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이 글을 재게재한 <립컴>은 세계적 반자본주의 사회운동을 조명하는 온라인 매체며 이 글에 대해 홍콩 “우산 운동”에 대한 직접 조사에 기초하여 배경과 한계 그리고 맑스주의적 전망을 분석한 글이라고 전했습니다. “나오”는 <립컴>에서 중국에서의 계급투쟁을 전하고 있고 “몰수, 착취와 배제에 맞선 소농, 노동자들과 실업자들의 반란을 위한 프롤레타리아 문제아들을 옹호한다”고 소개합니다.
[출처: Ultra-com.org(이하 같음)] |
첫 번째, 역사ㅡ글로벌 시티
떠돌아다니는 쇼핑객은 만 건너편 금융가의 스카이라인이 녹색과 노란색 불빛의 만화경 속으로 빠져들 때면 셀프카메라로 포즈를 취한다. 그 아래, 빅토리아 항구의 바닷물은 태풍의 전조를 보이며 조용히 흔들거린다. 물은 휘돌고 있지만, 유람선은 동아시아에서 가장 호화로운 쇼핑몰 중 하나인 침사추이 부두에 정박해 거의 움직이지 않는 듯하다. 유람선은 세계 도처의 부유한 방문객들이 냉난방 시설을 갖춘 안전한 환경 속에서 결코 벗어나지 않고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 있는 편리함을 제공한다. 배에서 일단 내리면, 그들은 일식 바베큐를 먹거나, 20세기 스타일의 식민 기호를 마케팅한 부티끄에서 복고풍 영국 복장들을 둘러보기 위해 광택이 나는 바닥을 미끄러지듯 움직이면서 이 도시에서 가장 세련된 상점과 레스토랑에서 면세로 돈을 쓸 수 있다.
부두 밖에선, 비가 후두둑 떨어지기 시작한다. 빗방울은 셀프사진을 찍는 이들의 아이폰으로도 떨어진다. 요새는 모두가 K팝을 듣지만 어린 소녀는 남자친구의 어설픈 기타 소리에 맞춰 오래된 광둥어식 대중가요를 부른다. 사람들은 살짝 톱니 모양의 홍콩 동전을 통에 떨어트린다. 바람은 강해지기 시작해 마이크에서 잡음을 쓸어내리기라도 하듯 광둥어식 어투를 씻어낸다. 그녀 뒤에는 유람선이 하얗게 그리고 조용히 서 있다.
이것은 전투이며, 이는 홍콩이다: 광둥어식 옛 사랑 노래들은 태풍의 바람 속으로 흩어져 생명력 없는 크루즈 유람선과 금융가 불빛 아래 희미한 쇼핑몰에 도달하기 전 사라진다. 여기 스펙타클은 항구, 은행과 부동산 시장을 통해 스며든 자본이, 아시아 본토 약탈을 허용하기 위해 고안된, 전형적인 “글로벌 시티”의 고질적인 인간상과 마주하고 있다.
수년 동안, 홍콩은 아시아의 유럽식 허브로 보였지만, 생활 수준은 거의 낙후한, 후미진 식민지 잔재 이상이 아니었다. 중국 본토에서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산업 개발과 농업 개혁을 위한 외부의 지원이 반란에 맞선 울타리로서의 이 도시에 쏟아졌다. 하지만 생활 수준과 복지 프로그램은 즉각 개선되지 않았다. 이 식민정권은 불안정한 사회를 통치하고 쇄도하는 이민자를 수용하려고 기를 쓰는 여전히 폭력적인 정권이었다. 본토 혁명 후 수십년 동안, 폭동은 흔하게 빈발했다. 1956년 반란은 대영제국에 맞선 충돌의 시작을 기록했으며 반복됐다. 또 다른 폭동의 물결이 1966년 봄 시작됐고 1년 후인 1967년 홍콩 봉기로 막을 내렸다. 이는 홍콩 역사상 가장 큰 내부 분쟁으로, 대중 파업은 경찰에 맞서 전시민적 시가전과 병행됐고 정부 청사에 대한 폭탄 공격과 우익 언론사에 대한 표적 공격이 감행됐다. 결국, 5천여 명이 투옥, 2천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고 많은 공산주의자가 중국 본토로 추방됐다.
