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철거민의 목숨을 앗아간 용산참사가 있은 지 꼬박 2년이다. 혹자는 용산참사가 다 해결되었다고, 그저 안타깝게 희생된 망자의 넋을 기리고 추모하기만 하면 되는 것 아니냐고 말한다. 어떤 철거민은 용산을 ‘잘 합의된’ 선례로 기억한다.
하지만 전재숙 씨에게 용산참사는 ‘오늘’ 벌어지고 있는 ‘참상’이다. 망자는 떠났지만 ‘가려진 진실’이 그의 아들 이충연 씨를 감옥에 가뒀기 때문이다. ‘아비를 죽인 살인자’. 그의 아들에게 들씌워진 그 무겁고 참담한 죄목을 벗겨내기 위해, 용산참사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 그는 지난 1년 노구를 이끌고 거리를 무던히도 누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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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7일, '용산참사 2주기 범국민추모기간 선포 기자회견'에 참석한 전재숙 씨 |
유가협에 나가면서 참사가 그에게 남긴 상처도 많이 치유됐다고 한다. “세상 사람들하고 만나면 내가 진상규명을 꼭 해야 한다고 이야기하면 이해를 못해요. 내 동기간이이어도, 같이 일 겪지 않은 사람은 멀어지고 이웃도 없어요. 우리는 없어요. 그런데 유가협에 가면 다 나와 같은 아픔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라 이 사람이 어디가 아프고 어디가 가려운지 다 알아요. 그래서 함께 있으면 마음이 참 편안해요. 그 사람들이 우리 식구죠.”
유가협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나 철거민 투쟁 현장 같은 곳에 지지방문을 갈 때는 꼭 따라나선다. “아버지가 다 같이 살고 싶어서 외치다 망루에 올라서”이기도 하고 “지금도 버젓이 자행되고 있는 용산 탄압을 알리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때로 힘이 들기도 하지만 힘들다는 말을 좀처럼 입 밖에 내지는 않는다. 그에게는 그것이 ‘더 힘들지도 모르는 동료에 대한 배려’이다. 그래도 정 힘들 땐 병원을 찾는다.
“원체 아파서 못 견디겠다 싶으면 전에 영안실에 있을 때부터 유가족들 돌봐주시던 의사선생님들이 있어요. 우리 얼굴만 보면 어디가 아픈지 안대요. 거기 찾아가서 침도 맞고 약도 먹고 그래요. 가면 선생님이 ‘원체 죽겠으니 오셨구만요’ 그러죠. 사실 우리한테는 좋은 분들이 너무 많아서 아프다 소리 하면 안 돼요. 그분들이 있었기에 우리가 여태까지 살아왔잖아요.”
“용산은 끝나지 않았기에, 나는 아직 용서할 수 없어요”
그에게 용산참사가 여전히 ‘진행 중’이라는 것을 모르는 이들은 섣불리 그에게 용서를 요구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에게는 어떤 용서도, 화해도 아직 이르다.
“한 기독교단체에서 송년회할 때마다 유가족들을 초대해요. 지난 11월 말에도 초대를 해서 갔죠. 그런데 그 자리에 용산참사 때 죽은 경찰관 아버지가 와 있는 거예요. 그 단체에서는 우리를 자꾸 화해시키려고 해요. 그날도 서로 이해하고 용서하라고 손잡으라고 하더라고요. 하지만 그 아버지가 죽인 게 아니라도, 용서가 안 됩니다.”
그 아버지가, 아들인 그 경찰관이 미워서가 아니다. 그들 역시 이 정부의 또 다른 ‘희생양’이라는 것을 전재숙 씨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사실 그 사람들이 무슨 죄가 있겠어요. 누구 죽이려고 간 사람도 아니고, 위에서 시키니까 그랬겠죠. 하지만 우리는 아직 진상규명도 못하고 있어요. 이 사람들이 왜, 어떻게 죽었는지는 알아야죠. 1, 2층에 내려왔던 사람들이 죽어서 옥상에 가 있어요. 이해가 안 되잖아요. 그걸 못 밝히고 우리 아들과 동지 여덟 사람이 중형을 받았어요. 제 아들하고 남경남 의장만 서울구치소에 있고 다른 사람들은 지방으로 다 보냈어요. 경찰관은 공무 중에 죽었다고 나라에서 인정해준 사람이잖아요. 우리는 죄인이 되고 그 사람은 죄인이 아닌데 이런 상태에서 우리가 어떻게 그 사람을 용서해요. 그런데 용서 못하죠. 용서 못 해요…. 나중에 진상규명이 다 되고 억울한 누명 벗겨지면, 그때는 용서할 수 있겠죠.”
