들을 함부로 다루지 못했다. 그러나 당시 초선이던 노무현 의원은 청문회장에서 전두환 증인에게 명패를 집어던지며 호통을 쳐 청문회 스타가 됐다. 5공 청문회가 정치 신인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만든 일등 공신이다. 풍산의 류찬우 회장은 재계의 미국통이다. 노무현 대통령 방미의 전초전 성격으로 한국을 찾은 아버지 부시 전 대통령은 류 회장을 이어 풍산을 맡은 둘째 아들 류진 회장과 만나 담소를 나누기도 했다. 류진 회장의 부인은 5공 때 안기부장과 국무총리를 지낸 노신영 전 국무총리의 딸이다. 류진 회장의 형은 박근혜 전 대표의 동생 박근영씨와 결혼하기도 했다.
노무현 의원은 5공 청문회장에서 류찬우 회장에게 이렇게 질타했다. “절대권력을 가진 권력에겐 5년 동안 34억 5천만 원이나 늘름늘름 갖다 주면서, 내 공장에서 내 돈 벌어주려다 (폭발사고로) 죽은 노동자에게 3천만 원, 8천만 원 주니 못주니 하면서 싸우는 게, 그것이 기업이 할 일입니까. 답변하십시오.” 청문회장에서 자신이 질타했던 재벌의 변호를 맡은 인권변호사. 그것도 자신이 지적했던 그 노동사건의 회사측 변호를 맡다니. 물론 당시 노무현 변호사는 국회의원이라서 직접 풍산사건을 담당하진 않고, 그의 법률사무소에 소속된 문재인 변호사가 줄곧 사측 변호를 맡았다.
민주화위원회는 지난해 10월 31명의 풍산금속 해고자를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했다. 위원회는 관련법에 따라 지난달 복직을 신청한 29명의 복직을 풍산 측에 권고했다. 풍산은 여전히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동래지부 부지부장으로 해고됐던 김영일 동지는 “이후 2년을 끈 재판에서 우리는 문재인 변호사 이름만 들어도 치가 떨린다”고 했다.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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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호 님은 전국공공노동조합 교육선전실장으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