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실만 보면 가고 싶은 습관 생겼어요”

천막에서 봄 맞는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키스티) 비정규직

10년 넘게 일했지만 하루아침에 집단으로 쫓겨난 시설관리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있다. 매일 밤낮으로 출근하던 직장 문 비밀번호는 어느새 바뀌어버렸고, 20미터 거리 화장실마저 못 가는 신세가 되었다.

“이상한 습관이 생겼어요. 카이스트로 화장실을 가는데, 멀어서 참는 게 반복되다 보니까 화장실만 보면 가고 싶어지더라고요”


불확실한 미래, 악소문

대전 유성구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키스티)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연구원 앞에서 천막농성을 시작한 지 벌써 두 달 반이 넘었다. 안 그래도 ‘주주야비’, 주간-주간-야간-비번을 반복 근무해 가족들이 항상 걱정했는데, 농성 한다고 집에도 못 들어가고 있다. 마흔 한 살에 아내가 첫 임신을 해 9월 출산을 앞두고 있는데, 아내에게 스트레스만 안기는 것 같아 부분회장은 미안할 뿐이다.

“아내는 그만두라고 하죠. 농성이라는 거 처음 해 보면서 불편한 것도 있지만, 미래에 대한 확신이 없어 심리적으로 불편한 게 제일 힘들죠. 기약 없는 싸움을 하는 거잖아요. 잠시 불편한 건 참을 수 있는데, 불확실한 미래, 생계에 대한 불안감이 가득해요”


정민채 분회장도 마찬가지다. 노조를 처음 만들며 같이 싸우던 동료 세 명이 ‘이 회사 정 떨어졌다’며 떠났는데, 두 명이 아직 일자리를 못 구했다. 키스티 비정규직 투쟁이 알려지면서 대전 지역 사업주들이 채용하길 꺼린단다. 법에도 노조를 만들 수 있다고 해서 만들었을 뿐인데, ‘투쟁 주동자’ 주홍글씨로 새겨진 사회적 낙인은 불편함을 넘어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이어진다.

“여기서 12년 근무했는데 다른 데로 취직하라고요? 만약에 투쟁 그만두고 다른 데 취직한다고 해도 잘 안 될뿐더러 내 12년 인생은 거짓말이 되어 버리는 거예요. 우리가 선전전하고, 투쟁하면서 돌아다니까 이미 대전 시민들도 알아요. 대전을 떠나 살까요? 이 일밖에 한 게 없는 데 자영업을 할까요?”

노조 활동도 처음, 투쟁도 처음인 그에게 덧씌워진 무성한 소문도 천막에서 잠을 자는 일보다 불편한 일이다.

“과천에서 투쟁 끝나고 우연히 휴게소에서 연구소 정규직 노동자를 봤는데 나와는 생각이 다른 것 같아요. 언제까지 이렇게 투쟁할 거며 키스티 욕 먹일 거냐는 거죠. 처음 투쟁하면서 회사는 비정규직이 키스티 욕 먹이는 짓 한다고 했어요. 그러면서 내가 원래 직장에서 일 할 생각이 없었다, 민주노총이나 진보신당 쪽 자리 하나 얻으려고 투쟁하는 거다 등등 소문이 무성했죠. 우리는 보호 받을 데가 없어서 찾다 찾다 억울해서 노조 만들고 공공연구노조에 가입한 건데... 심지어 비정규직이 연구소 안 기계 밸브를 조작해서 못 쓰게 만들고 나갔다는 둥 우리를 나쁜 놈으로 만드는 악소문이 무성했어요. 아내도 걱정이 많아요. 아내는 생계 문제도 그렇지만 내가 복직될 수 있다는 희망을 안고 사는데, 잘못되면 허망감에서 벗어나지 못할 까봐 걱정된 데요”

연구단지 내 첫 시설관리 비정규직노조...업체 변경으로 해고, 감시

비정규직은 연구소 임원 및 연구원들이 퇴근한 자리를 각 종 기계 설비를 정비하며 24시간 지켰다. 용접, 변전실 전기, 간단한 전기 배선 작업, 페인트칠, 냉난방설치 등 하는 일도 다양했다. 노동계는 ‘필수유지업무’라 불리는 일을 하는 노동자들을 정규직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회사는 업체를 통해 비정규직으로 채용했다.

