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1세는 워싱턴의 교황?”

[해외] 새 교황, 월스트리트와 CIA가 후원한 아르헨티나 군부독재에 부역

[편집자 주]19일 오전(현지 시간) 교황 프란치스코 즉위 미사를 앞두고 있는 가운데 아르헨티나 전 군부독재에 대한 그의 부역 논란이 아르헨티나 언론과 세계 진보언론 사이에서 확산되고 있다. 가톨릭계와 주류 외신은 이 같은 논란을 무시하고 있지만 수많은 인명을 납치, 살해, 고문 그리고 실종시킨 군부에 대한 새 교황의 부역 논란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상황에서 <빈곤의 세계화> 저자로 유명한 캐나다 경제학자 미셸 초스도프스키(Michel Chossudovsky)는 아르헨티나와 남미 좌파 정권을 흔들기 위한 워싱턴의 교황이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하고 나섰다. 그는 당시 방문 교수로 남미정권들이 “콘도르 작전” 아래 암살과 첩보 등의 정치적 탄압을 자행한 칠레와 아르헨티나 현장에서 거시경제학 전환이 지역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한 바 있다.

초스도프스키는, 미국 월스트리트와 CIA가 후원한 아르헨티나 군부독재에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프란치스코 1세가 새 교황으로 선출된 것은 다수의 좌파정권이 들어선 남미에 대한 워싱턴의 이해와 밀접하다고 본다. 그가 새 교황으로 선출된 시점은 아르헨티나에서 “콘도르 작전”에 대한 재판 시작과 우고 차베스 대통령 사망 1주일 후이기도 하다. 다음은 16일 캐나다의 세계화 조사기관 <글로벌리서치> 온라인 페이지에 실린 내용이다.



바티칸 콘클라베는 호르헤 마리오 베르고글리오를 새 교황으로 선출했다.

호르헤 마리오 베르고글리오는 누구인가?

[출처: http://www.globalresearch.ca]
1973년, 그는 아르헨티나 예수회의 관구장으로 지명됐다.

이 지위로 베르고글리오는 호르헤 비델라 군사독재(1976-1983) 동안 아르헨티나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있었다.

그는 후에 주교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대주교가 됐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2001년 그를 추기경으로 임명했다.

1983년 군사정권이 권력을 내준 후 선거에 당선된 라울 알폰신 대통령은 “더러운 전쟁”의 기저를 이룬 범죄와 관련된 진실위원회를 세웠다.

군사정권은 워싱턴의 은밀한 지지를 받았다.

미국 헨리 키신저 국무부 장관은 1976년 군사쿠데타 뒤에서 비밀 역할을 수행했다.

키신저의 남미 담당 수석대표인 윌리엄 로저스는 그에게 쿠데타 2일 후 “우리는 조만간 아르헨티나에서 억압에 필요한 많은 양의 피를 봐야 할”이라고 말했다(미국 국가 안보 기록 보관소, 2006년 3월 23일).

“콘도르 작전”

  헨리 키신저와 호르헤 비델라(1970년대) [출처: http://www.globalresearch.ca]
모순적이게도, 베르고글리오 추기경이 교황으로 선출되기 1주일 전인 3월 5일,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는 중요한 재판이 시작됐다. 이 재판은 “수만 명의 반대자들을 상해, 고문, 살인했던 군부의 범죄 전체와 콘도르 작전 아래 미국이 다양한 형태로 지원한 1970년대와 1980년대 남미 독재들의 협력 과정 심문을 대상으로 한다.

호르헤 비델라가 이끈 군사정권은 CIA 후원 아래 1976년 3월 24일 이사벨 페론 정부를 전복하고 신부와 수녀를 포함해 이에 반대하는 수많은 이들을 암살했다.

“비델라는 다른 장교들과 함께 ‘실종’ 사건을 포함해, 고문, 살해, 납치 등 인권 범죄로 유죄 판결받았고 1985년,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출처: http://www.globalresearch.ca]

월 스트리트와 신자유주의 경제 아젠다

(월스트리트 지시를 받는) 군사정권의 핵심 인물 중 한 명은 경제부 장관 호세 알프레도 마르티네스 데 오스였다. 그는 아르헨티나 기업 단체의 구성원이자 데이비드 록펠러와 가까운 친구였다.

