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진표, 남경필 후보가 다니는 수원중앙침례교회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는 필자 [출처: http://www.facebook.com/leftjin] |
그런데 이 열락의 도가니에서 갑자기 '정치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라는 김빠지고 한가한 생각에 빠졌다. 우선 사전을 찾아보니 이렇다. 첫째, 통치자나 정치가가 사회 구성원들의 다양한 이해관계를 조정하거나 통제하고 국가의 정책과 목적을 실현시키는 일. 둘째, 개인이나 집단이 이익과 권력을 얻거나 늘이기 위하여 사회적으로 교섭하고 정략적으로 활동하는 일. 쉽게 설명하면, 첫째는 어떤 인간 몇 명이 다른 많은 인간들의 아우성을 대신 들어주고 대신 알아서 해먹는다는 뜻. 둘째는 정치하고 있네~할 때 그 뜻.
물론 두꺼운 책 뒤지면 더 깊고 고매한 뜻이 나올 성 싶지만, 현실에서 정치하기 바쁜 우리는 그런 공부하고 있을 겨를이 없다. 그래서 얄팍하게 정치라는 것을 이해하고 넘어가니... 결국 정치라는 것은 내 인생을 다른 이들이 대신 결정해주는 것이요, 고스톱 판에서 잔대가리 많이 굴리는 인간이 판돈 쓸어간다는 거 아닌가. 젠장. 그러니 현실 정치가 이렇지. 대다수의 운명이 걸린 중대사는 국민의 권리를 대리해준다는 국회의원들에 의해 대부분 아사리 판이다. 국회에서 그들과 몇 번의 일을 하면서 느낀 것은 저들은 자기들이 발의한 법조문을 끝까지 읽어보기는 했을까 싶었으며 자기들이 공청회에 나와서 하는 축사나 인사말, 심지어 발제문의 제목은 이해했을까 싶었다.
몇 몇 초롱초롱한 의원을 못 만난 것은 아니었다. 때로 그들은 개정해야할 법이 어떤 위험성이 있는지 또박또박 물었고 자신들이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을 때까지 다시 물어보기도 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 법 전체를 공부하고 관련된 다른 법이나 지식을 스스로 연구하는 이들은 보지 못했다. 그 의원의 재능은 얼마나 똑똑하고 유능한 보좌관을 채용하느냐에 달린 듯 했고,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요즘 국회의원 보좌관들이 벌이는 전대미문의 사건들은 꽤나 일리가 있는 일이기도 하다.
아이쿠, 이런 바보들에게 우리는 우리의 운명을 맡기고 있다. 단언컨대 한미FTA를 날치기로 통과시킨 새머리당 국회의원들 중 열 명도 협정문의 전문을 읽지 못했으리라. 그들 대부분은 투자자에게 좋은, 경쟁하기에 좋은 체제가 결국 자기들 주머니와 자기들 후원자들의 주머니를 채워줄 것이라는 당 지도부의 워딩을 보고 확신에 차서 날치기에 부역했을 것이다. 다행히 그들에게 워딩은 적절했다. 그러나 반대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얄궂은 야당의원들은 어땠을까? 이것이 국민 대다수가 만난 불행일테지만 정치가 원래 그런 것이라 생각하면 앞으로도 운이 좋을 것 같지 않다. 한심하다.
그렇다면 답은 뭘까. 혹자는 선거가 답이다. 투표혁명을 통해서 유권자의 힘을 보여줘야 한다, 라고 말한다. 자기 권리위에 잠자는 사람은 자격이 없다고 하며 선거의 권리를 가진 유권자의 자격을 누리라고 한다. 맞는 말이다. 우리는 선거에서의 자격을 획득하기 위해 오랫동안 싸웠다. 여성의 참정권역사만 보더라도 쉽게 알 수 있다. 1791년 공포정치를 비판하다가 단두대에서 사라진 올랭프 드 구즈가 발표한 ‘여성 권리선언’ 제1조는 ‘여성은 자유롭게 태어나 남성과 같은 권리를 가진다'로 시작했다. 그리고 제10조에서 '여성은 그 의사 표명이 공공질서를 흔들지 않는 한 단두대에도 연단에도 오를 권리가 있다'고 썼다. 그러나 프랑스에 여성의 참정권이 법률상 보장된 것은 그로부터 150여년이 지난 1946년이었다. 1928년 여성에게 남성과 동등한 참정권이 인정된 영국의 경우, 1792년 메리 울스톤 크래프트가 '여성의 권리옹호'에 관한 글을 쓰자 입만 열면 인권을 부르짖던 남성들조차 그녀를 '사색하는 뱀'이라고 비웃었다고 한다.
