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라 할아버지로부터

[최인기의 사진세상](26) 청계천 신화는 없다


‘신개발주의’ 라는 말은 한국에서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본격화되면서 등장합니다. 현대 사회에서 주요한 담론으로 떠오르고 있는 이미지들, 가령 ‘생태, 환경, 역사와 문화 복원’ 등 삶의 질을 규정하는 중요한 주제들이 개발과 서로 결합을 시도하지만 실상은 자본주의적 성장과 개발에 따른 모순을 은폐한다는 의미입니다.

이 말이 정확히 관철되는 곳이 바로 청계천입니다. 청계천은 그 길이가 5.8km로 외국에서는 이 정도의 도심하천을 복원할 때 보통 10년 이상 걸려 완공을 한다는 사업입니다. 그만큼 이해당사자간의 합의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불과 약 3년 만에 뚝딱 공사를 해치우고 말았으니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이러한 사업이 가능했던 것은 당시 이명박 서울시장의 저돌적인 추진력과 콘크리트 같은 뚝심이라고 사람들은 믿었습니다.


청계천을 설명하는데 빠질 수 없는 분이 계십니다. 노무라 모토유키. 혹시 이 분을 기억하십니까? 청계천과 4대문에서 밀려난 철거민들이 정착한 곳은 성북구 월곡동과 길음동, 노원구 백사마을 등이었습니다. 참세상 ‘사진세상’에 연재했던 노원구 백사마을의 현대이발관 김창호 씨를 기억하시나요? 우연히 이 사진을 본 ‘노무라 모토유키’씨가 청계천에서 알던 사람이 현대이발관 주인과 닮았다며 이분을 찾는 메일을 저에게 보내셨습니다. 곧바로 다음날 백사마을에 들려 수소문해보니 안타깝게도 ‘노무라 모토유키’ 씨가 찾는 분이 아니더군요.

그 후로 저희 집에 작은 소포가 하나 배달됐습니다. 이날의 답례품으로 수천 장의 청계천 사진을 USB에 모아 보내주셨습니다. 노무라 모토유키 씨의 직업은 목사입니다. 그러나 자신을 할아버지라고 불러 달라 하십니다. 그는 목사가 누리는 권력과 일방적인 존경에 대해 거부합니다. 특히 사회적 신분이나 격차를 나타내는 표현을 무엇보다도 싫어합니다. 다음은 저에게 보낸 노무라 할아버지의 메일입니다. 당시의 시대상을 알아보겠습니다.


“청계천에는 수십만 명의 빈민들이 거주하고 있었어요. 하루는 한국인 목사와 함께 한 집을 방문했습니다. 창문도 없는 좁은 방에 10살 정도로 보이는 소녀가 누워 있었어요. 한국인 목사가 소녀의 치마를 들추니 소녀의 허벅지 부근에는 하얀 뼈가 드러나 있었습니다. 파리 떼가 윙윙거리는 소리를 내며 소녀의 뼈 위를 날아다녔습니다. 소녀의 다리에 파리 떼가 수천 개의 알을 낳았고, 구더기가 득실거렸습니다. 구더기들이 얼마 남지 않은 살을 파먹고 있었습니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 서울로 몰려들었던 사람들이 일구어 놓은 청계천 뚝방의 모습입니다.



1970년대로 접어들면서 청계천은 교통량이 증가하고 더러운 폐수가 도심 하천을 흐른다는 이유로 아스팔트로 덮는 복개공사가 1960년대 말 착공하여 1978년 완공됩니다. 국제공항인 김포공항에 내린 외국관광객이 차로 한강근처에 있는 워커힐호텔까지 급행으로 달릴 수 있도록 1967년부터 1979년까지 고가도로 공사가 추진됩니다. 그리고 고가도로 위 달리는 차안에서 바라보는 판잣집을 가리기 위해 복개된 청계천을 따라 지어진 아파트가 삼일아파트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물론 삼일빌딩도 청계천의 빼놓을 수 없는 구경거리였지요. 31층이라 붙여진 이름인 삼일빌딩은 한국의 경제성장을 상징하는 그야말로 ‘랜드 마크’나 다름없었으니까요.