[출처: http://www.globalresearch.ca]
마르티네스 데 오스가 채택한 신자유주의 거시경제 정책 패키지는 피노체트 독재가 1973년 9월 11일 군사쿠데타를 실행하고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을 학살한 후 [신자유주의 전도사로 양성된 경제학자들인] “시카고 보이스Chicago Boys”로부터 자문 받으며 1973년 10월 칠레에 부과한 “복사본”이었다.

임금은 법령에 따라 즉시 동결됐다. 실질 구매력은 쿠데타 후 3달 만에 30% 이상 떨어졌다. 아르헨티나 인구는 빈곤해진다.

마르티네스 데 오스 경제부장관 조정 아래 중앙은행 통화정책은 대체로 월스트리트와 IMF가 결정했다. 페소는 갚을 재간이 없는 외부 부채를 야기하며 의도적으로 과잉평가 됐다. 국가의 전 경제는 파산으로 유도됐다.

  왼쪽부터 호세 알프레도 마르티네스 데 오스, 데이비드 록펠러와 호르헤 비델라 장군 [출처: http://www.globalresearch.ca]
월스트리트와 가톨릭 교회의 고위층

월스트리트는 자기 대신 “더러운 전쟁”을 수행한 군사정권 뒤를 확고히 지켰다. 가톨릭교회 계층은 군사정권의 적법성을 지지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가톨릭교회 내 여전히 가장 영향력 있는 파벌인 보수층을 대변하며, 아르헨티나 경제 엘리트와 가까운 관계를 가지는 - 예수회의 지도층은 페론주의자 내 소위 “좌파들”을 대적했던 군사정권을 확고히 지지했다.

“더러운 전쟁”: 베르고글리오에 대한 혐의

  호르헤 마리오 베르고글리오와 호르헤 비델라 장군 [출처: http://www.globalresearch.ca]
군사독재(인권 탄압을 포함해)에 대한 비난은 가톨릭 내에서 금기였다. 교회의 상층부는 군사정권을 지지한 반면, 교회의 기층은 군정에 확고히 반대했다.

2005년, 인권변호사 미리암 브레그만은 1976년 예수회 신부 2명 납치에 대한 군정과의 공모를 이유로 베르고글리오를 고소했다.

수년 후, “더러운 전쟁”의 생존자들은 공개적으로 베르고글리오 추기경을 프란시스코 할리스와 올란도 요리오 신부와 그들 교구의 6명에 대한 납치 공모를 이유로 고소했다(엘 문도, 2010년 11월 8일).

당시 예수회 “관구장”이었던 베르고글리오는 가톨릭교회의 역할과 군사정권과의 관계로 예수회 내부가 분열하자 두 명의 “좌파” 신부와 군정 반대자들에게 “그들 목회를 떠나라”고 명령한다(파면된 것).

1976년 5월 2명의 신부는 암살단에 납치되고 고문 받은 5개월 후 풀려난 반면, 동일 작전으로 납치된 다른 6명은 “실종됐다”. 이들은 교구와 관련된 4명의 교사와 이들 남편 2명이었다.

올란도 요리오 신부는 “베르고글리오가 (다른 6명을 포함해) 암살단에 그들을 넘기는 데 관여했다고 고소했다. 프란시스코 할리스는 독일 수도원으로 옮긴 후 더 이상의 대화를 거부했다(AP, 2013년 3월 13일).

1985년 군사정권 책임자에 대한 첫 번째 재판 중 요리오는 “나는 그가 해군에 우리 명단을 넘겼다고 확신한다”고 밝혔다. 2명은 해군 고문기관에 보내졌고 5달 동안 감금됐으며 도시 외곽에 마약에 취한 채 버려졌다[...].

[출처: http://www.globalresearch.ca]
예수회 “관구장” 호르헤 마리오 베르고글리오에 의해 “암살단”에 넘겨진 것으로 추정되는 마리아 마르타 바스께스, 그의 남편 케사르 루고네스(사진 오른쪽)과 모니카 칸델라리아 미뇨네는 “콘도르 작전” 아래 워싱턴이 은밀하게 지원했던 아르헨티나 “더러운 전쟁” 중 실종된 수천 명에 포함된다(memorialmagro.com.ar를 보라).