참정권과 관련한 한국의 상황을 보자. 이번 선거에서도 참정권 보장을 요구하는 장애인들이, 선거연령을 포함한 정치적 권리를 외치는 청소년들이 있다. 민주노총은 투표권을 보장하지 않는 사업장을 고소, 고발하겠다고 밝혔다. 참정권이 없었던 재외국민들에게는 이번 선거부터 투표권이 돌아갔다. 참정권은 시민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하나의 중요한 절차인 것이다. 그래서 또 다른 비시민들이 시민이 되기 위해 외치는 고비에 참정권이 있다. 그러나 이렇게 획득된 참정권을 어떻게 행사하느냐는 또 다른 문제와 관련되어있다. 이미 우리사회는 유권자들이 선거권을 행사하지 않는다는 비판에 직면해 있고, 이러한 현실은 정치에 대한 무관심과 냉소를 동반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선관위는 ‘민주주의는 선거의 꽃이다’라는 계몽 사업에 몰두하고 있다. 그런데 이율배반적이게도 선관위는 선거법 적용의 과도한 유권해석과 불평등한 적용으로 인해, 선거법은 법조항 자체의 결여로 인해 국민들의 표현의 자유를 빼앗고 있다.
또 하나의 주목할 만한 흐름은 '선거가 답이 될 수 없다. 누군가 대리하는 정치는 결코 인권이 침해받는 주체의 억압적 현실을 극복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현실에 저항하고 그를 통해 주권자의 면모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는 직접민주주의, 직접행동의 흐름이다. 그들은 시민이 스스로 민주주의의 주체가 되고 정치의 주인이 되어 행동하는 것이라 말한다. 2008년 촛불을 관통하고 언론파업, 용산참사, 쌍용파업, 희망버스, 한미FTA 폐기투쟁, 강정...까지 무수한 현장에서 본 저항하는 주체들의 꿈틀거림은 분명 감동이었다.
그동안 인권운동이 선거과정에 개입한 것은 시민, 정치적 권리를 확장하기 위한 참정권 운동이나 선거법이 규제하는 표현의 자유에 대한 문제제기에 맞춰져 있었다. 또는 후보와 정당에게 인권관련 공약을 질의하거나 요구하는 정책 활동을 펼쳤다. 한축으로 반인권인사의 낙선운동도 있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인권운동은 현실 정치나 선거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는 편이었다. 시민사회단체들이 진행하는 유권자 운동, 낙선낙천운동, 정당에 가입하거나 후보로 출마하는 등의 행보와 거리를 두고 있었다.
[출처: 박진 트위터 @violll] |
이번 총선에서 인권단체연석회의는 반인권인사의 낙선운동으로 용산참사의 주역 김석기를 감옥으로 보내는 운동에 주력하기로 했다. 다산인권센터는 4월 11일 선거에서 남경필, 김진표 낙선운동을 시작했다. 둘 다 현역의원이고 여당과 야당에서 한미FTA 통과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우리가 이들에 대한 낙선운동을 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우선 둘다 한미FTA 통과 뿐만 아니라 재벌과 1%를 대변하는 법을 통과시키는데 적극적이었다는 것이다. 김석기 낙선운동과 마찬가지로 반인권 인사라는 점에서 낙선운동의 첫 번째 이유가 있다. 둘중 남경필에 대한 낙선운동은 비교적 어렵지 않다. 반MB, 반새누리당으로 형성된 정서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진표에 대한 낙선운동은 다르다. 이미 야권연대의 단일후보로 정해진 대상이기 때문이다. 반노동후보, 청년5적, 시민단체 낙선자 명단에 오르긴 했지만, 민주통합당과 통합진보당의 협상을 통해 김진표는 유권자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야권단일후보가 되었다. 이 국면에서 김진표에 대한 낙선운동은 새누리당에게 의석을 줄 수 있다는 위기감을 불러 오고 있다. 그래서 쉽지 않다. 여기에 두 번째 이유가 있다. 반MB, 반새누리당으로 구획된 야권연대 프레임에 대한 도전이기도 하다.