진상규명이 이뤄지기까지 얼마만큼의 시간이 걸릴지는 누구도 모른다. 그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전재숙 씨는, 진실이 ‘언젠가는’ 반드시 밝혀지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
“오래 걸릴 수도 있는데… 우리 아들이 감옥에서 나오기 전에 밝혀질 거라고는 생각 못하겠죠. 이명박 정부 하에서는 기대할 수도 없는 거니까요. 하지만 얼마가 걸리든 밝혀야 하고 밝힐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있죠. 이번에 안 되면 다음 정부에, 안 되면 또 다음 정부에….”
“용산 열사들의 이야기는 반드시 역사에 남을 거예요”
“사실 나는 2주기라고 해도, 벌써 2주기가 됐나 싶어요. 1년도 안 된 거 같은데….”
조심스레 2주기를 입에 올린 전재숙 씨는, 아들과 함께 남편의 2주기를 지내지 못하는 것을 못내 아쉬워했다.
“막내도 옥 안에서 마음이 힘들 거예요. 막내라면 끔찍히 아끼던 아버지 2주기인데. 아버지가 거기를 같이 올라갔던 것도 ‘막내만 올려 보낼 수가 없다, 내가 가야지’ 해서 올라갔던 거니까요. 잠깐이라도 나올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근데 정부가 그런 걸 허락을 안 하니까.”
남일당 건물을 지키지 못한 것도 그에겐 ‘한’으로 남았다. 그에게 남일당은 반려자 이상림 씨를 잃은 ‘아픔의 장소’이기도 하지만 남편이 가족을 위해 마지막까지 지키려 했던 삶의 보루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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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일, '용산참사 재발방지를 위한 "강제퇴거금지법" 제정 토론회' 장소에서는 부대행사로 '용산참사 열사 망루유품 및 망루물품 전시회'가 함께 열렸다. 토론회가 끝나고도 전재숙 씨는 전시되어 있던 이상림 씨의 유품을 바라보며 한참동안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
“다른 유족들은 그분들이 망루에서 돌아가셔서 그 꼭대기를 쳐다보기가 싫다고 그러는데 나는 안 그래요. 망루를 쳐다보면 마음이 편해요. 그분들이 그 자리에서 우리를 쳐다볼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있어서. 그래서 남일당 앞을 하루에도 몇 번씩 왔다 갔다 하면서 정말 안 보일 때까지 쳐다보고 그랬거든요. 근데 지금은 남일당 가 봐도 아무 흔적이 없잖아요. 마음이 너무 허전하고 착잡하죠. 남일당 철거한다고 문자 왔을 때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어요. 우리가 지키고 보존해야 할 건물인데 그걸 못 지켰잖아요. 이제 어디다 뭐라고 말을 붙여야 될지 모르겠어요.”
“세금이나 꼬박꼬박 잘 내면 잘살 수 있는 줄 알고” 앞만 보고 열심히 장사만 하던 ‘아줌마’가 시퍼런 용역 깡패들, 심지어 정권과 ‘맞짱’ 뜨면서도 “무서운 게 하나도 없는” ‘투사’의 삶을 살게 되었지만 그는 남편도, 아들도 원망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원망할 수가 없어요. 식구들하고 살고 싶어서 올라간 사람들이지 식구들 버리려고 올라간 사람들이 아니거든요. 정부가 나를 이렇게 만든 거죠. 철거민들이 길바닥으로 내몰리는, 없이 사는 사람들에 대한 차별, 이걸 우리가 장례 모시기 전에 꼭 뒤집었어야 됐는데 그걸 못 하고 장례 모신 게 정말 한스럽죠.”
앞으로 남은 길은 지금까지 온 길보다 좀 수월할 수도, 혹은 더 힘들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이미 그런 것은 그에게 별로 중요치 않아 보였다. 그의 눈은 그보다 훨씬 높은 곳에서 훨씬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는 부끄럼 없는 삶을 산 사람들이에요. 우리 손자가 고등학교 1학년인데, 손자한테도 그런 얘기해요. ‘할아버지가 욕심이 있어서 돌아가신 게 아니다. 우리가 꼭 받아야 하는 걸 요구한 건데 이게 안 돼서 돌아가신 거다.’ 앞으로 둘째 손자가 태어나도 같은 얘기 할 거예요. 전 이 일이 언젠가는 역사에 남을 거라고 생각해요. 진상규명이 되고, 책임자도 처벌되고, 열사들의 업적이 재평가된다면, 법이 바뀌고 결국 이렇게 길 위로 내몰리는 철거민도 없어지겠죠. 그리고 ‘철거민들, 용산4구역 열사들이 그때 그렇게 외쳤기 때문에 세상이 바뀌었다’고 역사에 남겠죠. 지금은 어렵고 힘들어도 진실은 꼭 밝혀지리라고 생각해요. 손자가 태어났을 때 그런 역사책을 갖고 공부할 수 있으면 정말 좋겠어요. 그걸 바라고 살아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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