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조 관계자와 조합원들의 말을 종합하면, 이날 오후 늦게부터 파업 유보 ‘소문’이 현장에 퍼졌다. 퇴근 무렵인 오후 5시께 소문의 진위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조합원 100여명이 조합 사무실에 운집해 사실 확인을 요청할 정도로 상황은 긴박했다. 이때까지 집행부는 공식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저녁 8시께 김형균 노조 정책실장은 “노조의 정당한 파업을 불법성 시비로 얼룩지게 하려는 회사 의도로 우리의 정당한 요구가 사라지고 불법이냐 합법이냐 시비에 휘말리는 것을 피하기 위함”이라고 이유를 밝힌 파업 유보 결정 문자메시지를 기자들에게 보냈다. 노조의 부분파업이 불법파업이 될 수도 있다는 의미다.
회사, 5일 2차 제시안 던지고
6일 적법성 지적 공문 전달
발단은 전날 교섭에서 2차 제시안을 내놓은 회사가 이날 교섭을 거부하고 오후 4시께 노조로 보낸 공문 한 장에서 시작됐다.
회사는 공문을 통해 “노조법상 조합이 파업에 돌입하기 위해서는 조합원의 진정한 의사가 반영된 공정한 쟁의행위 찬반투표 절차를 거쳐야 한다”며 “조합은 9월 24일 찬반투표 기간을 ‘총회 성사일까지’로 연장하고 장기간 투표하던 중 10월 1일 중앙집회에서 총회 성사를 인정했지만 10월 22일까지 무리하게 투표를 강행했다”고 밝혔다.
회사는 총회 성사를 공언하고도 투표를 계속 진행한 것은 투표 절차상 하자가 있다고 지적하며 “적법성 여부를 확인하고자 사법부의 판단을 요청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앞서, 지난 9월 24일 노조는 파업 투표 시작 하루 만에 “회사의 투표방해공작이 도가 넘는다”며 총회 성사일까지 투표를 무기한 연장했다. 노조는 회사 관리자들이 투표장 주변에 모여서 일 없이 투표장을 지켜보고 있는 사진 여러 장을 근거로 내놨다.
이후 노조는 두 차례에 걸쳐 회사가 조합원의 성향, 투표 여부를 관리한 정황을 담은 문서도 공개했다. 그럴 때 마다 회사는 “회사 방침과 무관한 당사자 단독 행위”라고 노조 탄압 의혹을 부인했다.
복수의 관계자에 따르면 정병모 위원장은 이 문제를 두고 오랫동안 혼자 고민 한끝에 파업 유보 결정을 내렸다. 정 위원장이 유보를 결정하자 한때 집행부 내부에서도 의견이 모아지지 않고 고성이 오가는 논쟁이 계속 됐다.
노조 한 관계자는 “파업 성사 이후부터 회사가 이 문제를 거론해왔다”며 “공론화 할 경우 회사 의도대로 조합원 열기에 찬물을 끼얹을 수 있어서 위원장 혼자 고민해왔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회사가 의도적으로 현대중공업과 더불어 현대삼호중공업, 현대미포조선에 비슷한 수준의 합의안을 던져놓고, 중공업을 고립시키려고 했던 것 같다”며 “다행히 두 곳에서도 합의안이 부결돼 회사 의도가 무산됐다”고 말했다.
이래적인 삼호중공업, 미포조선 선(先) 합의
"중공업 고립 시키려는 의도"
삼호중공업과 미포조선은 6일 기본급 3만 7,000원 인상을 골자로 하는 잠정합의안을 마련했다. 현대중이 2차 제시안으로 내놓은 안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삼호중공업과 미포조선의 잠정합의는 2002년 현대중공업그룹 출범 이후 항상 모기업 현대중공업이 먼저 합의한 것을 기준으로 삼았던 것과는 다른 행보여서 눈길을 끌었다.
하지만 현대중공업노조와 달리 온건 성향으로 분류되는 두 노조에서도 7일 잠정합의안이 모두 부결됐다. 조합원 과반수 이상이 회사안을 거부하고 나선 것이다.
현대중노조 관계자는 “회사 의도가 무산된 지금 다시 조합원 의지를 독려하고 전열을 재정비해서 파업 일정을 준비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파업의 적법성 문제는 쉬이 해결될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오랫동안 노조법을 다룬 변호사는 “총회 절차상 하자를 부인하긴 힘들다”고 했고, 현대중 노조도 법률자문을 받은 결과 불법이 될 우려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문대성 사무국장은 “현재로선 정확한 일정을 못 박을 순 없지만, 다수의 법률가를 대상으로 법률자문을 구한 후 향후 일정을 구체화할 것”이라며 “여의치 않으면 다시 총회를 공고하고 투표할 것”이라고 말했다.
노조는 7일 오후 6시 중앙보고대회를 열고 파업유보 결정을 공식적으로 조합원에게 설명했다.
정병모 위원장은 “회사의 비열하고 악랄한 투표 방해 행위 때문에 투표를 연장했음을 삼척동자도 안다”며 “‘방귀 뀐 사람이 성낸다’고 적법성 여부를 사법부에게 판단을 요청한다는 궤변을 늘어놓고 있다”고 회사를 비난했다.
정 위원장은 “정당한 행위에 대해 모함을 일삼고 파국으로 몰아가려는 회사의 의도는 분명하다”며 “불필요한 적법성 시비에 우리의 정당한 요구가 왜곡되는 것을 바라지는 않는다”고 강조했다.
정 위원장은 “힘든 환경 속에서 파업을 위해 최선을 다해주신 대의원과 현장 실천단을 포함한 조합원동지들에게 실망을 드린 점 머리 숙여 사죄한다”며 “합법적인 테두리에서 규약과 규정을 지키며 절차와 과정도 모두가 만족할 수 있도록 노력을 다할 생각”이라고 덧붙였다.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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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원 기자는 울산저널 기자입니다. 이 기사는 울산저널에도 게재됩니다. 참세상은 필자가 직접 쓴 글에 한해 동시게재를 허용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