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 최근 이란 문제를 필두로 해당 지역의 문제는 중국-이란-남아시아 관계를 중심으로 이란, 러시아, 중앙 아시아국가들, 중국, 남아시아의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를 엮어서 보아야 할 상황입니다. 인도를 포위하고 있는 무슬림 국가들은 중국, 이란과 긴밀하게 협력해오면서 인도가 남아시아의 맹주 역할을 할 수 없게 이미 만들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아래는 발제문과 토론내용(음성파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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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란 핵 협상 재연기와 중국 투자
존 케리 미 국무장관은 11월 24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이란 핵 협상 시한을 7개월 더 연장하겠다고 발표하였다. 2013년부터 비밀협상을 벌여서 2013년 11월 이란의 우라늄 농축 능력 축소와 일부 제재 해제를 주고받았지만 최종 합의 타결은 지체되었다. 그리고 지난 1년 동안 10여 차례 이상 수석대표 협상을 이어왔지만 다시 연기를 한 것이다. 그러나 양측은 협상이 재연기되었지만 상대에 대한 존중을 보여주었다. 존 케리 미 국무장관은 선의와 진정성을 가지고 협상에 임한 자바드 자리프 이란 외교장관에게 감사를 표했고 이란 대통령도 빈에서 열린 협상으로 이견이 많이 가까워졌고 조만간 최종 합의로 이어질 것이라고 대국민 연설에서 말했다. 미국 내에는 추가 경제 제재를 요구하는 강경파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존 바이든 부통령은 미국은 이란의 핵무기 보유를 절대 허용하지 않겠지만 추가 제재는 국제 사회의 압박 공조에 균열을 일으켜 협상력을 떨어뜨리기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미국 측에서 공식적으로 말하지 않은 것을 짐작해보면 이라크의 ISIS 문제를 해결하는데 이란의 도움이 필요하기에 섣불리 더 압박을 할 수 없다는 것일 것이다. 이란으로서는 경제 제재 해제는 절실한 것이기에 미국에 대해서 협상 결렬/협상 재연기에 비판을 함부로 할 수는 없다.
경제 제재를 받고 있는 이란에게 가장 든든한 나라는 중국이다. 중국은 핵개발 의혹이 있는 이란에 대한 원유 개발 등 기초 시설 투자를 두 배로 늘리기로 했다고 영국 BBC 방송이 이란 반관영 메흐르 통신을 인용해 보도했다. 이스마일 마술리 이란 에너지부 부장관은 중국이 이란에 대한 투자 규모를 기존 250억 달러에서 520억 달러로 증액하기로 합의했다고 밝혔다고 BBC는 전했다. 이런 중국의 추가 재정 지원으로 이란의 수자원, 전력, 석유 및 가스 부문 프로젝트 추진은 더 탄력을 받게 되었다. 왜 중국은 이란에게 이렇게 지원을 하는가?
2. 이란의 정치, 벨라야테 파키(Velayat-e-Faqih, 성직자에 의한 통치)와 좌파의 궤멸 약사
이란부터 남아시아는 페르시아 이슬람권으로 아랍 이슬람권과 다르다.
16세기 사파비조는 이란 최초의 시아파 국가였고 성직자들은 경제적으로 독립했다. 약 1세기의 내전을 거친 18세기에 카자르조가 다시 이란을 통일했을때 성직자들은 정치적으로도 독립했다.
▲ 1979년 이란 혁명 직후 사회상. Marjane Satrapi(2002) - persepolis-1 p.30 쏘련 스파이로 몰려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좌) Marjane Satrapi(2002) - persepolis-1 p.133 아이언 메이든과 마이클 잭슨을 듣는 것은 금지당했다.(우) [출처: Marjane Satrapi(2002) - persepolis, 국내번역서 마르얀 사트라피, 김대중 번역, 페르세폴리스 1, 새만화책] |
19세기 중엽 러시아와 영국 침입. 이란은 러시아에게 코커서스를 뺏기고 영국에게는 헤라트와 아프가니스탄을 내주었음.
