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일 버텨낸 20대~50대의 노동자들, “호석아 사랑한다”

[인터뷰] 삼성전자서비스 조합원 인터뷰(2)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자들이 염호석 열사의 유언에 따라 정동진에 도착하기까지, 무려 43일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열사의 유골은 끝내 찾지 못했지만, 노조 결성 1년 만에 체결한 임단협의 성과가 고인의 영정 앞에 놓였다. ‘저 하나로 인해 지회의 승리를 기원한다’던 염호석 열사는 그렇게 44일 만에 눈을 감았다.

염호석 열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후, 1천 여 명의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자들은 울음을 삼키며 서초동 삼성본사 앞으로 모여들었다. 노동자들은 숨이 막힐 정도로 거대한 본사 건물 밑에서 매일 밥을 먹고 잠을 잤다. 마냥 버텨야만 하는 기약 없는 싸움이었다.

그래서 삼성 노동자들은 두려움과 슬픔은 잠시 미뤄두기로 했다. 기나긴 농성을 지켜내기 위해서는 유쾌함과 여유로움이 필요했다. 슬픔의 눈물은 정동진에 도착해서 쏟아내자고 마음먹었다. 그렇게 20대의 젊은 노동자와 중년의 노동자, 그리고 춤추고 노래하는 노동자들은 지난 43일의 기적 같은 시간을 만들어냈다. [편집자주]


[출처: 참세상 자료사진]

삼성전자서비스지회 최 연장자 박창기 씨
“젊은 노동자들에게 좋은 환경 만들고 떠나고파”


파업 5주차에 들어선 당시, 서초동 농성장은 여전히 조합원들로 북적였다. 청년부터 중년까지, 다양한 연령층의 노동자들이 한 공간에 머무르고 있었다.

삼성전자서비스지회에서 가장 고령자인 박창기(53) 조합원은 노동조합을 만들고부터 젊은 노동자들이 많아졌다며 밝게 웃었다. 그는 93년 삼성전자서비스 협력사에 입사한 뒤 현재까지 일을 해 온 베테랑 서비스기사였다. 타 기업에서 서비스기사로 일한 경력까지 따지면 햇수로 35년차였다.

“서비스기사 생활을 평생 해 왔습니다. 93년도에 입사할 당시에는 나름 수입도 안정적이었어요. 하지만 IMF를 거치면서 점포들이 구조조정 됐고, 임금체계도 변하기 시작했어요. 회사에서는 우리에게 ‘기술자’ 내지는 ‘고급인력’이라고 항상 말 해 왔지만, 임금은 최저임금에서 오르지 않습니다. 임금도 낮고, 일도 힘들다 보니 점점 젊은이들이 일에 적응하지 못하게 됐어요.

매년 적게는 7~8명, 많게는 10명 정도의 젊은 신입 노동자가 ‘삼성’이라는 타이틀을 보고 입사를 해요. 하지만 3개월도 못 버티는 경우가 많아요. 적응을 못하는 거죠. 그런데 신기하게도 노동조합이 만들어지고 나서부터는 신입 노동자들의 변동이 없어요. 수입이 예전에 비해 크게 오르지 않았음에도, 노조가 만들어지고 난 후에 들어온 신입노동자들은 지금까지 한 명도 나가지 않았어요. 사측에서 금전적, 물리적 압박을 받기는 하지만 예전처럼 극단적으로 과도한 업무는 강요하지 못하게 된 측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출처: 참세상 자료사진]

하지만 여전히 서비스노동자들의 임금은 ‘목숨 값’과도 같다. 위험한 난간이나 사다리에 매달려 일을 하다보면 아무리 베테랑이라도 다리가 후들거린다. 박창기 씨도 동료를 잃은 경험이 있다. 언제든지 자신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고참 엔지니어다 보니 중수리를 하는 경우가 많아요. 사다리를 타고 작업을 하거나 난간에서 작업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죠. 저도 직접 일을 하고 있지만, ‘정말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일까’라는 생각이 들고는 해요. 하루하루의 작업이 죽음과 맞바꾸게 될 지도 모르는 일이거든요. 실제로 많이 떨어져 죽었어요. 2001년부터 2008년까지 서초동에서 근무하던 친구가 있었는데, 일을 하다 떨어져 죽었어요. 하지만 언론은 관심도 없어요. 삼성은 자신들과는 상관없는 일이라 하죠.