유권자들의 다양한 선택은 이러한 묻지마 단일화 과정에서 철저히 배제되었다. 진보적 가치는 반MB 심판 프레임 안으로 모두 소급되었고 이에 대한 반기는 새누리당의 선거운동원이라는 딱지로 되돌아오고 있다. 지난 지방선거과정에서 진보정당이 안아야 했던 수모를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여기에 김진표 낙선운동은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김진표 낙선운동은 야권연대의 블랙홀 안으로 흡수되지 않는 요구와 정치가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끊임없이 문제제기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시민이 스스로 주체가 되는 것이 아닌, 누군가 대리하는 정치가 어떤 권력에서 또 다른 권력으로 이양되는 과정에 대한 문제제기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번 김진표 낙선운동을 통해서 새로운 권력에 의한 통치를 원하는 객체가 아니라, 운동과정자체에 진화하는 주체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
세 번째 이유는 실정법을 어기는 낙선운동에 있다. 온라인에서 확장된 표현의 자유는 여전히 오프라인 광장에서 자유롭지 않다. 후보자의 이름이나 정당을 거론하는 순간 선거법 안에 포획될 수밖에 없다. 인권이 법안으로 규율되지 않고, 실정법 바깥에서 도전하고 제도가 다시 이를 수렴하는 과정을 보여줘야 한다. 그래서 선거법을 정면으로 위반하면서 표현의 자유를 확장하는 것이 이번 낙선운동의 또 다른 이유다.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라는 선관위의 위선을 실정법을 어기면서 보여주는 것이며 이렇게 불화하는 법 바깥의 인권이, 법 자체와 제도 안으로 인권의제를 수렴하는 체제를 전복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헨리 데이빗 소로는 <시민불복종>에서 "우리는 먼저 인간이어야 하고, 그 다음에 국민이어야 한다. 법에 대한 존경심보다는 먼저 정의에 대한 존경심을 기르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은가? 불의가 당신으로 하여금 다른 사람에게 불의를 행하는 하수인이 되라고 요구한다면, 분명히 말하는데, 그 법을 어겨라."
마지막 이유는 확장되는 정치과정에 참여하는 주체들 요구의 반영이다. 낙선운동의 힘은 다산인권센터에 소속된 활동가들의 회의 테이블에서 나오지 않았다. 4년 동안 수원역 광장에서 촛불을 든, 이름없는 시민들의 요구였다. 이들은 광장에서 민주주의를 직접 체험하면서 이를 통해 이미 정치의 주체가 되었다. 무능하고 야비한 지도자에 분노해 거리로 나온 이들은 용산과 쌍용, 언론민주화, 4대강, 강정의 모든 현장을 다니면서 사회가 직면한 상처가 되었다. 스스로 아픈 상처가 된 이들은 한미FTA로 밀려오는 광포한 신세계를 저지하기 위해 잘못된 정치를 멈추어야한다는데 뜻을 모았다. 그래서 반MB 전선을 뛰어넘는 김진표 낙선을 선택했다.
이들이 지지하는 정당은 모두 다르며, 이들이 추구하는 이상도 현재 모두 다르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들이 심판해야하는 것이 잘못된 정부만이 아니라는 것을 직관적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김진표가 출마한 수원 영통구에 선택할 후보가 김진표도 아니고 새누리당도 아니라면 차라리 “당신의 투표용지를 버려라” "백지 투표가 1등이 되게 하자."는 요구를 내 걸었다. 투표혁명을 외치는 한국사회 정치지형에서 어디보다 급진적인 선택을, 그 시민들이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바로 우리가 지지하는 정치다. 권력과 권력이 서로의 시소게임을 하고 있는 패권질서 속에서 심판할 대상을 정확히 지목하고, 실정법을 두려워하지 않고 걸어 나가는 것. 이보다 더 대중적인 정치실험의 장이 어디 있겠는가. 인권운동하는 우리는 이번 김진표, 남경필 낙선운동을 통해 법바깥에서 제도정치 틀거리에 수렴되지 않는 직접민주주의를 경험하는 중이다. 월스트리트 OCUPPY에 참여한 수유너머R의 고병권씨는 이런 표현을 했다.
'운동에 참여하고 나면 사람들은 더 이상 이전처럼 살지 않는다. 그것은 월스트리트 운동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월스트리트 점거가 어떤 성과를 낳을 수 있을지 의문시하는 사람들이 있다. 보수적 티파티 운동처럼 명확히 공화당을 오른쪽으로 견인하고 그 출신들을 정치적 대표로 진출시킨 것도 아니고, 제도화할 수 있는 어떤 통일된 요구를 명확히 내건 것도 아니고 말이다....그러나 운동의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 집권이나 제도화를 기다려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운동은 그 자체로 이동이자 변화이므로 결과가 즉각적이고 동시적이다. 사람들이 더 이상 운동 이전처럼 살아갈 수 없다면 그것이 그 자체로 변화이고 운동의 결과인 셈이다. 만약 누군가 이번 운동을 통해 미국에서 급진 정당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그에게 그런 꿈을 꾸게 한 것 자체가 이번 운동의 결과일 수도 있다'
더 이상 우리는 예전과 같아질 수 없다. 누가 권력의 왕좌를 차지 하더라도, 이미 우리는 정치의 주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시대와 불화할지라도 역사 앞에 떳떳한 걸음. 이것이 우리가 김진표, 남경필 낙선운동을 선택한 이유이다.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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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다산인권센터 소식지 <몸살>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