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담배다. 조선족 이주노동자 김치성(가명) 씨가 웃으며 검은 비닐봉지를 내온다. 권련지라 불리는 종이를 펼쳐 담뱃잎을 넣고 익숙한 솜씨로 손가락 누르며 담배를 만다. 중국서 둘째 아들이 보내준 담배. 필터가 없어도 순하고 맛이 좋단다. 익숙하지 않은 풍경에 눈이 동그래지는 한국인을 향해 웃음 연발하던 김 씨가 하얀 연기를 내뿜는다.
창문형 컨테이너박스 안은 그새 연기로 자욱해졌다. 컨테이너박스를 반으로 나눠 2.5평 남짓한 이곳은 김 씨가 고된 일을 마치고 먹고 자는 집이다. 이주노동자 20여명, 한국노동자 50여명이 옹기종기 모여 일하는 회사. 이주노동자에겐 일터이자 컨테이너박스 기숙사가 있는 삶터였다.
[출처: 미디어충청] |
컨테이너박스 한 채 나눠 2.5평 방 두 개
유일한 냉장고... 전기온돌판넬, 전기난로, 전기곤로
설 연휴, 일하는 사람 없는데도 식품가공공장이라 그런지 불쾌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공장밖 길가 맨홀 뚜껑을 누가 훔쳐갔는지, 밤이면 더 위험하겠다 하는 찰나, 김 씨가 슬리퍼를 신은 채 뛰어나와 박수 한 번 치고 두 팔 벌려 맞아준다. 위를 올려다보니 공장 옥상 두 쌍의 컨테이너박스 사이에서 조선족 이재성(가명) 씨가 두 팔을 흔든다.
공장에 들어서자마자 눈에 들어오는 옥상 컨테이너박스 4채. 번호가 붙여진 박스는 반으로 나뉘어 어느덧 8개의 방을 만들었다. 지상에도 번호가 붙여진 6채의 박스가 12개의 방을 만들었다. 누가 이사를 오고, 누가 떠났을까. 이곳에서 일년 반째 일하는 김 씨가 오기 전부터 번호 붙여진 컨테이너박스는 이주노동자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 방에 1~2명이 살아요. 여기는 컨테이너 시설 이용료를 따로 내지 않아요. 월 4~5만원 내는 곳도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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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씨의 방은 서랍장을 대신하는 풀지 않은 짐가방, 바람을 막기 위해 똑바로 자른 종이박스가 붙여진 창문 하나, 벽에 걸린 옷가지와 함께 온통 주어온 물건들로 꾸며져 있었다. 침대 매트, 텔레비전, 옷걸이, 오래된 노트북, 작은 상... 냉장고도 있었는데, 컨테이너박스 기숙사에서 유일하게 한 대 있는 냉장고였다.
“냉장고가 없었는데, 회사에서 버린다고 해서 가져다 놓은 거예요. 사람들이 다 같이 쓰죠. 화장실 이층에 하나 있고, 저 쪽으로 가면 샤워할 데 있어요. 세탁기는 한 대 있었는데 한 대 더 가져왔어요. 그 전에는 내내 손빨래 했죠.”
알뜰한 김 씨의 방은 따뜻했지만 위험하고 위태로워 보였다. 바닥에 깔린 전기온돌판넬, 전기난로, 구불구불 벽을 따라 붙여 놓은 전선줄... 사람은 다치지 않았지만 밑에 괴어 놓은 벽돌로부터 옥상 컨테이너박스가 쓰러진 일도 있었다. 바람이 많이 분 날이었다.
“불편한 거? (식품)냄새 많이 나고 여름에 더운 거... 다 각오하고 온 거죠. 어드메 내 맘대로 되는 게... 돈 벌러 와서... 웬만한 거 하나 하나 다 따지면 한도 끝도 없고... 뭐 먹여주고, 재워주고 고맙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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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두 해 먹으려면 판떼기라도 있어야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물량 따라 일해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최저임금 받으며 일하고, 아침 7시에 출근해 ‘물량 따라’ 일한다. 이들은 채 2분도 안 걸려 일터와 집을 오간다. 마치 7~80년대 어린 여성노동자들이 눈 뜨자마자 구로공단과 벌집을 오갔던 것처럼.
“보통 10시간 일해요. 100만원 받아요. 여름에만 일이 많은 데 새벽 2~3시까지 일해요. 그때는 하루에 한 시간 자나 마나 하는 것 같아요(웃음). 5월에 180만원, 6월에 200만원, 7월에 240만원 받았어요.