1년마다 반복 계약을 하고, 일부 임금이 체불되는 열악한 노동 환경속에서 비정규직은 작년 10월 노조(공공연구노조 산하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분회)를 만들었다. 연구단지 내 첫 시설관리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노조 결성이다.

하지만 노조 결성 4달 만에 계약 만료로 집단 해고됐다. 키스티가 용역업체 변경을 통해 비정규직을 잘랐고, ‘나이스캄’ 신규업체가 개별면담을 통해 조합원 5명만 고용을 승계하고 나머지 8명은 1월 31일자로 해고 됐다. 새 업체가 비정규직을 전부 ‘고용 승계해야 할 의무가 없다’며 연구원 문 앞에 채용된 사람 명단을 붙여 놨고, 비정규직은 2월 1일 출근해서야 해고된 것을 알았다.

해고자 원직 복직, 비정규직 고용 승계를 주장하며 비정규직이 싸우기 시작하자 키스티 측은 지난 2월 노조와 노합원 5명을 상대로 ‘주거침입, 퇴거불응, 업무방해’ 혐의로 형사고소했다. ‘천막과 현수막 철거, KISTI가 조합원을 해고했다는 허위내용의 주장과 유포 금지’ 등을 내용으로 가처분도 신청했다.

“우리가 허위 사실을 언론에 제보 했다는 데 참... 재판이 진행 중인데, 태어나서 재판 처음 받아 봐요. 변호사도 처음 만나보고, 사측은 변호사를 둘이나 데리고 오더군요. 심문도 처음 받아보고, 경찰서에서 조사도 처음 받아봤는데 위화감이 들지 않았어요. 죄진 게 없기 때문이죠. 우리 싸움이 정당하니까 오히려 떳떳한 느낌이 들었어요”

노조도 나서 3월말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서를 넣었다. 이전 용역업체를 대상으로 노동부에 임금 체불 진정도 넣었다. 공공연구노조에 의하면 키스티 비정규직이 연간 환산 3,513시간 근무, 월평균 292.8시간을 근무하는데, 1인당 연장 및 야간 근로 수당이 매월 50여만 원씩 미지급되어 3년간 미지급된 임금이 1억4천여만 원에 이fms다.

“우리는 인권 침해를 당하고 있어요. 연구원 내 화장실, 노동조합 사무실, 은행, 매점 등 모두 출입을 못하죠. 연구원은 CCTV를 설치해 우리를 24시간 감시하고 있어요”


  '키스티 사태를 생각하는 카이스트 학생들의 모임'이 건 펼침막. 봄이 왔지만 사태는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키스티 비정규직 집단해고 사태 왜 길어지나?

이처럼 키스티 사측과 비정규직 노조의 갈등이 장기화되는 원인에 대해 조용국 공공연구노조 조직국장은 “연구단지 내 시설관리 비정규직 노조가 만들어지면서 간접고용 문제가 처음 제기되었다. 반노동정책으로 일관하는 이명박 정부 하에서 선례가 없던 일이고, 박영서 키스티 원장이 올해 연임을 한다는 얘기가 들리는데, 그와 맞물려 비정규직노조를 인정하지 않는 것 같다”고 전했다.

또 공공연구노조는 근본적으로 비정규직 노동자의 노동기본권이 보장․확대되어야 하고, 정부출연연구기관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노조가 분석한 자료에 의하면 2010년 10월 현재 기초기술연구회 13개 출연(연)에 1,709명의 기간제 노동자가 고용되어 있다. 2009년 비해 423명 증가, 2008년에 비해 483명 증가했다.

노조는 “키스티를 포함한 출연연 비정규직 노동자의 규모는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는데, 상시적이고 필수적인 업무에는 비정규직을 사용 제한해야 한다. 간접고용 노동자의 고용승계를 의무화해야 하고, 불가피하게 비정규직을 사용하는 경우에도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원칙이 지켜져야 한다”며 “위와 같은 방안이 시행되기 위해서는 정부의 의지가 있어야 하고 법과 제도가 변화되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기사제휴=미디어충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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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amomile

    인간답게 살자는데 집단해고 웬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