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20대만 묶어 이야기하는 걸 싫어한다. 사람의 나이를 십 년씩 끊어 헤아려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 우리가 십진법이 아니라 다르게 짜인 숫자틀을 써먹어 버릇했다면 5년씩 또는 6년씩 묶어 나이를 헤아렸을 것이다. 20대라는 건 철학적인 개념이 아니라 수학적 개념이다. 그래서 20대는 수학을 벗어나는 순간 그 의미를 잃고 허공에 붕 뜨게 된다. ‘20대’를 주어로 쓰는 문장은 ‘진보’나 ‘보수’를 주어로 쓰는 문장과 비슷해진다. 너무 애매하기 그지없다. 저마다 다른 환경에서 자라 세상을 보는 눈이 다를 수밖에 없는 젊은이들을 고작 숫자로 묶어 부르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그럼에도 누구나 20대가 어쩌구저쩌구 이빨을 까는 이유는 그래야 장사가 되기 때문이다. 다들 20대는 젊음이요 젊음은 20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상품 하나 더 팔기 위해 몸값 비싼 연예인을 광고 도우미로 쓰듯, 상품이든 이론이든 실천이든 20대를 위해 만들었다는 꼬리표를 붙이면 더 쉽고 비싸게 팔 수 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20대에 ‘꼴’을 주어서 사람들이 쉽게 알아먹을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허깨비와도 같은 20대에게 너희들은 개새끼라고, 세상과 맞설 줄 모르는 등신들이라고 백날 말해 봐야 소용이 없다. 젊은이들 한 떼거리를 20대라고 부르는 순간 그들 속 남자와 여자, 부자와 가난뱅이, 장애인과 비장애인,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와 실업자, 동성애자와 이성애자 등등 모든 차이들은 모조리 뭉뚱그려져 사라진다. 계급의 문제를 비롯한 갖가지 문제들이 오직 세대의 문제로 모아진다. 20대? 그게 뭐가 어쨌다는 것인가? 20대라고 다 같은 20대일까?
그래도 대학에 다니는 ‘20대’들은 대자보라도 붙여서, 안녕하지 못하다느니 부끄럽다느니 지껄일 수도 있고 화젯거리가 될 수도 있으며 ‘시대에 정직하게 응답하는’ 젊은이인 것처럼 스스로를 꾸밀 수도 있다. 하지만 대학 문턱에도 가지 못한 젊은이들은? 책 끼고 다니며 술이나 처먹는 대학생들 말고 기계 돌리며 쇳밥 먹는 젊은이들은? 밭 갈고 소 먹이는 젊은이들은? 장애인 시설에 갇혀 사는 젊은이들은? 그들에게는 누가 안녕하시냐고 물어 줄까? 그들의 목소리는 누가 대자보에 적어 줄까? 내 눈에는 안녕하시냐고 묻는 모든 대자보들이 대학이라는 똑같이 생긴 방석을 깔고 앉은 젊은이들의 말잔치로밖에 안 보인다. 그들에겐 자신의 부끄러움을 눈에 잘 띄는 곳에 빨래처럼 널어놓을 수 있는 특권이 있다.
왜? 젊은 대학생이니까.
안녕하지 못하다고 대자보 써 붙이고 나면 다들 토익 공부를 집어치울까? 대학을 그만두고 꿈과 희망을 찾아 먼 곳으로 길을 떠날까? 아니면 집회를 찾아 산기슭을 헤매고 다니는 하이에나가 될까? 아니다. 그들이 자신의 삶에 뭔가 문제가 있다고 느꼈다면 진작 스스로 목숨을 끊었거나 학교를 때려치웠을 것이다. 그들은 대자보에 국정원 댓글, 쌍용자동차, 밀양송전탑, 철도 파업 등등 굵직한 화젯거리들을 갖다붙이지만 그런 대자보조차 쓸 수 없는 다른 젊은이들에겐 마음을 쓰지 않는다. 그저 자신들이 이 세상 젊은이들을 대표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내가 읽은 대자보들 가운데 대부분은 ‘소속 대학’, ‘학번’, ‘이름’을 똑똑히 밝혀 놓았다.) 앞으로도 그들은 자신들이 깔고 앉아 있는 방석을 결코 포기하지 않은 채 때때로 부끄러움을 똥처럼 한 무더기씩 싸 놓고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딴청을 피울 것이다.
