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울산저널] |
여 씨는 입사 직후부터 삼성 SDI가 TV 브라운관 국내 생산을 중단한 2006년까지 20년 동안 컬러 브라운관 1공장에서 일했다. 1993년까지는 ‘F가공반’ 소속이었고, 이후에는 ‘봉착반’에서 일했다. 여 씨가 F가공반에서 했던 일은 브라운관 유리 표면을 평평하게 만들기 위해 ‘불산’으로 세척하는 것이었다.
마치 수족관처럼 생긴 통 안에 유리를 넣으면 불산이 분사돼 유리를 세척했다. 세척 작업은 통 안에서 진행됐지만 냄새를 막지는 못했다. 게다가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통 안에 직접 들어가 불산 찌꺼기와 유리 조각들을 치워야 했다. 통 안에 들어가 작업하고 나오면 온 몸이 아팠다.
봉착반에서 한 일은 브라운관의 앞유리와 뒷유리를 붙이는 일이었다. 붙이기 전 장갑을 아세톤에 적셔 판넬을 닦았는데 냄새가 심했을 뿐만 아니라 아세톤이 손에 묻어 피부가 하얗게 변하곤 했다. 브라운관 제조 과정에서 흑연과 납, 그 외에 여러 화학물질을 사용하는데 가루가 날려 불량이 난 물건은 질산을 물에 희석시켜 가루를 제거했다. 앞유리와 뒷유리를 프리트(Frit, 유리질 분말)로 붙인 후 봉착로에 넣어 구웠는데 봉착로 안의 온도가 500도에 달했다. 봉착로 외에도 소성로, 배기로 등이 있어 공장 안은 늘 더웠다. 1년 내내 에어컨을 틀었고 여름에는 40도가 넘었다. 반팔 작업복을 입고 일을 하다보니 팔에 화학물질이 튀기도 했고 땀으로 젖은 몸에는 여러 가루들이 달라붙곤 했다.
2000년대 중반 삼성 SDI가 브라운관의 국내 생산을 중단하면서 여 씨가 일하던 1공장도 2006년 8월 문을 닫았다. 여 씨는 PDP를 만드는 공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검사 공정에서 일했는데 불량 여부 검사는 주로 여직원들이 하고 여 씨 등 남자 직원들은 불량 판정이 난 물품을 빼내 레이저를 쏴 수리했다. 레이저를 쏠 때는 눈과 피부가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노출되지 않도록 문을 닫고 쏘라고 돼 있지만 바쁘다보니 문을 닫지 않고 작업을 하기 일쑤였다.
그는 “공식적으로는 3교대 근무였지만 단 한 번도 3교대 근무를 해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보통 하루 12시간씩 일했다. 공정에 따라 토, 일요일 모두 쉬는 곳도 있었지만 그가 일하던 공정은 가동하려면 미리 준비해야 돼 일요일 저녁부터 다시 일이 시작됐다. 어떤 날은 아침 6시에 출근해 오후 2시에 퇴근했다가, 그날 밤 10시 다시 출근해 다음날 아침 6시까지 일한 적도 있다. 브라운관 공장에서 일하던 때는 보통 한 달에 550시간 이상 일했고, PDP 공장으로 옮긴 후에도 한 달에 400시간 넘게 일했다.
2011년 12월 중순 경부터 감기 증상이 있어 약을 사먹었지만 낫질 않고 자꾸 졸음만 쏟아졌다. 며칠 후부터는 코피가 나기 시작했는데 한 번 피가 나면 잘 멈추질 않았다. 해가 바뀌고 한 달이 다 되어가도록 감기가 낫질 않자 2012년 1월 10일 경 내과에 갔다. 의사가 얼굴이 너무 안 좋다며 피 검사를 해보자고 했다.
사흘 뒤 결과가 나왔다며 병원으로 오라는 전화를 받았다. 백혈병일 가능성이 90%가 넘는다며 큰 병원으로 가보라고 했다. 부산동아대병원에 가 다시 검사를 받았다. 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1시간 반 동안 오진이었기를, 백혈병이 아니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그러나 신은 그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았다. 의사는 그에게 “급성골수성백혈병으로 2달 이상 치료를 안 하면 사망할 것”이라고 말했다.
나흘 뒤 1월 17일 서울삼성병원으로 옮겨 치료를 시작했다. 백혈병 치료는 제일 먼저 항암제를 투여해 백혈병 세포를 5% 미만으로 만드는 관해유도치료부터 시작한다. 관해유도치료의 성공 여부가 이후 치료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다행히 여 씨는 관해유도치료가 잘 끝났다. 그러나 그건 시작이었다.
이후 4번의 항암치료를 했다. 항암치료 과정은 먼저 항암주사를 맞으며 5일 동안 치료하고 퇴원해 5~7일 집에서 쉰다. 다시 병원에 가 보름 정도 회복을 지켜보고 퇴원해 일주일 후 다시 검사한다.
2~3주 뒤 다시 항암주사를 맞는다. 항암치료를 하면 통증이 너무 심해 걸을 수조차 없어 며칠 동안 침대에 누워있어야만 했다. 거기다 열이 나고 입과 목이 다 헐고 구역질이 나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었다. 차라리 죽고 싶을 정도였다.
골수이식을 위해 4명의 형제들이 검사했지만 맞는 게 없었다. 자가이식조차 할 수 없었다. 그래도 다행히 경과가 좋았다. 항암치료 과정에서 상태가 나빠지면 중환자실로 옮겨지는데 그 길로 떠나는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여 씨는 중환자실에 한 번도 가지 않고 치료를 마쳤다. 치료가 끝나고 계산해보니 병원비만 2천만 원이 들었다. 병원에 다니느라 쓴 경비 등은 하나도 포함되지 않은 치료비 만이었다. 그래도 관해치료가 한 번에 잘 끝났고 중환자실에도 가지 않아 최저 수준으로 든 거라고 했다.
지난해 8월 30일 마지막 진료를 하고 퇴원했다. 4개월을 더 쉬고 지난달 3일 복직했다. 여 씨는 회사에 기존에 일하던 자리가 아닌 사내 체육관 관리 업무를 하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그 자리에서 일하는 동료 역시 여 씨처럼 아파서 치료를 받은 후 돌아와 일하고 있었다. 그러나 회사는 여 씨에게 사무실 구석에 책상을 하나 내주더니 아무 일도 시키지 않고 있다. 결국 그는 산재 신청과 기자회견을 결심했다.
여씨는 “25년 동안 남들이 기피하는 공정에서 옮기지도 않고 계속 일한 게 억울하다”고 말했다. 그는 “근로복지공단이 역학 조사를 잘 해서 산재 승인되고 이것이 널리 알려져서 저 뿐 아니라 혹시 예전에 일했던 사람들도 병에 걸리면 치료라도 잘 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기사제휴=울산저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