필자가 70년대 말 청계천 삼일아파트에서 살던 시절 청평화 시장 앞에서 7번과 34번 버스를 타고 종암동으로 통학을 할 때 왕십리 근처는 아직 복개공사가 채 끝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결국 복개공사가 진행되면서 사람들의 삶도 변하게 됩니다. 청계천에서 거주하던 사람들은 어디론가 밀려나게 되었지요. 그곳 가운데 한곳이 바로 ‘경기도 광주’였습니다.

서울시는 1968년부터 서울시내 무허가 판잣집 정리사업의 일환으로 경기도 광주군에 철거민 집단 이주 단지를 계획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주민의 생계대책 없이 졸속으로 추진되자 마침내 1971년 8월 10일 광주대단지 주민 5만여 명이 정부의 무계획적인 도시정책과 졸속행정에 반발하여 박정희 군부독재 시절 당시로써는 상상하기 어려운 도시빈민 저항 사건이 벌어지게 됩니다.



2012년 2월 13일, 서울 종로구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 있는 위안부 소녀상 앞에서 일제강점기 일본인의 만행을 속죄하면서 플루트로 ‘봉선화’를 연주한 노무라 할아버지는 그리고 눈물을 훔치셨다지요. 물론 이 일로 노무라 모토유키 씨는 일본 우익들의 전화와 메일 협박을 지금도 받고 있다고 합니다. 사실 이분은 한국의 빈민운동 1세대와 다름없습니다. 故 제정구 의원과 함께 1970년대 청계천 빈민운동을 벌였던 사람입니다. 오래전 청계천의 이야기를 들어 보겠습니다.

“자살 청년 시신을 수습한 일도 잊을 수 없습니다. 1974년 어느 날 다리 밑 오물구덩이에 시신 한 구가 떴으나 누구도 수습하지 않았어요. 같이 있던 김 목사가 막대기로 끄집어냈어요. 무연고자라 사망진단서조차 끊을 수 없었습니다. 진단서 끊는 것도 돈이 있어야 했거든요. 돈 있는 사람은 저뿐이어서 경찰에게 여권을 보여주며 사정했더니 안 된다는 겁니다. 뇌물 주고 허가 받아 리어카에 실어 소각장으로 향했어요. 그곳에서도 뒷돈이 필요했습니다. 화장한 뼛가루를 다시 청계천으로 가져와 다리에서 뿌렸습니다. 정말 슬펐습니다.”


사진은 노무라 할아버지가 전태일 열사의 분신 직후 평화 시장의 2층, 3층 봉제공장에서 촬영한 사진입니다.

“자살자가 있던 것으로부터, 외국인의 방문을 KCIA 남산 사복이 엄중하게 경계 감시하고 있었습니다. 은밀하게 방문해, 허가를 얻어 촬영한 것입니다. 어린노동자의 급료는, 1개월에 20달러였다고 메모한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노무라 할아버지가 보낸 사연에 따르면 당시 필름으로 구동하는 방식의 카메라가 있더라도 아들이 돌이 됐거나, 부모님 환갑잔치 같은 날에 사진을 한 장, 두 장씩 찍어 남기는 게 전부였다고 합니다. 정부에서도 길을 닦거나 건물을 세울 때마다 산업화를 강조하기 위한 목적으로 건물 앞에 모여 사진을 찍었다고 합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소수의 부잣집 가족사진이나 건물사진은 많은데 사람들이 길거리를 걸어 다니는 사진이나, 추석에 삼륜트럭에 앉아 귀성하는 모습 등의 사진은 찾기 힘들었답니다.

