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 말기에 인간 됐나?’ 속으로 생각하다가도 대통령 측근 사면을 위해 정치적으로 용산참사를 이용한다고 생각하면 약이 오른다. 더욱이 MB정권 아래 발생한 용산 ‘학살’이 아닌가.
사면? 그래서 마음 접고 있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다. 벌써 경험하지 않았나. 1년 전 용산참사 3주기 때 정영신 씨의 남편 이충연 용산4상공철거민대책위 위원장을 비롯해 옥살이 중인 동지들은 석방되지 못했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구속자 사면을 요구하자 감옥에서 이번엔 나갈 수 있다며 ‘쫑파티’까지 열어줬다는 사람도 있다. 결과 발표 전날 용산참사로 수감 중인 김성환, 김주환 씨를 면회하고 온 정영신 씨다.
“두 분은 ‘MB가 우리를 내보내겠냐. 기대 안 하고 있다’고 말했다. 차가운 감옥에서 얼마나 스스로 마음을 다잡고 있는지 느껴져 측은했다. 나 같으면 당연히 우리부터 사면해야 한다고 말할 것 같은데 밖에서 투쟁하는 사람들 걱정하고, 마음 숨겨 말 못하는 저 사람들. 4년이나 옥살이 했는데 이제 1년 남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난 ‘조만간 나와서 소주 한 잔 해야지’라고 말했다. 남편도 본인 사면이 아니라 특히 부상자들이 사면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나도 맞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나나 남편이나 못 살 것을 안다”
도 아니면 모. 사면시킬 거면 차라리 다 내보내라. 용산참사 구속자 6명 중 일부만 나온다면 영신 씨는 차라리 남편이 사면되지 않길 바랬다. 연대한 동지들이 아니라 철거민대책위 위원장 남편이 사면된다면 마음이 아프고 답답할 것 같았다. 잔인한 일이다.
그런데 구속자 5명은 오는 1월 31일 사면된단다. MB정권이 ‘그래도 우릴 사람으로 보긴 하나보다’ 생각했다. 남편의 석방을 앞두고 너무 좋아 아무 말도 못하겠다며 환하게 웃는 영신 씨 모습에 주변이 환해진다. 355일간의 장례 투쟁으로 평상복보다 상복이 익숙해보였던 그에게도 좋은 일이 생겼다. 용산참사 이후 좌절만 했는데 처음으로 기쁜 일이 생겼다. 6년 연애, 8개월 결혼생활, 4년 이별... 드디어 종지부를 찍는다.
#. 매일 그대와
남편 이충연 씨가 석방되면 가장 먼저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묻자 없다며 까르르 웃다가 줄줄이 터져 나온다. “그냥 같이 있고 싶다.” 단순하면서도 진심이 묻어나오는 말이다.
“매일 같이 있었듯이 같이 손잡고 다니고, 영화보고. 모르겠어요. 다 가고 싶어요. 시장가고 싶고. 남편 그렇게 되고 나서 제가 대형마트 간 적이 없어요. 혼자 있고 시장 볼 일이 없었으니까요. 구멍가게 가서 소주, 맥주나 샀지(웃음). 소소한 일상을 같이 해보고 싶어요. 참, 우동도 먹으러 갈 거예요. 제 남편이 미식가거든요? 제철음식, 맛있는 음식 좋아해요. 지금도 감옥 안에서 ‘장인어른 뭐 좋아하는 데 지금이 제일 맛있으니까 사다드려’ 그러거든요”
처음에는 그럴 거란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하는 거 다 할 거란다. 하지만 속 깊은 영신 씨가 제일 염두에 두고 있는 게 따로 있다. 남편 충연 씨 혼자 모란공원에 보내는 일이다. 혼자 충연 씨의 아버지를 비롯해 용산참사 열사들을 만나게 하고 싶다. 감옥 안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남편이었다. 살기 위해 망루에 올랐다 아버지를 죽인 아들, ‘테러리스트’로 낙인 찍혔던 남편이었다. 영신 씨가 모란공원에 간다고 하면 아버지나 열사 분들이나 술 좋아하시니까 잔뜩 술 사가지고 가서 부어드리라고 당부하던 남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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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안 따라가고. 혼자 모란공원 보내서 그동안 못 울었던 거 실컷 울고, 다른 분들과 아버지에게 못한 말 다하게 하고 싶어요. 그 사람 아마 그래야 세상에 나올 때 조금 더 자신감이 생길 거예요. 단순히 책임감만 느끼는 게 아니라 자신감이요. 가슴에 품고 있으면 남편이 빨리 지칠 수 있어요. 용산참사에 연대한 분들은 나중에 차근차근 만나야죠. 어차피 우리 싸움, 용산참사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위한 싸움은 길잖아요”
그 많은 사탕은 어디로 갔을까? 영신 씨와 충연 씨는 재판 때 법정서 사탕과 비타민제를 주고받으며 애틋한 마음을 전했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일화다. 쑥스러울수록 크게 웃는 그는 이번에도 많고 많던 사탕과 비타민제를 다 먹었다며 웃는다. 문득 얼굴까지 빨갛게 만들고 싶다는 장난기가 발동한다. 6년을 연애했다는 데 그 둘은 어떻게 만났을까.
