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디 도용 통한 불법해킹 등 아니고선 사전 유출 어려워
전교조 위원장 선거에 기호 1번 황호영·남궁경 후보조와 기호 2번 김정훈·이영주 후보조 등 두 팀이 출마했다. 이번 사건은 양쪽 선거운동본부에서 전교조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공식 공보물을 제출하기 전, 기호 2번 선본 공보물이 기호 1번 선본 측에 불법적인 방법으로 유출된 사건이다. 공보물은 2번 후보 측 홈페이지 아이디 도용을 통한 불법 해킹 등의 방법이나 부정한 행위가 아니고서는 사전에 유출이 어려운 것으로 알려졌다.
이 사실은 지난 13일, 전교조 본부의 한 상근자의 제보로 전교조 중앙선거관리위원회(선관위)에 공식 접수됐다.
기호 1번 후보 쪽은 부정행위 발생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부정행위 당사자만의 책임으로 선을 긋고 있다. 기호 1번 황호영 위원장 후보는 25일 오후 6시 전교조 정책토론회에서 “우리 선본 운동원의 부정행위에 대해서는 진심으로 사과를 드렸다”며 “당사자가 밝히지 못하겠다고 한다면 더 이상 밝힐 방법이 저로선 없다. 묵비권도 민주적인 권리다. 민주사회에서 그런 것까지 인정을 못 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주장했다.
여기에 전교조 선관위도 석연치 않은 조치를 내려 논란은 더욱 확산할 전망이다. 전교조 선관위 전체회의에서 이 문제에 대해 가벼운 조치를 내려 선거 불공정 논란도 나오는 상황이다.
하지만 선관위가 처음부터 경미한 조치를 내리려 했던 것은 아니다. 지난 17일 선관위 상임집행위는 기호 1번 후보자의 징계 의결 심의 건을 중선관위 전체 회의 안건으로 상정했으며, 비공식적으로는 중선관위 위원장이 기호 1번 후보자에게 후보 사퇴까지 권고하기로 결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중앙선관위원 사퇴...“제2의 통진당 선거 부정 사태 될 수도”
이번 사건은 전교조 본부 상근자가 업무를 위해 기호 1번 선거공보물 작업을 하고 있는 모 기획사에 들렀다, 기획사 사장의 컴퓨터 바탕화면에 기호 2번의 선거공보 파일이 있는 것을 우연히 발견하고 선관위에 제보하면서 드러났다.
선관위 조사결과 기호 1번 선본 관계자 김 모 씨는 지인으로부터 기호 2번의 선관위 제출 공보물이 담긴 USB를 건네받은 후 이를 선거 운동원들끼리 돌려본 것으로 전해졌다. 문제는 기호 1번 측이 공보물을 전해 받은 시점이다. 공보물을 선관위에 심사 받기 전이기 때문이다.
▲ 사전 유출된 기호 2번 후보 선거 공보물. 후보 공식 공보물은 부정 선거 논란으로 아직 조합원들에게 전달되지 않아 기호 2번 후보 지지자들은 개인 페이스북 등에 공보물을 게시했다. |
전교조 선관위가 후보 등록 후 양쪽 선본과 함께 심사한 후 조합원의 학교로 전달하는 공보물은 분회장들이 조합원들의 손에 직접 전해 주기 때문에 내용 보안이 생명이다. 6만 명이나 되는 조합원에게 후보가 어필하는데 가장 유효한 수단이기 때문에 선거 초기에 전달되는 공보 전략은 선거 운동 전반을 규정한다.
따라서 한쪽 후보가 미리 상대 후보의 공보 내용을 알게 된다면 반대 후보 쪽에 어떤 내용으로 어떤 공세를 펼칠지에 대한 전략을 미리 짤 수가 있다. 정치권 선거처럼 TV 토론이나, 언론의 관심이 집중되는 선거가 아니기 때문에 한 번 낸 공보물은 후보의 모든 것을 규정한다.
교육노동운동을 주도해온 전교조 내에서 상대 선본의 공보물을 불법적인 방법으로 빼내는 것은 선거규정 위반을 넘어 전교조의 위상에도 타격을 줄 수 있다.
하지만 선거관리위원회는 기호 2번의 공보물을 최초로 빼낸 사람이 누군지, 어떤 경로로 유출됐는지 이 사건의 진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최초 공보물 유출자가 누구냐에 따라 이번 사건의 성격이 달라질 수 있지만 기호 1번 후보와 성향이 같은 선관위 위원들이 많은 전체회의에선 경징계로 징계 수준이 낮춰졌다.
이와 관련해 박 모 선관위 위원은 지난 22일 “중선관위 상집위원으로서 기호 1번 선대본의 비협조적인 태도로 이번 사건의 진상을 정확히 규명하지 못한 채 결정에 참여하였기에 이 부분에 책임을 지겠다”며 선관위 게시판에 사퇴의 변을 남겼다.
