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인권위원회가 산업재해 보상보험 제도 개선안을 고용노동부에 권고하면서, 노동자의 산업재해 인정이 수월해질 것이라는 기대가 흘러나오고 있다.
특히 노동계는 고용노동부와 19대 국회가 인권위의 산재보험 제도 개선 권고안을 즉각 이행해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국가인권위, “산재 입증, 국가와 사용자가 해야”
국가인권위원회는 지난 19일, 질병과 업무 사이에 인과관계를 근로자가 아닌 상대방이 증명해야 한다는 취지의 산업재해 보상보험 제도 개선안을 고용노동부에 권고했다.
현행 제도에 따르면, 피해 노동자는 △유해, 위험물질을 충분히 다룰 것 △유해, 위험물질을 다룬 것 등이 질병을 유발할 수 있다고 인정될 것 △의학적 인과관계가 있을 것 등의 세 가지 요건을 증명해야 업무상 질병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이발래 국가인권위원회 인권정책과 팀장은 “피해 근로자는 고도의 전문성과 시간, 비용이 요구되는 의학적 인과관계를 증명해야 해서 현실적으로 산업재해를 인정받게 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라며 “저희 위원회의 권고는 근로자의 부담을 완화시키기 위한 것”이라며 권고 취지를 설명했다.
인권위의 권고에 따르면, 피해근로자 등은 질병에 걸린 사실과 유해, 위험요인에 노출된 경력이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야 하며, 제기된 질병이 업무 관련성이 없다는 사실은 상대방이 증명해야 한다. 그동안 노동자에게만 전가돼 왔던 산재 입증 책임이 근로복지공단과 사용자 등 상대방에게 배분되는 셈이다.
이밖에도 인권위는 ‘업무상 질병’ 관련해 △2003년 이후 갱신되지 않은 업무상 질병의 구체적 인정기준을 산업구조의 변화 등을 반영해 정기적으로 추가, 보완할 것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의 위원장을 민간인으로 선임하도록 하는 등 독립성, 공정성, 전문성 강화 방안을 마련할 것 △산업재해보상보험급여 신청서 상의 사업주 날인 제도를 폐지할 것 등을 고용노동부에 권고했다.
이발래 팀장은 21일, YTN라디오 [김갑수의 출발 새아침]과의 인터뷰에서 “2008년에 업무상 질병에 관한 인정기준이 일부 개정됐고, 고혈압성뇌증이나 협심증 같은 질병이 삭제됨에 따라 인정 범위가 좁아져 버렸다”고 설명했다.
이어서 그는 “또한 시행령의 업무상 질병 인정 기준이 2003년 이후로 새로 추가 보완되지 않고 있다”며 “산업구조가 변화하고 이에 따른 질병이 새롭게 발생되고 있기 때문에 이를 반영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고용노동부는 ‘난색’...노동계는 ‘즉각 이행’ 요구
하지만 고용노동부 측은 권고안을 이행할 경우, 무분별한 산재판정과 산재기금이 훼손될 것이라고 난색을 보이고 있다.
이에 대해 이발레 팀장은 “우리 위원회의 권고를 잘못 이해한 것”이라며 “산업구조의 변화를 반영해 새롭게 발생하는 직업병을 조사하고 검토해 산재 인정기준을 추가하라는 것이 권고의 취지인 만큼, 일반 질환까지 산업재해 판정이 날 가능성이 있다는 고용노동부의 주장은 잘못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인권위의 권고안이 발표되면서, 노동계는 정부와 19대 국회가 해당 권고안을 즉각 이행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민주노총은 20일, 성명서를 발표하고 “2007년도 기준 한국의 총 암 관련 사망자 중 4%인 2,700여 명이 직업성 암으로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됨에도 매년 산재로 인정되는 직업성 암은 20~30명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며 “이는 국가인권위가 지적한 대로 업무상 질병에 대한 입증책임을 노동자에게 부과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이어서 이들은 “민주노총은 국가인권위가 발표한 산재보험제도 개선 권고를 환영하며, 정부와 19대 국회가 이를 수용하여 법 제도 개선에 즉각 나설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전문가들 역시 권고안 이행을 시작으로, 지속적인 법 제도 개선 등이 이어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권동희 법률사무소 새날 노무사는 “의학적 인과관계를 입증하는 것은 어렵기 때문에 근로복지공단이나 노동부도 부담이 생기는 것”이라며 “특히 직업성 암과 백혈병 이외에도 산업재해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근골격계, 뇌심혈관 질환 등을 앓고 있는 노동자들 역시 부담이 줄어들게 된다”고 설명했다.
이어서 권 노무사는 “현재 업무상 질병 제도는 최하위 수준이고, 직업병 인정율도 바닥이어서 더 나빠질 것이 없는 상황”이라며 “해당 권고안이 최선이 아닌 차선책이지만, 권고안이 시행될 경우 이후 추가적인 제도 개선으로 더 나아질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