서민층의 사정도 이런데 가난한 사람들의 경우는 더 말할 것도 없고 한창 공업화가 진행되고 있던 탓에 더러워진 청계천에서는 악취가 풍겼으며 더럽다고 모두가 피하는 그곳에 갈 곳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 삶의 터전을 꾸려갔다고 합니다. 청계천은 서울의 중심을 관통하고 있지만 아무도 보지 않는 곳, 아무런 기록도 남지 않아 역사의 어두운 곳에서 잊힐 곳이었다고 증언합니다. 이 당시에 모은 노무라 할아버지의 한국에 관한 기록물은 수백 권에 달하며 2005년에는 서울역사박물관 및 청계천 문화관에 자신이 촬영한 사진과 청계천 관련 자료 2만여 점을 기증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자! 이제 청계천으로 다시 돌아가겠습니다. 2003년 7월 들어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에 의해 청계천은 복원되기 시작합니다. 불과 약 25년 만에 청계천에 대한 패러다임은 바뀌게 되고 ‘생태, 환경, 역사와 문화 복원’ 라는 기치 아래 시민들의 지지로 청계천은 또다시 뜯겨 이번에는 복원공사가 추진됩니다. 청계천 복원 공사는 일본 오사카의 중심거리를 흐르고 있는 ‘도톤보리천’의 복원사업을 그 모델로 하고 있습니다. ‘도톤보리천’은 청계천복원구간 5.4km보다 훨씬 짧은 1.4km구간으로 고가도로조차 없지만 95년부터 2010년까지 15년 동안 사업이 진행되었습니다. 하천복원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기술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그곳에 거주하는 주민들과의 기나긴 합의 과정이 그만큼 중요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공사 설계도를 수정해 나가며 하천 복원을 추진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청계천 복원 사업은 어떤가요? 2003년 7월 1일 착공하여 2005년 10월 1일까지 불과 2년 3개월 만에 총 공사비 약 3,800억 원을 사용해 복원되었으며, 청계천 주변의 주민과 상인 등 이해 당사자 간의 합의아래 추진되었다고 선전하고 있습니다.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다음은 환경과 문화재 복원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같은 공간 같은 장소라 할지라도 개개인의 경험에 따라 인식의 편차는 천차만별이라는 것은 익히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어느 공간의 거대한 바위에 대하여, 고고학자의 눈에는 수천 년 선인들의 숨결이 살아있는 역사적 유물인 고인돌일 수도 있고, 개발업자에게는 건물을 짓거나 도로를 뚫는데 방해물이거나 부숴 버려야 돌덩어리에 불과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하여 역사문화의 가치에 의미를 부여하는 이와 단순히 바위덩어리로 보는 이들의 인식의 차이는 이제 우리 주변에 흔히 볼 수 있는 이야깃거리가 되어 언론의 한 지면을 장식하곤 합니다. 청계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청계천 공사를 통해 발굴되는 광통교터, 수표교터, 오간수문터의 주변에 대해 한때 문화재청은 사적으로 지정을 예고하였습니다. 이 유적지들이 사적으로 지정되면 주변 건축물들은 높이 제한을 받게 됩니다. 조례에 따르면 사적지 주변은 반경 20m의 보호구역을 포함해 유적으로부터 120m까지 앙각 27도의 규정을 적용받아 유적지 인근지역은 2층 정도의 건물만이 들어서게 됩니다. 하지만 건물높이 제한에 대해 서울시와 건설업체가 반발하여 그 후 청계천변의 문화재는 날림으로 복원됩니다.

뿐만 아니라 친환경 복원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하루 수천 톤의 물을 전기 동력으로 끌어올려 쏟아 부어야만 하는 커다란 인공어항이라는 지적을 받고 있습니다. 여름철만 되면 이끼를 벗겨내느라 또 얼마나 많은 혈세를 쏟아 붓는지 모릅니다. 복원공사가 끝나자마자 수많은 시민이 지지를 보냈지만 시간이 지난 후 이러한 믿음은 쓴 웃음을 짓게 만들었습니다. 시민들이 그렇게 지지를 보낼 수밖에 없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개발과 성장제일주의에 우리 모두 깊숙이 포섭된 결과라 할 것입니다. 청계천은 한마디로 소위 ‘신개발주의’ 의 완결판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청계천을 둘러싼 노무라 할아버지의 이야기는 우리를 숙연케 합니다.

“과대평가는 사람을 타락시킵니다. 가치가 없는 자신을 마치 가치가 있는 것처럼 오해시키는 무서운 함정과 같습니다. 나는 가족과 함께 할 수 있는 것을, 전신·전력으로 성실하게 했을 뿐입니다. 그것을 자랑으로 생각했다든가, 마치 무엇인가를 주어 이루었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다. 한국의 친구, 빈민지역이나 피폐했던 농촌이나 어촌에서, 땅에 달라붙어 하루하루 살아 온 사람들로부터 배웠습니다. 많은 축복을 받고, 감사의 인생을 보냈을 뿐입니다. 과대평가는 함정입니다. 일본의 최근 가요에 ‘돼지도 치켜세우면 나무에 오른다’ 라는 것이 있습니다. 더 이상, 우리는 돼지처럼 나무에 올라서는 안 됩니다.”