삼성에서 노조 만들기는 쉽지 않았어요. 그래도 최소한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노조를 결성하며 감수해야 할 것도 있다고 판단했어요. 교섭이 계속 파행을 겪는다지만 별로 조급하지는 않습니다. 땅바닥에서 숙식하며 온 몸이 욱신거리기는 하지만 이것은 잠시의 고통이잖아요. 나이가 가장 많은데도 노동조합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는, 내 아들 같은 젊은 사람들에게 그나마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고 떠나고 싶어서입니다”


‘동지’라는 호칭이 쑥스러운 스물 셋 청년의 노숙농성 일기

아직 20대 초반인 젊은 노동자들 역시, 고참 노동자들과 비슷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노조에서 가장 나이가 어린 백현석(23) 조합원은 “나는 아직 젊기 때문에 기회가 많은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하지만 가족을 책임져야 하는 노동자들이 싸우는 것을 보면서 같이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곳을 떠날 수 없었다”며 수줍게 웃었다.

백현석 씨는 삼성전자서비스 센터가 사실상 첫 직장이다. 그 전에 연예계 쪽에서 매니저 일을 해 봤지만, 생활고에 허덕이다 1개월 만에 일을 그만뒀다. 서울로 올라와 월급 40만원을 받았지만, 30만원은 월세 값으로 빠져나갔다. 그리고 나서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이 삼성전자 서비스 기사다. 처음 출근하는 날 그는 ‘출세했다’는 생각을 했다.

[출처: 정운 현장기자]

“넥타이 메고 구두 신고 출근을 하니까 출세한 기분이 들었어요. 주위에서도 회사 이름에 ‘삼성’이 들어가니까 출세했다고 말하더라고요. 기분이 좋았어요. 하지만 일을 할수록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원래 토요일은 오후 1시까지가 근무시간인데, 일방적으로 6시로 시간이 바뀌는 경우도 있었어요. 문제가 많다는 것을 알고 노동조합에 가입하게 된 거죠. 예전에는 문제가 있으면 그냥 마음속으로 ‘이건 아닌데’ 라고 넘기고 말았는데, 노동조합을 하면서 직접 표현을 할 수 있어서 좋아요”

아무리 젊다 해도 40일 넘는 노숙 농성은 녹록치 않은 일이다. 하지만 백현석 씨는 ‘농성하면서 가장 힘든 점이 뭐냐’는 거듭된 질문에도 “전혀 힘든 게 없다”며 멋쩍게 웃었다. 심지어 그는 지난 3월 말 폐업된 아산센터 소속으로, 네 달 째 노숙 농성을 하고 있었다. 질문을 바꿔 노조 활동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점을 꼽아달라고 하니 ‘여자친구와 헤어진 일’이라고 답한다. 이어서 아무래도 자신이 ‘노숙농성 체질’ 인 것 같다며 또다시 웃는다.

“아산센터 폐업 후 바로 노숙 농성에 들어갔어요. 다른 사람들은 살이 빠졌는데, 저 혼자 노숙 농성하면서 10키로가 쪘어요. 농성하면서 딱히 힘든 점이 없어요. 그래도 꼽자면 너무 버스를 많이 타고 이동한다는 정도? 아무래도 농성 체질인 것 같아요. 제가 사람을 만나는 걸 굉장히 좋아하거든요. 그런데 농성장에 있으면 전국에 있는 사람들을 다 만날 수가 있어요. 이야기를 나누면서 친해지는데 그런 경험이 참신하고 좋은 것 같아요”

백현석 조합원은 아직 ‘동지’라는 호칭이 낯설고 생소하다고 했다. 굵직한 열사 투쟁과 센터 폐업 투쟁을 진행해 왔던 노동자지만, 아직 스물 셋의 수줍음 많은 청년이기도 했다. 앞으로 가장 해 보고 싶은 투쟁이 뭐냐고 물으니, 신선한 답변이 흘러나왔다.