“남편이 겁이 굉장히 많아요. 깜깜하고, 귀신 나오고 그런 거 무서워해요. 남편과 제 친구와 식사 마치고 저녁에 바람 쐰다고 장흥 갔어요. 그땐 남편이 한참 저 쫓아다닐 때라 슈퍼맨이었죠. 어딜 가나 나타났어요. 어두울 때 남편이 운전하고 돌아오는데 일부러 그랬는지 아닌 지 꼬부랑거리는 시골길로 들어선 거예요. 남편이 조심스럽게 겁이 많다고, 운전이 불안한데 손을 잡아주면 안 되냐고 했죠. 남자가 이런 거 무섭냐고 했는데, 저도 불안해서 손을 잡아줬죠. 그렇게 장흥서 3시간 넘게 걸려 왔어요. 나중에 물어보니 조금이라도 손을 더 잡고 싶어서 돌아서 서울 왔다고 하더라고요. 그때 손을 잡지 말았어야 했는데(웃음)”
충연 씨는 영신 씨에게 ‘이쁜마눌님’이라고 한다. 하느님보다 더 높은 사람이란다. ‘자상하고 애교가 많은 사람’이라고 남편 자랑하는 말하는 영신 씨 볼이 빨개진다. 상황이 민망했는지 한 마디 덧붙이는 영신 씨다. “그런 사람을 테러리스트라고 했으니...”
#. 사랑한 후에
‘용산 유가족’으로 불렸던 영신 씨가 ‘활동가 정영신’이 됐다. 용산참사 진상규명 및 재개발제도개선위원회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남편에게 이를 알렸을 때 첫 마디는 “미안하다”였다. 그리고 면회 갔을 때마다 고생하는 아내를 위해 출소하면 “당신이 하고 있는 일 내가 다 할께”라고 말하는 든든한 남편이었다.
“제가 원래 사회적인 문제에 관심 있었던 사람이 아니었으니까요. 남편 잃고 아들까지 감옥으로 보낸 시어머니도 힘들고, 적어도 내 남편, 구속자, 구속자의 가족, 유가족, 한국 사회의 무자비한 개발 문제에 대해 누구 하나 책임감을 가지고 나서야 한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단 하나. 제가 무언가 하면 구속자들이 석방될 거라고 믿었죠”
면회 온 영신 씨에게 남편이 안 좋은 소리를 하기도 했다. 밖에서 벌어지는 상황이 맘에 들지 않으면 조언을 했다. 가끔 듣는 잔소리지만 영신 씨는 그조차 이해됐다. 남편뿐만 아니라 구속자 가족들의 말도 그녀는 이해됐다. 용산참사가 그녀를 그렇게 만들었다. 나도 이렇게 억울한데, 감옥에 있는 남편은 얼마나 억울할지. 생각할수록 그들이 안쓰러웠다.
“1심 판결 받고 나서 구속자 가족들이 나와 남편에서 원망 섞인 말을 하기도 했어요. 나는 그분들이 부러웠어요. 나는 화풀이할 대상이 없었어요. 원망하기보다 어딜 가나 항상 ‘죄송합니다’라고 해야 했죠. 하지만 내가 원망해야 할 대상은 따로 있었죠. 그 사람들이 너무 잘 살고 있다는 게 문제죠. 내가 그래서 더 억울한데, 갇혀있는 남편은 오죽하겠어요”
▲ 2009년 10월21일 오후 2시, 서울중앙지법 311호 법정. 검사는 사무적인 목소리로 용산참사 피고인 철거민들에 대한 구형을 제시했다. 구형량을 들은 이충연 씨의 부인 정영신씨와 어머니 전재숙씨는 한없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자료사진] |
죽다 살아난 남편은 감옥서 진통제를 복용했다. 망루서 뛰어내려 물구덩이에 처박혀 살아난 충연 씨다. 중환자실서 사경을 헤매다 일반 병실로 옮겨졌을 때 아버지 이상림 씨의 죽음을 알았다. 믿지 않았다. 충연 씨보다 체력이 더 좋은 아버지가 죽었다니. 뛰어내리기만 하면 살았다고 했다. “나 때문이라도 아버지는 살았을 것이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살려고 망루에 올라갔는데 주검이 되어 돌아온 아버지라니. 믿을 수 없었다.
영신 씨가 보기에 충연 씨는 아버지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터져버릴 것 같은 울분을 혼자 삭이고 있다. 티 내지 않으려는 모습이 제일 안타까웠다. ‘아버지’라는 단어를 쉽게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마음이 약해질까 봐 영신 씨에게 편지도 안 쓰던 남편이었다. 1심 재판이 끝나서야 안부 묻는 편지를 종종 쓰더니, 대법 판결이 나고 나서야 편지를 썼다. 모든 걸 내려놓은 듯 보였다.
