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정부는 IMF직후부터 국가산업 매각을 포함한 공기업 민영화를 전격 추진하기 시작했다. 한전, 석유개발공사 등 13개 정부 투자기관과 한국통신, 담배인삼공사, 가스공사 등 19개 정부 출자기관, 정부투자 출자기관의 123개 등 국가기간산업을 포함해 155개 기업을 민영화 하겠다는 방침이었다. 또한 정부는 1999년 1월 전력산업구조개편 기본계획, 1999년 11월 가스산업구조개편 기본계획, 2001년 3월 철도산업구조개혁 기본계획을 확정 발표했다.
이에 가스, 발전, 철도 3개산업 노동자들은 2002년 2월 25일 새벽 4시경, △국가기간산업민영화(사유화) 및 해외매각 방침 철회 △공공부문 인력감축 중단 및 인력증원, 노동조건 개선 등을 내걸고 무기한 전면 파업에 돌입하게 된다. 특히 발전노조의 경우, 38일간의 장기파업 투쟁을 전개하고 합의 없이 현장으로 복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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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개 산업 노동자들의 공동 파업은 정부의 국가기간산업 사유화 입법과 매각을 유보시켰다. 또한 2.25 투쟁은 한국사회의 신자유주의 본격화에 따른 공공부문 사유화 움직임의 전환점으로 작용했으며, 국가기간산업 사유화에 대한 사회적 의제를 분명히 제시했다는 성과도 남겼다.
2002년 당시, 국가기간산업 민영화 저지를 위해 38일간의 발전노조 파업을 주도했던 이호동 전 발전노조 위원장으로부터 10년 전 부터 지금까지 멈추지 않는 정부의 민영화 정책과 그리고 투쟁 과정 등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정부 정책에 따른 사유화 전선은 다시 부글부글 끓고 있는 활화산이 됐다”며 “노조가 과거의 투쟁의 한계를 극복하고 조직력과 투쟁 체계를 갖춰야 한다”고 당부했다.
2.25 투쟁 10년을 맞은 소감이 어떤가
2002년, 2.25 투쟁의 10주년을 맞으며 마음이 많이 무겁다. 당시 정부의 직접적인 민영화는 막아냈고, 사유화가 어느 정도 억제됐지만, 그 결과만을 놓고 기뻐 할 수만은 없는 게 현실이다. 이명박 정권 말기에 들어 KTX 사유화가 진행되고 있다. 화산으로 따지면 KTX 사유화가 추진되기 전, 사유화 저지 전선은 휴화산이었다. 하지만 KTX사유화를 계기로 전선은 다시 부글부글 끓고 있는 활화산이 됐다.
하지만 2006년 정부의 노사관계 로드맵과 비정규악법 통과 등 공공부문 현장의 유린으로, 공공부문 노조 운동의 힘이 후퇴하는 양상을 보였다. 투쟁을 조직하기는 했지만, 과거처럼 조합원들의 분노를 폭발시킬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를 만나지 못했다. 투쟁력이 약화되고, 조직력이 약화됐다. 때문에 이번 이명박 정권의 사유화 정책에 대응해 노조가 과거 투쟁 성과와 한계를 논의하고, 무엇을 반복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이를 제대로 대응할 수 있는 조직력과 투쟁 체제 완성 역시 중요하다.
10년 전과 지금의 정부 민영화 정책을 비교해 본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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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같은 방법이 이명박 정권에 들어와서 공공기관 선진화 방안으로 추진됐다. 인력감축이 나오더니 다양한 경영성과와 평가를 빌미로 기관장들의 옷을 벗기기도 하고, 현장에서 노동자들이 숨을 쉬기 힘들 정도로 노동강도가 강화되고, 민주노조를 옥죄거나 해체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당시 정부의 민영화 추진에 대한 여론은 어땠나
당시 정부는 일방적으로 민영화 찬성논리를 전파했다. 공기업의 비효율성을 집중 홍보하고, 공기업 철밥그릇에 대한 평가와 비효율성 극복이 주된 내용이었다. 그리고 여야 만장일치, 위원장의 직권조인으로 법률이 통과됐다.
