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들은 통합진보당 대표인 이정희 대표에게, 비례대표 순번 4번을 받은 정진후 후보의 공천 철회를 요구하고 있었다. 촛불집회라고 공지는 나갔지만 비가 오고 있어 초는 켤 수 없었다.
여기서 조금 떨어진 곳에선 자신을 숨기고 집회를 지켜보던 한 여성이 있었다. 그녀는 주룩주룩 내리는 가는 빗줄기에 몸을 감추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김모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였다. 사람들의 기억에 강하게 남아 있으면서도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수 없는 처지가 된 지 벌써 3년이 됐다. 그녀는 산채로 유령이 돼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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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6일 성폭력 피해자 지지모임과 잡년행동이 주최한 이정희 통합진보당 대표 선거사무실 앞 촛불집회 |
자신과 관련한 촛불집회인데도 누군가 알아볼까 불안했다. 자신과 연대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과 피켓을 보고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당장 뛰어나가 “제가 피해자입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힘내서 쓰러지지 않고 여러분들이 보내주신 이 크나큰 마음에 용기 잃지 않고 끝까지 하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촛불집회가 끝날 때까지 가급적 보이지 않게 있으려고만 했다. 그녀는 그런 자신이 싫었다. 집회 내내 자신에게 물었다. “무엇 때문에 너는 아직도 그렇게 나서지 못하고 있는 거냐.” 그 물음과 함께 예전 참교육을 위해 투쟁하며 씩씩하게 여러 사람 앞에 서있던 자신의 모습이 겹쳐 지나갔다.
학부모총회 때마다 “저는 전교조 조합원입니다”라고 자랑스럽게 말해왔는데...
2011년 5월 28일 전교조 수도권 교사대회가 열린 서울역 광장에 갈 때도 그랬다. 그녀는 지지모임이 선전지를 배포하고, 성폭력 사건 백서 발간 위원 모집과 모금을 하는 자리에 참석하기 위해 버스를 탔다.
버스를 타고 가는 내내 떨림이 가라앉지 않았다. 성폭력 사건을 아는 사람을 만날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그래도 가봐야 한다는 마음이 계속 교차됐다. 버스가 정류장에서 멈출 때마다 내릴까 말까 고민했다. 그런 혼란 속에서 그녀를 대회장까지 이끈 것은 자신을 지지해주는 이들에 대한 고마움이었다.
하지만 대회장에 들어서서 그녀는 사람들의 발만 봤다. 눈을 마주칠까 봐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녀의 눈은 계속 아래로 향했다. 지지모임 부스까지 가는 동안 혹여 누가 자신을 알아볼까 하는 두려움은 더욱 커졌다.
그녀의 눈엔 교사대회 참가자들의 발만 계속 들어왔다. 그러다가 지지모임 소속 선생님을 찾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에 아는 조합원들이 하나 둘 들어왔다. 다시 땅을 봤다. 그녀는 주문을 외웠다. “나를 알아보지 마라...아는 체 하지 마라...”
그녀는 그 순간을 이렇게 회상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 시간은 제게 아득한 어둠 속 긴 홀에 빠지는 것 같았습니다.”
지지모임의 부스에서도 여전히 그녀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잘 나왔다며 반갑게 맞아주는 지지모임 교사들 뒤에서 내내 서성였다. 그녀는 결국 테이블 뒤 사각지대에 쭈그려 앉아 몸을 숨겨버렸다. 그녀는 매년 지회 후배들과 함께 교사대회에 왔지만, 더 이상 그녀는 전교조에 존재하지 않은 사람이 돼 있었다. 그 집회가 끝날 무렵, 그녀가 투쟁 현장에서 십 수 년간 불러왔던 노래 ‘참교육의 함성으로’가 들려왔다. “굴종의 삶을 떨쳐 반교육의 벽을 부수고 침묵의 교단을 딛고서 참교육 외치니...” 그녀는 눈물을 겨우 참았다.
그녀는 학년 초 학부모총회가 있는 날이면 “저는 전교조 조합원입니다”라고 말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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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교조도 통합진보당도 유령 취급
그녀는 3년 전 교육감 선거와 관련해 검찰 조사를 받는 와중에 성폭력 사건을 겪었다. 통합진보당 전신인 민주노동당을 후원했다는 이유로도 지금 재판을 받고 있다. 두 번의 고초와 성폭력 모두 전교조에 헌신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일이지만 전교조는 그녀를 철저히 외면했다.
2010년 성폭력 사건 평가를 위한 전교조의 한 회의에서 당시 피해자의 존재를 아는 전교조의 핵심 집행부 중 하나는 토론회에 참석한 피해자를 버젓이 보면서도 조직적 은폐는 없었다고 말했다. 그녀가 다른 사람에게 피해자임을 드러낼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그녀를 완전히 유령 취급한 것이다.
유령취급 당하며, 유령처럼 살아 온 그녀는 자신을 지지해주는 지지모임의 회원들 덕에 절망의 나날을 끊을 수 있었다. 지지모임은 김모 성폭력 사건의 2차 가해자들에 대한 재심이 단순 경고로 나오면서 공식 결성됐다. 그때부터 피해자에게 지지모임은 유일한 희망의 끈이었다. 피해자는 조금씩 성폭력 문제 토론회 등 자신과 관련된 자리에 나왔다. 올바른 평가가 이뤄져야 자신이 유령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본격적으로 자신의 문제를 풀기 위해 여러 현장에 나오기 시작한 지도 1년 반 정도가 됐다. 최근엔 이제 자신과 전혀 상관없으리라 여겼던 통합진보당 게시판에 자신을 드러내기도 했다. MBC 100분 토론의 유시민 대표 발언에 분노해 통합진보당 자유게시판에 다른 사람의 아이디를 빌려 글을 남긴 것이다. 유시민 대표의 발언에 피해자인 자신의 목소리는 없었다는 피눈물 어린 글이었다.
하지만 이 글에는 피해자가 쓴 글이 아니라는 덧글이 달렸다. 그나마 많은 네티즌들은 그녀의 말을 지지해 주었다. 피해자의 목소리가 그대로 받아들여 질 때 피해자가 유령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일화다. 반면 통합진보당과 전교조는 여전히 정진후 공천을 강행하며 그녀의 목소리를 세상에서 지우고 있다.
그녀는 1년 전까지도 전교조 조합원이었다. 자신을 철저히 버린 정진후 집행부에 대한 배신감에 치를 떨면서도 같은 학교에서 전교조 활동을 하던 후배들에게 미안해 그동안 조합원으로 남아 있었다. 그녀는 2011년 3월 학교를 옮기면서 전교조를 탈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