2005년 발의된 재판 과정에서:

“베르고글리오는 공개 법정 출석을 2번 거부했고, 결국 2010년 법정에 나와야 했지만 그의 대답은 얼버무리는 것이었다”: “베르고그릴리오는 적어도 2개의 소송에 직접적으로 연루돼 있다. 하나는 신부 2명에 대한 고문에 대한 조사이다[...](로스엔젤레스타임스, 2005년 4월 1일).

독재자들을 위한 거룩한 성찬식

  호르헤 비델라가 베르고그릴리오로부터 성찬을 받고 있다. [출처: http://www.globalresearch.ca]
그러나 납치된 2명의 신부와 6명의 사건은 빙산의 일각이다. 베르고글리오는 가톨릭교회의 중요 인물이었고, 군사정권을 지지한 것은 그 뿐이 아니다.

미리암 브레그만에 따르면: “베르고글리오 그 자신의 진술은, 교회 관료들은 일찍부터 군정이 시민들을 고문하고 살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독재를 지지했다는 것을 드러낸다. “이들의 핵심적인 지지 없이 독재의 방식은 작동하지 않았을 것이다”(2005년 4월 1일 로스엔젤레스타임스).

가톨릭 계층 전체가 미국이 후원한 군사 독재 뒤에 있었다.

“비델라와 다른 음모자들은 육군 전체의 사제이기도 했던 파라나 대주교 아돌포 토르톨로의 축복을 받았다. 쿠데타 후 군부는 주교회의 지도자들과 긴 회의를 가졌다. [...] 그는 아르헨티나인들에게 새 정부와 “긍정적인 방식으로 협동하라”고 촉구했다(2011년 1월, Humanist.org).

엘 수르와의 인터뷰에서, 호르헤 비델라 장군은:

그는 이 나라에서 “실종되고 있는” 반대자들에 대한 정책에 대해 가톨릭 고위층에 정보를 제공해 왔고 가톨릭 지도자들은 이 정책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에 관해 조언했다.

호르헤 비델라는 그가 아르헨티나 대주교인 라울 프란치스코 프리마테스타 추기경과 좌익 활동가에 대한 자기 정권의 더러운 전쟁에 대해 “많은 대화”를 나눴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피오 라기 교황대사 뿐 아니라 아르헨티나의 주교회의의 다른 주도적인 주교와도 많은 대화가 진행됐다고 말했다.

“그들은 우리에게 이 상황을 처리하기 위한 방식에 대해 조언했다”고 비델라는 말했다(아이리쉬타임스, 2012년 7월 24일).

아돌포 토르톨로 대주교의 1976년 진술에 따르면, 군대는 항상 기층 성직자에 대한 “체포” 사건에 가톨릭 고위층 구성원과 상의했다. 이러한 진술은 특히 납치된 2명의 예수회 신부와 관련해 제기됐다. (엘 페리오디스타 온라인, 2013년 3월).

군사정권 지지로 인해 가톨릭 고위층은 1976년에서 1978년까지 약 2만2천명이 사망하고 실종시킨 고문과 대량 학살에 연루됐다. 1978년에서 1983년 군부가 권좌에서 쫓겨 났을 때 수천 명이 다시 살해됐다(미국 국가 안보 기록 보관소, 2006년 3월 23일).

바티칸의 역할

  바티칸 눈시오 피오 라그히와 호르헤 비델라 장군 [출처: http://www.globalresearch.ca/]
교황 바오로 6세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아래 바티칸은 아르헨티나 군사정권을 지지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아르헨티나 주재 바티칸 교황대사였던 피오 라기는 고문과 살육에 “눈이 멀어져간다”는 점을 인정했다.

라기는 비데라 장군과 에밀리오 에두아르도 마세라 해군제독을 포함해 지배 군정 일원과 친분을 가졌다.

미국 정보경찰과 가까운 연락관계에 있었던 마세라 해군제독은 “더러운 전쟁”의 지위자였다. 군사정권의 후원 아래 그는

:해군공병학교 내 심문고문센터(ESMA)를 설립했다. (...) 그것은 “국가의 적”인 약 3만 명을 암살한다는 군사계획 내 필수적인 정교하고, 다목적인 기구였다. ... 예를 들면, 2명의 프랑스 수녀를 포함해 ESMA의 수천 명의 수감자들은 정기적으로 무자비한 고문을 받았으며 살해되거나 항공기로 라플라타강에 떨어졌다.