1967년 반란 뒤, 이 정부는 약 1백만 명에게 저렴한 국영 아파트 단지를 제공하는 ‘식민지 개혁요강’ 등의 복지 사업을 크게 확대하기 시작했다. 1950년대 이후 제조업 증강은 결국 온건한 임금 인상과 병행됐고 홍콩의 위치는 초기 ‘아시아의 호랑이’ 경제국의 하나로 보장받았다. 1980년대까지 홍콩은 새로 개방된 중국에는 필수적인 연결 고리였다. 물 건너 중국의 첫 특별경제구역인 선전과의 지리적인 근접성 그리고 중국 본토와의 역사적인 연관성 때문이다. 이러한 토대는 종종 문자 그대로, “글로벌 시티”의 기반을 이루었다: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 중 한 명인 리자청은 1967년 폭동 후 헐값이 된 부동산을 사들여 재산을 형성했다. 현재에도 이들 자산은 이 도시의 근간을 형성하며, 리자청은 금융가의 주요 고층빌딩뿐 아니라 항구를 소유하는 세계에서 가장 바쁜 사람 중 한 명이 됐다.
이 항구들과 금융 구조 아래 홍콩은 제조업에서 나와 1980년대 지구적 자본주의를 위한 행정상의 센터로서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중국 본토 항구 도시들로 제조업이 이동했고 홍콩은 새 산업 허브와 아시아 본토로의 역수출이 연결되는 이상적인 장소가 됐다. 중국식 디아스포라로 보다 멀리 떨어진 이들뿐 아니라 홍콩, 싱가포르와 대만 자본이 다수의 새 중국 공장단지를 추진해 갔다. 현재 중국 내 아시아계 외국인 직접 투자는 - 종종 일본과 파트너 관계이거나 일본 자본을 대신한 - 미국이나 유럽에서의 투자를 초과한다.
오늘날, 중국 본토와 홍콩 경계의 모습은 이러한 분열을 완벽하게 그린다. 선전 쪽으로는 개발 단지가 강변으로 위험할 정도로 빠르게 뻗어가고 있다: 그리고 정체불명의, 절반은 빈 아파트 타워들이 오염된 안개 아래 서로 무리지어 있다. 홍콩 쪽에는, 녹색나뭇잎들이 강에 인접해, 경계 지역 전체는 그린벨트와 농업지역으로 바뀐다. 단지 숲에 들어가려면 특별 허가가 필요하고 전 경계 지역을 군대가 지키고 있다. 언뜻 보기에, 2개의 세계는 적대적인 것으로 보인다: 선전은 통제나 환경은 상관없다는 듯 제멋대로 뻗어나가며 자신의 “포스트산업적인” 이웃의 목가적인 녹지에 맞서 스스로를 감아올리고 있다. 하지만 사실, 이 적대는 가장 깊은 상호 의존을 상징한다. 분할된 양 측면은 상대에 의해 공동으로 구성된다. 선전은 홍콩 자본 없이는 건설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홍콩은 선전의 공장들 없이는 결코 쇼핑몰과 오피스 타워의 세계 그리고 주의 깊게 조성된 목가적 농지를 가지지 못했을 것이다.
▲ 선전과 홍콩 사이의 경계 |
ㅡ미래 없는 세대
홍콩의 부흥기는 베이비 붐 세대가 추동했다. 그들은 대개 처음에는 중일전쟁 기간에, 그리고 그 다음에는 1940년대 후반 국민당과 공산당 군대 사이의 내전 기간에 이 섬으로 피난 온 이주민의 자손들이다. 미국과 유럽 그리고 모순적으로 중국 본토에서 그랬듯이, 이 세대는 1960년대와 1970년대 초기 몇몇의 반란을 주도했다. 그러나 베이비 붐 세대의 운동은 주요한 일부가 재구조화된 지구적 경제 내의 안전한 위치를 대가로 반란에 참가한 이들에 등을 돌리며 궁극적으로는 패배했다고 정의된다. 홍콩에서, 이는 자유방임적 자본주의의 세계에서 가장 비싼 실험 중의 하나를 만들었고 보수적인 논평가들은 종종 이를 칭찬한다.
