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홍대 어머님, 아버님을 지지하지만 이를 ‘운동이나 투쟁’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싶지 않아하는 사람들이 있다. 배우 김여진 씨도 자신의 지원을 운동이라는 말로 표현하기를 부담스러워했다. 이러한 사람들은 농성장에 찾아오면 아마 어리둥절할 것이다.
[출처: 참세상 자료사진] |
이제 어머님, 아버님들은 아침 인사도 곧잘 ‘투쟁!!’으로 외치고, 투쟁가를 흥얼거리며 깔깔깔 웃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보다도 활기찬 목소리로 비정규직 철폐를 외치고, 빨간 조끼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어머님, 아버님들을 당신은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자신을 지지하는 것과 민주노총 노동조합을 지지하는 것이 다르지 않음을, 노동조합을 하게 되면서 나의 삶이 얼마나 달라졌음을 열정적으로 이야기하는 그들을 당신은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23일간의 농성으로 홍익대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나의 권리를 찾는 것과 투쟁이 떨어질 수 없음을, 또 그것의 즐거움과 아픔을 배우고 있다.
노동조합을 만들 수 있는지도 몰랐고, 월급 75만원 받는 게 부끄러워 월급명세서도 찢어버렸던 그녀들은 ‘무시당하고 힘들어도 말할 데가 아무데도 없었는데, 이렇게 속 시원히 이야기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 ‘학교 말을 무조건 잘 듣는 게 아니라 같이 일하는 사람들끼리 똘똘 뭉쳐야 산다는 걸 진짜 알았어’ 라며 열심히 이야기하신다. 농성을 하면서 얻는 새로운 경험도 많다. ‘예전에는 미대 입시 때나 다 같이 얼굴을 봤는데 이렇게 모여서 수다도 떠니 누가 언니고 동생인지도 알고 이름도 알고 좋지~’
나의 권리를 찾는 방법을 배우는 과정은 누가 멋진 말솜씨로 선동한다고 완성되는 것이 아니었다. 20일이 넘게 농성을 진행하고, ‘투쟁’이라는 것을 이어가는 그들은 민주노총으로부터 몰랐던 지식을 들으며 스스로 고민하고, 함께 싸워보기로 결정했다. 이를 두고 순수한 어머님, 아버님과 이들을 선동한 외부세력 민주노총을 분리하는 것은 오히려 어머님, 아버님의 고민을 간단히 무시하는 것과 같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홍익대 분회 사무장님은 이제는 웃으면서 고백하기를 ‘농성하는 건 하겠는데... 동지나, 투쟁이라는 말은 안 쓰면 안되냐’고 말하기도 했었다. 투쟁가와 구호 외치기도 어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가사를 보고 음정 틀리며 따라 부르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쉬는 시간에 다 같이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며 깔깔거리고, 화장실 갈 때도 투쟁가가 생각난다며 웃으신다. 하지만 익숙해진 것은 구호나 투쟁가 뿐만은 아니었다. 지지방문을 오면 찾아온 분들에게 너도 나도 자신이 하셨던 일이 얼마나 고되고 힘들었는지, 학교의 대우가 얼마나 나빴는지에 대해 이야기하셨던 노동자분들이 이제는 투쟁을 하면서 무엇이 바뀌었는지, 노동조합이 얼마나 중요한 지에 대해서 열변을 토하신다. ‘예전에는 사람들 앞에 서는 게 무서워서 직장도 그만뒀는데 마이크 잡고 이야기도 잘하고.. 뭐 이렇게 되버렸네?’ 하고 웃으시는 사무장님의 표정이 뿌듯하다.
[출처: 참세상 자료사진] |
홍익대 총학생회장의 마음이 결국 학교 측의 편을 들어주는 식으로 비춰진 것은 그가 주장하는 것처럼 언론의 왜곡보도 때문이 아니다. 홍익대학교는 계약해지 된 노동자들이 아무리 하소연해도 무시할 수 있을 만큼의 힘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힘의 차이는 근본적으로 대화가 불가능하게 만드는데, 이를 두고 투쟁보다는 대화가 필요하다고 말한다면 결국 투쟁할 수밖에 없는 노동자들의 입을 막는 효과를 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홍익대 총학생회장을 연민하거나 욕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한 어머님 아버님의 목소리와 외부정치단체의 목소리를 가르는 논리’가 왜 잘못되었는지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해야 한다. 비운동권으로 뽑혔기 때문에 마음 놓고 투쟁하는 노동자들을 지지할 수 없었던 총학생회장의 번뇌는, ‘비운동권 학생회’의 논리가 ‘틀렸다’는 결론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 싸움이 어떻게 끝날지 점칠 수는 없지만 언젠가는 사람들의 관심도 줄어들고, 농성하고 있는 노동자들도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다. 싸움에서 이기든 지든 이 땅에는 여전히 언제든지 계약해지 될 수 있는 열악한 일자리에서 소중한 노동을 하는 사람들과 이를 더욱 확산시키려는 정부와 학교/기업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머님, 아버님’으로써만이 아니라 자신의 일에 대한 권리를 요구하고 그것이 나 뿐만 아니라 다른 비정규직을 위한 일임을 깨달을 수 있었던 ‘노동자’로서의 경험을 한 홍익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삶은 이전과는 분명 달라질 것이다. 홍익대 투쟁에서 우리가 배워야할 것은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은 부조리한 삶의 현실 한 구석에서부터 시작하는 실천이라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