3군 참모총장 중 가장 막강했던 마세라는 워싱턴과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열성적이었다. 그는 남미군사정권에 의해 실행된 테러에 협력하는 책략을 꾸미고 콘도르 계획 개발을 지원했다. (마세라 해군제독: 아르헨티나 1976년 쿠데타에 가담했고 후에 이를 이유로 수감. 인디펜던트, 2010년 11월 10일)

보고서를 통해 바티칸을 대표하는 피오 라기와 에밀리오 마세라 해군제독이 친구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가톨릭교회: 칠레 vs 아르헨티나

  바티칸에서 교황 바오로 6세가 "더러운 전쟁"의 설계자, 에밀리오 마쎄라 해군사령관을 환영하고 있다. [출처: http://www.globalresearch.ca]
1973년 9월 11일 칠레에서 군사쿠데타가 발발했을 때 산티아고 추기경이었던 라울 실바 엔리께스는 피노체트가 주도한 군사정권을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아르헨티나와는 매우 대조적으로, 칠레 가톨릭 고위층의 입장은 살바도르 아옌데와 군사정권의 야권 지지자들에 가해진 정치적 암살과 인권 탄압을 억제하는 데 중요했다.

종교간 평화를 지지하는 위원회(Comité Pro-Paz)를 지원한 이는 라울 실바 엔리께스 추기경이었다. 쿠데타 직후, 실바는 ... [모두가 행동하지 않을 때 먼저 나선] “업스탠더”의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업스탠더는 부당함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바이스텐더(방관자)”와 구별하기 위해 작가이자 활동가인 사만다 파워 만든 말이다.

쿠데타 후 곧 실바와 다른 교회 지도자들은 살육을 비난하고 이에 대한 슬픔을 표현하는 선언을 발표했다. 이는 칠레 성직자 구성원의 많은 이들에게 근본적인 터닝포인트가 됐다. 추기경은 국립경기장을 방문했고 정부의 살인 진압 규모에 충격 받았으며 교회 피난처로 모여든 수천 명으로부터 정보를 모으라고 측근에 지시했다.

실바의 행동은 교회와 평화를 지지하는 위원회를 위협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던 피노체트와의 공식적인 갈등으로 이어졌다.

아르헨티나 가톨릭 고위층과 호르헤 마리오 베르고글리오는 라울 실바 헨리께 추기경과 비슷한 입장을 취했다면, 수천 명의 생명을 구했을 것이다.

호르헤 마리오 베르고글리오는 사만다 파워의 말처럼 “방관자”는 아니었다. 그는 인류에 대한 광범위한 범죄에 연루돼 있었다.

교황 프란치스코는 서구 언론이 코러스를 부르며 묘사한 것처럼 아시시의 성 프란시스의 뒤를 따라 “가난한 이들을 돕는다”는 “민중의 사람”이 아니다. 군사정권 아래 그의 활동은 지속적으로 풀뿌리 반빈곤 프로그램을 진행했던 인권활동가들과 가톨릭 성직자 중 진보적인 구성원을 표적으로 했다.

아르헨티나의 “더러운 전쟁”을 지원하며, 베르고글리오는 인간 삶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크리스도교의 도덕률의 중요한 계명을 뻔뻔하게 위반했다.

“콘도르 작전”과 가톨릭교회

바티칸 콘클라베가 베르고글리오 추기경을 교황으로 선출한 것은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진행 중인 “콘도르 작전” 재판에 즉각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교회는 군사정권 지지에 개입됐다. 이는 이 재판 소송 과정에 나타날 어떤 것이다. 의심할 것 없이, 가톨릭 고위층과 최근 지명된 군사 독재 시절 아르헨티나 예수회 우두머리로 재직한 교황 프란치스코 1세의 역할을 얼버무리려는 시도가 나타날 것이다.

호르헤 마리오 베르고글리오: “워싱턴의 바티칸 교황?”