노동조합을 포함해 운동진영의 광범위한 단위들이 반대주장을 했던 것은 아니다. 민영화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하고 있지만, 민영화 저지 전선이 약화돼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대중들의 경우, 전력 산업 민영화 문제는 피부에 와 닿는 문제다. 전기 없이는 세상을 살 수 없기 때문에 대중들은 한전 민영화가 어떤 결과를 초래하고, 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궁금해 하는 측면이 있었다.
그 후 3개 노조에서 파업에 돌입하고, 가스 복귀에 이어 철도가 복직한 후 발전노조 5,409명이 파업을 이어나갔다. 그 때 언론에서는 발전노조에 대한 집중 난타를 가해왔다. 임금인상을 위해 철밥통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파업이 일주일이 지나고 장기화 되면서 언론에서도 이에 대한 분석기사를 쏟아내기 시작했고, 여론의 반향을 일으키게 됐다. 연대 단위들이 붙어줬고, 민주노총과 금속노조가 연대파업을 결의하기도 했다. 그리고 나서야 전력산업 민영화에 대한 비판적인 분위기가 사회적으로 감지됐다. 파업 보름 이상 지났을 때 한길리서치 여론조사에서 민영화 반대의견이 86%까지 나왔다. 파업 초창기에 여론조사를 했으면, 민영화 찬성이 많았을 텐데, 그야말로 우리 투쟁이 여론의 반전을 만들어낸 성과였다. 노조와 운동진영의 계속적인 여론전으로, 민영화의 진실 역시 알려지면서 이후 국회도 움직이게 됐다.
노조는 어떤 방식으로 여론전에 대응했나
사실 민영화 사례는 옛날부터 있었고, 한국통신도 민영화 돼 버린 상태였다. 그 가운데 공공부문의 거대 3개 산업 노동자들이 민영화 반대를 걸고 공동으로 총파업을 한 것은 대단한 이슈가 됐다. 앞서 말했듯이 정부는 공기업의 비효율성을 집중 홍보했다. 비효율성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인력을 줄여야 한다는 식이었다. 당시 민영화 반대 목소리는 노동운동을 포함한 일부 지식인 뿐이었고, 나머지는 정부 정책에 찬동했다.
노조는 전력 민영화가 되면 요금이 오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집중적으로 여론화했다. 먼저 민영화 한 국가들의 선례가 있었기 때문에 이를 소개하고, 노조에서도 확신에 차서 얘기할 수 있었다. 조합원들은 선전을 통해 전력 산업 민영화가 전력 안정성을 해쳐 대란을 초래할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을 대중들에게 전했다. 파업은 노동자가 사회에 메시지를 던지기 위한 집단적인 행위다. 당시 우리는 ‘민영화 저지’로 요구를 압축시켜 여론화에 집중했다. 만약 다른 요구였다면 그런 정도로 여론을 환기시킬 수 없었다고 본다. 집중적으로 요구를 걸고 싸움을 하면서 여론의 반전이 수반됐다. 정부의 일방적인 논리 외에는 제공되는 것이 없다가, 노동자들이 자기 희생을 통해 민영화를 폭로하고 파업을 장기간 이어나가면서 여론의 대역전이 이뤄지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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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개산업 노조 공동투쟁 쉽지 않은 일이다. 과정은 어땠나
2001년 4월 철도에 먼저 민주집행부가 들어섰고 그 뒤 7월 발전도 민주노조를 설립했다. 하지만 아직 철도와 가스는 한국노총 산하였고 발전노조만 민주노총에 들어갔다. 때문에 민주노총에서 먼저 9월부터 사유화 저지 공투본 논의를 시작해 10월에 집회, 회의, 토론과 조직화 과정을 이어나갔다. 9월경부터 공동투쟁을 위한 사전 공정을 진행해 서서히 조직과 투쟁의 내용과 수위를 강화해 나가는 과정이 있었다. 결국 2월 25일에 맞춰 총파업에 돌입하는 것은 서로간의 결단이 필요했다. 당시 내부 조건도 상이했고, 민영화의 단계도 상이했다. 그런 상태에서 동맹파업을 한다는 것은 수준 높은 결의였다.