박 위원은 사퇴의 변에서 “그 사람의 지위나 위상에 따라 이 사건의 성격이 단순하고 우발적인 것이냐, 아니면 의도적이고 계획적인 것이냐가 좌우될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최초 전달자가 누구냐는 이 사건에서 매우 중요하다”며 “선관위 상집에서 몇 차례에 걸쳐 기호 1번 선대본에게 위 사실에 대한 해명을 요구했지만 1번 선대본은 공보물 유출의 경로와 제공 받은 자를 밝히면서 단지 공보만을 제공 받았다고 하고 있다. 공보를 최초 전달해준 자는 그 사람을 보호하는 차원 등의 이유를 들어 밝힐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어 박 위원은 “(이번 사건은) 통진당 선거부정 사태나 2008년에 발생한 민주노총 조합원의 전교조 조합원 성폭행 미수 사건 처리 정도의 후유증을 겪을 개연성을 무시할 수 없다”며 “17일 중선관위 상집에서는 이러한 이유 등으로 기호 1번 후보자의 징계 의결 심의 건을 중선관위 전체 회의 안건으로 상정하였고, 비공식적으로는 중선관위위원장이 기호 1번 후보자에게 후보 사퇴까지 권고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이를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풀지 못하고 외부 기관이 힘을 빌어 공보 최초 전달자를 밝힌다면 그에 따른 파장을 전교조가 경우에 따라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라며 “지금이라도 공보 최초 전달자를 밝히고 사실관계를 정확히 규명을 해서 그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했다.
선관위와 기호 1번 간의 유착 의혹도...
선관위 논의 과정을 잘 알고 있는 전교조의 한 조합원은 선관위가 부정 선거운동 처리 과정에서 편파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선관위가 기호 1번에 대해 애초에 결정했던 징계 수위를 특별한 이유 없이 낮췄다는 것이다.
애초 선관위 상임집행위원회는 선거 규정상 후보에게 내릴 수 있는 가장 높은 수위의 징계인 위원장에게 징계를 요구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21일 선관위는 전체 회의에서 이를 번복하고 △결정문과 경고장을 후보자에게 송부 △선거구 홈페이지에 결정문 및 후보자의 사과문 게재 △선거구 조합원에게 이를 알리는 메일 발송 등으로 돌연 징계 수위를 낮췄다.
이 조합원은 “이번 사건은 기호 1번이 선거공약과 정책기조를 도둑질한 것”이라며 “만일 불법적인 아이디 도용 등의 방법을 썼다면 단순 공보물만 아니라 선거 전략과 정책, 기호 2번 과 함께하는 각 지역 선거 조직 등 모든 정보를 가져갔을 수 있다. 상대 후보 진영의 모든 활동 내용을 도둑질해 갔을 수 있어 더 심각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선관위가 21일 이런 결정을 내리고도 징계 시행일을 그로부터 5일 뒤인 26일로 미뤘다”며 “선관위가 기호 1번 후보의 불법 선거 운동이 알려지는 시간을 가급적 늦추기 위해서 아니겠냐”고 의혹을 제기했다.
황호영 후보, “부정선거 문제 제기 유감”
기호 1번 황호영 후보의 안일한 사태 인식도 도마에 오를 것으로 보인다.
황 후보는 지난 24일 경남지역 선거유세에서도 이 사태와 관련해 후보의 입장을 묻자 “선대본 관계자가 저지른 선거부정 행위라는 비신사적 행위에 대해서 진심으로 사과드린다”면서도 “(2번 선본이) 문제제기 한 부분에 대해서 약간의 유감도 표하고 싶다. 죄를 저지른 주제에 무슨 유감이냐 말씀하시겠지만 건강한 전교조를 위해서도 전교조의 공식 기구의 결정에 대해서 일단 승복하고 존중하는 자세를 보이는 게 맞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후보로서 선거 본부 관계자가 저지른 일에 대해서 추궁하고 실체를 밝히려는 노력을 안 했던 건 아니다”라며 “그러나 당사자가 함구하는 것에 대해서는 어쩔 도리가 없다”고 말해 더 이상 진상을 규명할 의지가 없음을 드러냈다.
황 후보는 또 이 자리에서 부정 선거운동에 대한 문제 제기를 단순한 정파 갈등으로 모는 듯한 발언을 해 사건을 물타기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황 후보는 “우리가 악몽처럼 떠올리는 그동안 의견그룹 간의 대립, 얼마나 조합원들을 질리게 만들었나. 다시 그런 단초를 여는 것이 돼서는 안 된다고 굳게 믿고 있다”며 “돌발 사태 때문에 전교조의 미래 정책 방향에 대해 머리를 맞대고 함께 고민하는 분위기조차 사라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한편 이번 전교조 선거는 현 집행부인 통진당 구 당권파(이정희 대선 후보 쪽) 지지 세력을 강하게 비판하는 2번 김정훈·이영주 후보의 출마로 노동계의 반 통진당 흐름이 전교조에도 이어질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