그들이 정말 부끄럽다면, 그 부끄러움을 어떻게든 책임지고 싶다면 방법은 하나다. 아니, 방법이라기보다는 시작이라고 해야겠다. 대학을 당장 그만두는 것이다. 이 글을 쓰는 나조차도 끝내 가지 못한 그 길을 가는 것이다. 대학과 함께 지긋지긋한 토익과 상식 공부도 시원하게 때려치우고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자신이 정말 바라는 게 뭔지, 스스로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뭔지 시간을 두고 생각해 보는 것이다. 아편굴 같은 도서관을 뛰쳐나와 삶다운 삶을 살아 보는 것이다. 마음껏 시간을 낭비해도 되고 실컷 게을러져도 되니 자신이 하고 싶은 무언가를 틀어쥘 때까지 안달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실업급여나 법정 최저임금으로 살아 보는 것이다.
꿈 같이 들리는가? 내 귀에는 이 거지 같은 세상에서 좋은 일자리 잡아 결혼도 하고 집도 마련하고 자식들 낳아 잘 기르며 산다는 게 더 꿈 같이 들린다. 무슨 꿈을 꾸든 그건 저마다의 자유겠지만, 안녕하지 못하다는 대자보만 자기가 다니는 대학에 큼직하게 써 붙이고 정작 자신이 무엇을 포기할 수 있고 무엇을 포기할 수 없는지는 고민하지 않는다면, 그건 결국 자기 마음이라도 안녕해지고 싶어 쇼를 한 것에 지나지 않게 된다. 마치 자기 몸속에 흘러든 귀신을 쫓아버리듯, 부끄럽다고 말하며 자신의 부끄러움을 지워 버린 것과 마찬가지가 되는 것이다.
얌전히 숨어 있던 마음들을 들쑤셔 우르르 들고일어나게 한 이놈의 독재 정권도 무섭지만 나는 온 나라 대학에 붙은 안녕 대자보들이 무슨 '삐라'처럼 한순간 확 퍼졌다가 금세 쓰레기통에 들어가 까맣게 잊힐지도 모른다는 게 더 무섭다. 겉으로는 안녕하지 못하다고 울상을 짓지만, 세상일들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야 한다고 부르짖지만, 그들은 대학생이라는 자신의 신분을 절대로 포기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다시 토익 책에 코를 박을 것이고 그 때문에 거듭 괴로워할 것이다. 일단 취직은 해야 되겠고 나중에 결혼도 해야 하니까. 밀양도 철도 파업도 물론 중요하지만 어쨌든 이 빌어먹을 놈의 세상에 적응은 해야 하니까. 근데 이거 어차피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 아닌가!
안녕하시냐고 묻지 마라. 어차피 다들 안녕 못한 거 알고 있잖은가?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 누구와 함께 뭘 먹고 살 것인지 처음부터 다시 고민할 생각이 없다면 차라리 대자보 쓸 시간에 그냥 토익 책을 보든가 잠을 자라. 그게 오히려 스스로에게 더 솔직해지는 길이다. 어쩜 말을 그딴 식으로 할 수 있냐고 내게 따지기 전에, 이렇게 함부로 말하고 있는 내 코를 납작하게 만들 수 있는 뭔가를, 서걱거리기만 하는 대자보 한 장보다 더 힘차게 펄럭일 수 있는 뭔가를 내게 보여 달라. 부끄러움에 푹 파묻히지 말고 더 뜨거운 무엇으로 스스로를 그득히 채운 모습을 보여 달라. 제발 부탁이다.
끝으로 궁금한 점 한 가지, 젊은이들에겐 대자보와 인터넷이라도 있지 나이 마흔이 넘은 어르신들은 끓는 속을 어디다가, 누구에게 풀어야 할까? 스스로를 기성세대라 부르며 젊은이들에게 괜히 미안해하는, 그리고 그 미안한 마음으로 스스로를 달래는 그 어르신들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