교황 프란치스코 1세 선출은 남미 전 지역에 대한 폭넓은 지정학적 영향력을 가진다.

1970년대, 호르헤 마리오 베르고글리오는 군사독재를 후원한 미국을 지지했다.

아르헨티나 가톨릭 고위층은 군사정부를 지원했다. 워싱턴은 CIA의 “콘도르 작전”으로 군정의 수많은 야권 인사에 대한 고문, 암살과 ‘실종’ 조치에 협력하고 지원했다.

경제부처 장관은 월스트리트의 이해를 관철시켰다.

남미 가톨릭교회는 정치적인 영향력이 있다. 이들은 여론을 흔들 수 있다. 이는 미 정보기관 뿐 아니라 미국 대외 정책 설계자들이 알고 이해하는 사실이다.

이제 많은 정부들이 미국 헤게모니에 맞서는 - 베르고글리오의 실적이 쌓인 - 남미에서 누군가는, 가톨릭 교회의 지도자로서 새 교황 프란치스코 1세가 사실상 워싱턴의 정치적 역할을 “비밀리에 수행”할 것이라고 예상할 것이다.

‘호르헤 베르고글리오, 프란치스코 1세 교황으로 - 아르헨티나 독사독재 시절 미국 이해에 충실하게 봉사했던 - 남미 가톨릭교회 고위층은 다시 한번 (현 크리스티나 키르치네르 정부의) 아르헨티나에서뿐 아니라 베네수엘라, 에콰도르와 볼리비아 전 지역을 통틀어 “진보적인” (좌파) 정부 토대를 허물기 위해 효과적으로 조종될 수 있다.

“친미 교황” 선출은 우고 차베스 사망 후 1주일 만에 일어났다.

바티칸에서의 “정권 교체”

미 국무부는 안보리 결의안과 관계된 투표에 영향을 미치는 견해로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구성원에 일상적인 압력을 행사한다.

미국 비밀 작전과 프로파간더 캠페인은 전 세계 다양한 국가에서 중요 선거에 영향을 미치는 견해를 지속적으로 적용시킨다.

비슷하게, CIA는 바티칸과 긴 세월 동안 비밀 관계를 가졌다.

미국정부가 새 교황 선출 결과에 영향을 미치려 시도했을까?

베르고글리오는 남미에 대한 미국 대외 정책 이해에 확실히 전념했다는 측면에서, 워싱턴이 선호하는 후보였다.

워싱턴은 가톨릭교회 내,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바티칸 콘클라베 구성원인 115명의 추기경에 대해 개별적으로 비밀스런 압력을 가했을까?


[필자의 메모]

1976년 군사정권 초부터, 나는 아르헨티나 코르도바 국립대 사회정책연구소 방문 교수였다. 당시 나의 주요 연구 대상은 군사정권이 채택한 살인적인 거시경제가 미친 사회적인 영향을 조사하는 것이다.

나는 진보적인 가톨릭 성직자 기층에 대해서도 행해진, 초기 일련의 암살 기간 동안 코르도바국립대에서 강의했다.

코르도바의 북부 산업도시는 저항운동의 중심지였다. 나는 가톨릭 고위층이 이 나라 도처에서 협박과 공포 분위기를 만들며 어떻게 적극적이며 일상적으로 군사정권을 지원했는지 목격했다. 당시 일반적인 느낌은 아르헨티나인들은 가톨릭 교회 상층계급에 배신됐다는 것이었다.

칠레 살바도르 아옌데 인민연합 정부를 전복시킨 1973년 9월 11일 군사쿠데타가 일어나기 3년 전, 나는 칠레 산티아고의 칠레가톨릭대 경제학연구소에 방문 교수였다.

칠레에서 쿠데타가 즉각 발발하면서, 나는 산티아고 추기경 라울 실바 헨리께가 가톨릭교회를 대표해 어떻게 군사독재에 맞섰는지 목격했다.


[원문]http://www.globalresearch.ca/washingtons-pope-who-is-francis-i-cardinal-jorge-mario-bergoglio-and-argentinas-dirty-war/5326675
[원제]“Washington’s Pope”? Who is Pope Francis I? Cardinal Jorge Mario Bergoglio and Argentina’s “Dirty War”
[게제]2013년 3월 16일
[번역]정은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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