하지만 이는 또 베이비붐 세대의 자손들을 압박하는 효과를 낳았다. 선전의 전성기 당시 규제되지 않았던 산업적 도축장에서 한몫을 잡은 부모들에 의해, 리자청과 같이 남의 도움 없이 일어난 백만장자의 사례를 제외하면, 홍콩의 젊은 사람들 다수는 삭막한 서비스 일자리 외에는 없었다. 경제 위기는 1997년 그리고 2007년에 반복됐다. 최고의 대학에 들어가기 위한 과열경쟁이 강요됐고 심지어 이 체제에서 성공한 대학생들조차 지독한 장시간의 노동, 소득의 평균 40%를 주거비로 지출해야 하는 참담한 일자리를 얻기 위해 싸워야 했다.
오늘날, 홍콩 가계의 8.5%는 연간 100만 달러[약 10억5300만 원] 또는 그 이상을 번다. 이 도시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슈퍼-프라임 주택시장 중 하나가 있지만, 동시에 주택 부족 상황은 심각한 반면, 주택 가격은 천정부지고 부자들이 투자 목적으로 구입한 수만 채의 아파트는 빈 상태로 존재한다. 또 이 도시는 세계에서 가장 인구 밀도가 높은 지역 중 하나며 주택가격은 너무 높아 많은 젊은이들은 30대까지도 부모와 함께 살아야 하는 형편이다. 가난한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몽콕이나 완차이로 출근을 해야 하는 “신제(New Territories)”에 있는 공공주택으로 내쫓긴다. 다른 이들은 빌딩 꼭대기나 골목길 작은 틈에 지어진 안전하지 않고, 고통스러운 작은 슬럼가를 찾아야만 한다. 50만 명 이상이 문자 그대로 새장 속에서 살고 있다.
▲ 공공주택 분배표: 홍콩 공공주택 다수는 주요 도심과는 먼 신제(New Territories)에 있는 신도시에 위치해 있다. |
이 도시의 지니계수는 0.537로 선진국에서 가장 불평등한 수준이며 인구의 20% 이상은 빈곤선 아래에서 살아간다. 이주노동자들은 일상적으로 학대당하며 단체 교섭은 불법이고 2010년 까지만 해도 최저임금이란 것은 없었다. 시간당 28 홍콩달러의 최저임금이 도입됐지만 이는 몽콕에서 공항까지 가는 데 필요한 지하철 교통비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다. 한편, 부유한 외국 사업가들은, 식민지 시대에 전염병이 발발할 경우 영국 관료들이 도피할 수 있도록 건설된 고급 아파트들을 구매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돈을 벌었다.
홍콩이 그리스와 같이 ‘아노미적 실패’는 아닐지라도, 홍콩의 과잉노동과 과소비 그리고 도시에 과도하게 밀집한 청년들은 아테네를 떠나는 청년들과, 실업과 저임금 등의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퇴거당한 미래 앞에서, 많은 청년들은 단순히 떠나기로 결심하고 있다. 홍콩에서의 이주는 이제 1990년대 초 반환 전 대량 이민 사태 이래 가장 빠른 비율로 증가하고 있다2. 여전히 동아시아에서 우월한 지위로 인해 상대적으로 낮은 실업률(4-5%)에도 불구하고 위기는 미묘한 신호를 보내고 있다: 정신 건강 서비스를 위한 요구는 지난 십년 간 2배 이상 증가했다. 홍콩의 문화적 ‘죽음’에 관한 말들은 아주 흔하게 들린다. 그리고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판에 박힌 시위들과 눈덩이처럼 커지는 본토 정부의 통제까지. 최근 학생 휴업과 센트럴 가(그리고 이제 애드리럴티, 몽콕, 코즈웨이 베이와 이 도시의 여러 다른 주요 교점)에서의 (재)점거는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 속에서 나타난 최근 현상일 뿐이다.