한국말을 잘하는 김 씨를 통해 계속 자리를 지키던 30대 이 씨에게 물어봤다. 한국말와 중국말이 오간다.
“처음에는 일 하는 게 힘들었어요. 이제 습관이 된 것 같아요. 돈 많이 벌었냐고요? 아니요(웃음).”
밥은 회사 식당에서 하루 세끼 먹는다. 그러나 출근하지 않는 일요일과 공휴일이 문제다. 식당문이 잠기기 때문에 밥을 해 먹어야 한다. 타국으로 돈 벌러 와 주방용품 하나 하나 사며 돈 쓸 수도 없고, 컨테이너박스에서 가스버너를 쓰다 불이라도 나면. 반가운 얼굴로 옆방에서 건너온 조선족 여성노동자와 남성노동자가 한국말로 거든다.
“가스레인지만 쓴다고 식당 잠그지 말라고 해도 소용이 없어요. 식당에서 일하는 사람이 위에서 잠그라고 했다고. 할 말이 없었어요. 그래도 가스레인지는 써야 뭘 해 먹지... 한국사람 같이 먹을 때는 반찬도 다 있고, 식당에서 먹을 수 있는데. 우리만 있을 때는... 우린 사람 취급 안 해요.”
“방에서 해 먹는 건 불편해요. 불안해요. 별로 못 해 먹어요. 조리기구도 없고. 만두라도 해 먹으려면 판떼기라도 있어야... 1년에 명절이 몇 번이라고... 구정, 추석 두 번인데.”
유일하게 이 씨의 방에 전기곤로가 두 대 있다. 이 씨의 방은 이주노동자들이 다 같이 먹는 음식을 만드는 주방으로 변신한다. 깔끔한 방 한 쪽에는 설거지를 마친 냄비, 후라이팬, 뒤집개, 수세미가 플라스틱 통에 담겨있고, 계란 한 판과 잘 다듬어진 대파가 선반 위에 놓여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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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아들도 나처럼 한국에서... 희망은 어드메에
설날을 하루 앞둔 밤, 이주노동자들이 컨테이너박스에 모여 술 한 잔 하기로 했다. 벌써부터 손님 대접한다고 한 상 차렸다.
“설은 중국 최대 명절이예요. 가족들 고향으로 다 모여 물만두, 물고기, 돼지고기, 소고기 맛있는 거 다 해먹어요. 저는 생선회를 제일 좋아해요. 하하하.”
50대 조선족 김 씨는 돈도 돈이지만 한국 땅을 밟아보고 싶었다. 20년 전부터 그랬단다. 컨테이너박스에 사는 이주노동자로 한국땅을 밟았어도, 한국의 ‘발전’이 대단한 것 같다고 칭찬한다. 중국의 개발 속도도 놀랍다고 말한다. 무엇과 누구를 위한 발전과 개발일까? 김 씨의 가슴속에 있는 한국과 중국은 노동자인 그의 두 아들이 있는 곳이다.
“큰 아들은 지금 한국 방직공장에서 나처럼 일해요. 작은 아들은 중국에서 날품팔이 하고. 전화하고, 인터넷으로 얼굴 보고. 편지 보내고. 내년에는 집에 한 번 가야죠. 여기 와서 맞는 구정 이번까지 네 번이예요. 마음이 좀... 섭섭하고. 할 수 없지 뭐. 손자손녀 보고 싶어요. 손자 세 명, 손녀 한 명이예요. 아들이 둘 다 결혼했어요. 아들 결혼 한 달 앞두고 한국에 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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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조선족 이주노동자들이 왁자지껄해졌다. 조선말과 달리 한국말이 많이 바뀌어서 어렵다는 것이다.
“한국어 많이 바뀌었어요. 받침이 틀려요. 받침이 많아져서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새별-샛별, 장마비-장맛비. 그리고 한국말에 영어가 많아요.”
김 씨가 말할 때 마다 어드메, 어드메 하는 게 국적 불명의 외래어와 신조어의 홍수속에 파묻혀 잊혀진 한국말의 맛과 멋이 살아있어 더욱 정겹다.
동생 학비 벌러 서울로 올라온 10대 여성노동자의 애환과 노동의 고통이 서려있는 가리봉동 벌집. 그녀들이 떠난 자리를 대신하듯 컨테이너박스 벌집을 채운 이주노동자. 희망은 어드메에 있을까. (기사제휴=미디어충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