”...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 있는 민중들, 매춘부를 위로하고 술주정뱅이에게 귀를 기울여 잔을 같이 하는 이가 있었으면 했습니다. 내가 송정동이나 답십리 등을 걸을 당시 카메라를 목에 걸고 걷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카메라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던 시대입니다. 사람들은 곧바로 외국인으로 알아봤습니다. 사람들은 ‘일본사람’ 을 경계하는 시대였습니다. 서로의 귓전에 한 손을 대고, 주변을 둘러보며 작은 소리로 이야기하는 긴장의 시대였습니다. 나는 한국어를 충분히 하지 못하고, 또, 항상 ‘그림자’와 같이 누군가가 미행하고 있는 공포감에 사로 잡혔습니다. 특히, ‘노무라 담당관’이라고 불리는 종로 경찰의 일본어를 할 줄 아는 형사와 남산의 사복, 영어를 하는 젊은 인물도 있었습니다. 육군 보안부에도 있던 것 같습니다만...”




‘로만 인가르덴’이라는 서양의 철학자는 실존적 장소의식이라 명명한 바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승효상의 건축 ‘감각의 단면’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토지를 점거해야 하는 건축은, 그 장소가 요구하는 특수한 조건들을 맞추어줘야 한다고 말합니다. 기후와 지리 등의 자연적 조건뿐 아니라 우리의 삶이 일궈낸 인문 사회적 환경 속에서 조화롭게 세팅되고 알맞은 옷을 입을 때 이는 그 장소에 적확한 건축이 된다고 합니다. 서울 시내 피라미드가 우습게 보이듯이 파리에 짓는 한국 집은 전시대상은 될지 몰라도 그곳에서의 삶과는 한참 거리가 있다고 말합니다.

토지는 그 규모에 관계없이 우리 인간의 삶 이전에 태어나 있었으며 그 이후로 영겁의 세월을 지내 왔습니다. 그 세월 속에서 수많은 사연들이 담기고 또 지워졌을 것이며 그러한 흔적의 축적은 형언키 어려우리만큼 엄청난 양으로 그 속에 용해되어 있을 것입니다. 토지의 위치가 어느 곳에 있든 토지는 고유하며, 고유성으로 인해 그 가치는 그것의 중요도에서 비교 평가절하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장소성의 회복은 건축가로서 지켜야 할 토지에 대한 신성한 의무가 된다고 합니다. 건축과 관련된 이야기지만 도시 공간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어서 옮겨봤습니다.


사진은 2003년 청계천은 차별천이라며 항의하는 장애인들의 모습입니다. 최옥란, 정태수, 박흥수 씨 이들은 1995년 노점상 장애인 최정환 씨의 분신사건 이후 장례식을 마치고 노점상들과 함께 ‘장애인 자립추진위원회’를 결성하여 청계천 9가를 중심으로 장사를 하기 시작 했습니다. 그리고 생계를 유지하며 장애운동과 빈민운동을 펼치다 지금은 모두 유명을 달리한 사람들입니다. 2002년 청계천 복원공사를 시작하기 전 노점단속에 항의하다 분신 사망한 박봉규 씨. 그리고 노무라 할아버지가 청계천의 작은 판잣집에서 목격한 죽어가는 한 소녀의 모습, 오물구덩이에서 끄집어낸 시신, 그리고 평화시장 앞에서 분신해 숨져간 청년 전태일... 한마디로 차별과 배제가 노골화된 청계천의 숨겨진 이면입니다. 어쩌면 시간이 지난 후 후세들은 뉴타운 사업과 청계천 복원 사업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할지도 모릅니다.


“결국 이곳은 건설자본의 이윤을 넓히기 위한 그리고 이를 지리적으로 원활히 집중하고 배분하기 위한 민관합작의 거대한 프로젝트였을지도 몰라. 뿐만 아니라 한 정치인의 정치적 야욕과 비리로 점철된 사업이었지” 라고 말입니다. 이제 청계천 이야기는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 노무라 할아버지가 보내준 수천 장의 사진은 곧 사진집으로 발간될 계획입니다. 그리고 몇 달 후 한국을 방한할 계획도 가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