그렇게 책임감 강하고, 강인해 보였던 남편도 펑펑 우는 날이 있었다. 장인, 장모님이 면회 왔을 때다.
“다른 사람은 모르는 데 친정식구들이 면회 오면 많이 힘들어했어요. 특히 친정엄마는 사위 얼굴만 보면 울었어요. 밝고 씩씩한 남편도 그때는 울면서 들어갔죠. 아마 저에 대한 미안함, 장인 장모님에 대한 미안함 때문일 거예요”
처음엔 둘의 결혼을 반대했지만, ‘장인어른 살린 사위’라 더 애틋했는지도 모른다. 영신 씨에게 능력 있으면 시집가지 말고 혼자 살라 했던 어머니였다. 살아온 환경이 달라 처음에는 결혼을 반대했던 부모님이었다. 하지만 희귀병을 앓고 있던 아버지를 위해 헌신하는 충연 씨를 보며 영신 씨와 그의 가족들은 마음을 돌렸다. 아직도 영신 씨 어머니는 “우리 이 서방이 아버지 살렸다”고 한다.
“아버지가 자꾸 마르면서 온 몸이 새까맣게 변하기 시작하는데, 유명한 병원 다 가도 병명을 모른다고 했어요. 남편이 사실을 알고 수소문해 병원 예약했죠. 에디슨병이였어요. 그때 내 가족을 위해서는 정말 못할 게 없는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믿음이 생겼어요”
#. 걱정말아요 그대
참 힘든 시간이었다. 355일 만에 장례를 치르고 대법 판결을 기다리는 시간이 가장 고통스러웠다. 남편과 6년 연애하고, 8개월 결혼 생활했는데, 서로 떨어져 본 적이 없었다. 연애 때 노점상하면서도 옆자리서 함께 했다. 일 끝나면 맥주라도 마시고 헤어졌다.
용산참사 후 정신없이 1년이 흐르고 장례를 치르고 나니 갈 데가 없었다. 집도, 가게도, 남편도 없었다. 친정집에서도 나왔다. 시어머니가 계시는 용산에 방을 하나 얻었다. 그리고 그는 수면제를 집어삼켰다.
“도저히 못 살겠어서. 그때 제일 힘들었어요. 그때는 진짜 눈뜨면 면회 갔어요. 예약하면 금방 면회하는데 예약도 안 하고 갔어요. 그냥 거기 구치소에 앉아서 편지도 쓰고. 모두 힘들어서 정신과 치료를 받았는데, 다들 불면증에 시달리니까 수면제를 주더라고요. 한 번은 진짜 죽으려고 먹었어요. 3일 만에 깨어났죠. 연락이 안 되니까 부모님이 오셨죠. 깨어나서 친정어머니 보니까 정신이 바짝 들었죠. 제가 너무 무책임한 것 같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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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부터 영신 씨는 무조건 밖으로 나왔다. 철거민, 노동자들을 만났다. 왜 가는지도 모를 정도로 무작정 희망버스에 몸을 실었다. 그러면서 견뎠다. 견뎌졌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고통에서 벗어난 그녀가 남편에 대한 그리움을 달랠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만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남편도 그랬다. 그리고 덤덤하게 “끝난 게 아니다”, “그래도 우린 볼 수 있잖아”라고 말하는 남편 때문이었다. 그래. 아직 끝나지 않았다. 뭐가 끝났다고.
“그래도 중형은 아니겠지 했는데 1심 끝나고 남편과 저는 서로 아무 말도 못한 채 울었어요. 이 사람한테 가도 죄인, 저 사람한테 가도 죄인... 만인에게 평등한 법이라면 재판에서 적어도 진실이 밝혀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중형을 선고하니 확 무너졌죠. 6년을 이렇게 살아야 하나... 그날 또 경찰과 엄청 싸워서 미쳐버리게 힘들었어요. 남편이 ‘끝난 게 아니다’고 해서 많은 위로가 됐죠. 더 강해지고, 더 싸워야 한다고 생각했죠”
영신 씨와 충연 씨는 면회 때 가급적 즐거운 얘기를 많이 했단다. 사면 결과가 발표나기 전까지도 “우리 연애할 때, 겨울에 이런데 갔었는데” 하며 웃었다. 4년 전 1월 20일이 다가올수록 그랬다. 조만간 이들이 재회한다. ‘용산 레아’, ‘용산의 며느리’... 수많은 이름을 가진 그에게 ‘이충연과 정영신’이란 명칭이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시아버지 불타 죽고 남편 감방에 있는데, 뭐가 좋아서, 웃고 다녀?’라는 말이 들리는 것 같아 맘껏 웃고 다니지 못했다는 영신 씨. 이젠 그녀가 편히 웃길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