그 만큼 3개 산업 노조의 동맹파업은 대표적이고 역사적인 투쟁이다. 수 많은 사람들의 헌신도 뒤따랐다. 공투본에는 3개 산업 노조를 비롯해 7개 노조가 있었는데, 공투본에 참여했던 노조를 비롯해 이를 지원하기 위해 노력했던 동지들의 연대의 결실이었다.
파업까지 수위를 끌어올리게 된 계기는?
공투본은 민영화 저지를 위해 공동으로 투쟁하기 위해 만들어진 결사체였다. 하지만 2002년 정부가 민영화 강행을 발표하면서 파업까지 상정하게 됐다. 공동대응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2002년 새해 초부터 민영화 추진을 강행한 것이 투쟁의 수위를 올리게 된 직접적인 계기였다.
단순히 피켓팅이나 집회 정도로 정부가 민영화 정책을 철회 할 것이라 기대하는 건 말이 안됐다. 단위노조가 큰 파업을 해도 쉽게 철회할 수 없는 정책이었다. 최고 권력자나 관료들이 시대의 당위처럼 생각하고 있는 정책을 노동자들이 철회시키기란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파업에 돌입 했을 때도, 정부는 전력 민영화에 대해 논의조차 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때문에 민영화 철회 없이 파업 철회 역시 없다는 배수의 진을 치고 투쟁이 이어졌다. 투쟁이 장기화되고 희생이 커지면서 사회적 파장도 커졌다. 해고자 348명 발생했고, 정부와 발전사 사장들이 막판에는 파업대로 4000명을 전원 해고 하겠다며 압박을 했다. 결국 894명이 고소고발 되고, 손배소가 420여 억 원, 3800명에 대한 징계가 이뤄졌다. 그런 희생을 감수하면서도 전력 산업 민영화는 안 된다고 투쟁을 이어나갔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어마어마한 연대가 있었고, 파업에 참여한 발전노조 조합원들이 자기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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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합원들의 자기 확신이나 투쟁력은 어떻게 발생했나
조합원들은 민영화 저지를 역사적인 사명으로 느꼈다. 지금도 퇴직하는 선배들이 저에게 전화해 “내 인생에서 이 사회를 위해, 후배들을 위해 가장 멋지게 공헌한 것이 전력산업 민영화를 막은 것이고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이야기 한다.
결과적으로 당시 조합원들은 소위 투쟁의 목표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인식 정도가 아니라 자기 확신이 있었고, 요구와 목표를 자랑스러워했다. 저를 포함한 파업지도부에 대한 신뢰도 있었다. 발전 산업에서 104년만의 전국 규모의 첫 파업이었고, 지도부와 조합원이 혼연일체가 돼 파업을 결의했다. 예견된 투쟁이었기 때문에, 파업 선언에서도 “역사가 우리의 투쟁을 평가해 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라고 얘기했다.
기억에 남는 사건은?
대부분의 파업은 파업지도부와 대오가 분리돼 조합원들의 함성을 못 듣고, 열기를 못느낀다. 우리 역시 새벽 4시 20분에 명동성당에서 기자들 앞에서만 파업을 선언했다. 조합원들은 서울대에서 파업 전야제가 끝나고 파업 선언을 기다리다 지쳐 잠든 상태였다. 서울대 쪽 상황을 수시로 체크하는 간부들에게서 조합원들이 다 자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한참 웃었다.
그 이튿날 조합원들이 실컷 기다리다 잠에서 깨니 파업이 선언 돼 있는 상황이었다. 그리고나서 조합원들이 서울대에 집결해서 집회를 했고, 나는 명동성당에서 전화로 발언을 했다. 그 때 조합원들이 파업을 다시 선언해 달라고 하더라. 그래서 휴대폰으로 다시 한 번 파업을 선언했다. 그 때 휴대폰을 통해 귀에 들려오던 오천 조합원들의 함성이 무척이나 감동스러웠다. 대오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의 함성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