홍콩의 젊은층은 노동 분야에서 보다 특권적인 위치에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7/8년 시작한 금융 위기에 이어, 세계적으로 젊은 민중이 선봉에 선 반란이라는 똑같은 지구적 역학에 분명히 참가하고 있다. 그러한 사건에 참여한 이 민중은 정확히 그들 주변 모두에 어렴풋이 나타난 경제적, 환경적 그리고 사회적 비운을 지각하고 반격을 위해 선택된 우리의 “미래 없는 세대”의 구성원들인 “울트라스(과격파들)”다. 세계적으로 이 활동에 참가한 이들의 기원과 경험에는 주요한 차이가 있다. 일부는 학생이고, 일부는 거리 아이들, 축구 훌리건 또는 서비스 노동자다. 그렇게 다른 배경에서 나온, 이들 반란은 공산주의자 이론 집단 ‘엔노츠(Endnotes)’가, “전형적으로 서로 거리를 지녀온 계급분파들은 또 다른 이를 인정하거나 때로는 함께 하도록 강제됐다”는 점을 “구성 문제”로 부른 것에 의해 표시돼 왔다. 여기에 내재된 문제는 어떻게 한 운동이 “그들의 투쟁 과정에서 프롤레타리아 분파를”, “구성”, “협력” 또는 “단결”시킬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특히 성장하기 시작한 운동의 사회적 기반으로서 다양한 경험에 직면할 때의 질문이기도 하다. 결론은 이 인구 다수에 대한 광범위한 공명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 현장에서는 이제 시작 단계에 있는 운동들이 생산됐다는 것이다.
ㅡ범민주파와 시민적 열정
이들 각각의 반란들, 이집트에서든, 그리스 또는 미주리에서든 이의 가능성은 원대했지만 정치적 모순과 실천 경험의 부족 속에서 심각하게 망가져 갔다. 그리스와 스페인 같은 일부 지역들은 보다 응집력 있는 좌파 정치의 전통이 있고 이는 이제 젊은 민중들에 의해 다시 발견되고 부활되고 있다. 그러나 다른 지역에서는 보수적으로 돌변했고, 우크라이나와 태국과 같은 지역에서 극우는 이 불만을 가진 세대를 끌어당기며, 자신의 능력으로 이 운동을 방어하고 확장하고 협력해야 하는 다른 이들을 술책으로 이겼다.
홍콩은, 불행하게도, 많은 측면에서 전자 보다는 후자에 가깝다. 1967년 뒤 공산주의 성향의 좌파는 상당한 대중적 기반을 잃었고 경찰에 무자비하게 해체됐다. 한편, 이 국가는 노동자, 학생과 다른 이들에게 그들이 경제 재구조화 프로젝트에 참가하는 대가로 양보하기 시작했다. 중국과 관련해 홍콩 내에서의 냉전 분위기는 중국 경제가 외국 자본에 개방된 뒤에도 지속됐다. 홍콩의 국가 기구는 중국 문제에 대해 모든 신생 급진적인 소그룹들이 입장을 갖도록 강제했고 더욱이 어떤 종류의 공산주의라도 이의 소생을 가로막았다. 시위에서 ‘폭력’은 지금까지도 변함없이, 본토 중국공산당(CCP)의 선동이라고 설명된다.
결과적으로 홍콩의 소위 ‘좌파’는 수십 년 동안 본토의 ‘권위주의’에 맞선 ‘민주주의’라는 나이브한 담론에 의해 주도됐다. 베이징 천안문광장 봉기에 의해 고무돼 그리고 이를 분쇄한 무자비함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홍콩의 급진적 학생 다수는 1989년 이래로 천안문을 ‘민주주의’를 위한 학생 주도 운동으로서 그린 주류 미디어의 초상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였다. 베이징에서는, 비(非)학생의 폭넓은 참여, 베이징 자율노동자연맹의 결성 그리고 학생 보다 노동자를 더 심각한 범죄로 기소한 국가의 결정에도 불구하고, 운동의 메시지 그리고 정치경제 체제의 자유화를 위한 촉구로 서구의 자유 청중에 대한 호소를 주도할 수 있었던 자는 학생들이었다. 이미지는 왜곡됐고, 이의 영향은 오직 홍콩에서 증폭됐다.
[2편으로 이어집니다.]
[각주](1)중국 경제 개방에 대한 보다 세부적인 역사와 20세기 후반 동아시아 자본의 역할에 대해서는 <중국 자본주의를 바꾸다> 중 조반니 아리기의 “장기적인 관점으로 본 중국의 시장 경제”를 보라(훙호펑 편, 존스홉킨스대 편집부 편찬, 국내에서는 ‘미지북스’에서 2012년 출간함. 하남석 외 옮김).
(2) 현재 이민은 매일 6만 명이 떠났던 1990년대 초기 보다 여전히 훨씬 낮은 수준이라는 점이 지적돼야 한다.
[원문]Ultra-com.org
http://libcom.org/blog/black-yellow-hk
[게재]2014년 10월 3일
[번역]정은희 기자
[기타]:[]는 번역자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