“아무리 우리가 싸워도 방송국에서 잘 취재하지 않잖아요. 그래서 우리가 방송국에 직접 가서 촬영을 하면 어떨까 생각했어요. 예를 들어 시청자들이 직접 참여하는 1대 100 등의 프로그램에 계속 신청서를 넣는 거죠. 그래서 스스로 방송에 출연을 해서 우리의 존재를 알려내는 거예요”

44일 만에 떠난 염호석 열사, “호석아 사랑한다”

지난 30일, 자결 44일 만에 염호석 노동열사의 전국민주노동자장이 치러졌다. 삼성전자서비스지회 노동자들은 고인의 유언에 따라 정동진 앞바다에서 노제를 지냈다. 상주인 양산센터 염태원 대의원은 정동진 바다를 향해 열사의 이름을 부르며 그를 떠나보냈다. 이제야 40여 일간 가슴 속에 묻어왔던 슬픔과 분노, 열사에 대한 그리움이 터져 나왔다.

[출처: 정운 현장기자]

염태원 대의원은 지난 농성기간 동안 마음대로 웃을 수도, 울 수도 없었다. 웃음 뒤에는 가슴 찡한 슬픔이 있었고, 슬픔의 눈물은 억지로 참아야 했다. 문득 문득 차오르는 눈물을 참으려 이를 악물었다. 장례까지 절대로 울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키고 싶었다.

“즐겁게 투쟁한다지만, 솔직히 양산분회는 그럴 수 없었어요. 상주로서 마음 한 구석에 항상 상처를 안고 있으니까요. 겉으로는 웃지만 속으로는 매일 울었어요. 농성 도중, 분회 조합원 생일이 있을 때도 ‘양산은 참자’며 챙겨주지도 못했어요. 처음에는 다 같이 즐기는 투쟁에도 어울리지 못하고 찡한 마음만 부여잡고 있었습니다”

열사의 시신과 유골까지 빼앗긴 양산분회 조합원들은 지옥 같은 고통에 시달렸다. 도통 눈물이 마르지 않았다. 염태원 대의원은 유골을 찾지 못한 채, 양산을 떠나던 날 ‘이제는 울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마지막 눈물을 흘렸다. 인터뷰 중, 눈가에 맺힌 눈물을 참기 위해 그는 드문드문 말을 잇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양산에서 집회하고 올라 올 때, ‘이제는 호석이 장례식 때 까지 안 울랍니다’라고 약속을 했어요. 그 때 마지막으로 울었습니다. 그래도 슬픈 생각이 많이 나요. 문득 호석이 영정사진과 눈을 마주칠 때, 슬픈 투쟁가가 나올 때 눈물을 참아요.

가장 가슴 아팠던 기억도 자주 떠오르고요. 처음 냉동실에서 호석이 시신을 봤을 때, 그 때가 제일 슬펐어요. 그리고 입관 할 때, 제가 상주로서 마지막으로 고인의 눈을 덮어줬거든요. 관을 덮을 때는 이제 마지막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너무 슬펐어요. 아직도 그 때 생각이 문득 문득 나요”


염태원 대의원과 양산분회 조합원들은 43일 농성 집회와 행진 내내 상복을 입었다. 마지막으로 상복을 벗기 전, 그들은 정동진에서 염호석 열사에게 무슨 말을 했을까. “호석이가 나한테 마지막으로 했던 문자가 있어요. 이제 훌훌 털어버리라고 이야기하고 싶어요. 그리고 우리가 임단협을 체결했다는 소식도 전하고 싶고요. 무엇보다 ‘호석아 사랑한다’ 이 말은 꼭 전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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