1906년 중동 최초의 근대화혁명인 입헌혁명은 미완으로 끝나기는 했지만 영국, 러시아에 반대하는 반식민주의 운동이자 반전제주의 운동이었다. 시아파 성직자들이 개입하고 이란의 정치체제를 전제군주제에서 입헌군주제로 바꾸었다.
1941년 소련과 영국 이란 들어와서 이란을 연합군의 병참기지화함. 이란 공산당인 투데당 창설
1951년 모하마드 모사데크는 취임과 동시에 투데당의 지원 아래 석유 국유화 시작.
1953년 친미 쿠데타. 팔레비 왕조 시작
1963년 백색혁명. 위로부터의 혁명으로 토지개혁, 근대화 진행, 이슬람 성직자들은 자신들의 특권 상실하는 것에 강한 불만 드러냄. 샤의 입장에서는 석유를 통한 부의 독점을 가져가고 토지 개혁을 통한 인민의 지지를 받아 이슬람 성직자들의 권력을 제거해나는 것이 목적
1977. 11 반팔레비 왕정 시위 발생
1978. 9 .8 테헤란 시위 유혈 진압(검은 금요일)
1978. 10. 12 호메이니 파리로 망명
1978. 12.10-11 대규모시위발생
1979. 1 .10 이슬람 혁명 위원회 창설
1979. 1. 16 무력진압을 포기하고 샤 망명
1979. 2. 1 호메이니 귀국
1979. 2. 11 군의 정치적 중립 선언과 바흐티야르 수싱사임(이슬람 혁명 기념일)
1979.4. 1 이슬람공화국선포
*. 1979년 이란 혁명은 인민전선 형태로 가능했음. 투데당, 마르크스주의 무자헤딘, 페다인 민병대와 같은 사회주의, 공산주의 집단과 역시 샤의 통치에 반발했으며, 알리 샤리아티와 후에 각각 이슬람 공화국의 수상과 대통령을 맡은 메흐디 바자르간(Mehdi Bazargan)과 압돌하산 바니 사드르(Abdolhassan Bani Sadr)와 같은 개혁파 민족주의 세력에 북부의 쿠르드 분리주의자들, 일반 민중, 페르시아의 최고 현금 보유자들인 바자르 상인들 등 이란의 대부분의 계층이 하나같이 샤의 통치에 반발하여 가능하였다.
1979. 11.4 미대사관 인질 사태 발생
1979. 12. 2〜3 이슬람 공화국 헌법에 대한 국민투표 실시 (98% 찬성)
1980. 9.22 이란-이라크 전쟁 반발.- 이란과 러시아 혁명의 유사성이 있다. 쏘련은 10월혁명만으로 쏘련체제를 만든 것이 아니라 기나긴 내전이 끝나면서 만들었다. 이란은 이슬람 혁명의 선언으로 만들어지것이 아니라 이란-이라크 전쟁을 통해 만들어졌다.
호메이니는 이슬람 국가의 수호 강조. 투데당은 소련이 이란의 전쟁 상대인 이라크에 무기공급을 재개함에 따라 정부로부터 견제받게 됐다.
1981년 6월 무자헤딘 헐크는 독재 정권 타도를 주장한 바니 사드르를 지지했고 30여개 도시에서 100만명의 시위대로 거리행진. 무자헤딘 헐크와 헤즈볼라의 무력 충돌, 이슬람 공화당은 시위대를 ‘신의 적’으로 규정하고 진압으로 사망 20명, 부상자 200명 발생. 바니 사드르는 6월 파리 망명후 이란국민저항위원회 결성. 사실상 무자헤딘 헐크의 조직
1982년 11월에 투데당은 비합법화됐고
1983년 2월 투데당 서기장이 체포되는 대대적인 탄압 받아 사실상 붕괴. 누레딘 키아누리(Nureddin Kianuri) 서기장과 에흐산 타바리(Ehsan Tabari) 당 이론가는 텔레비전에 출현해 소련을 위해 스파이 행위를 했다고 자백하면서 완전한 몰락으로.
1984년 미국은 이라크와 국교 회복해서 이라크에 무기 공급. CIA에 의한 정보제공 시작.
1988. 7. 20 이란-이라크 휴전 협정 체결. 이란은 현재의 정치체제를 굳혔고 이라크는 보수왕정국가들과 친미국가인 이집트, 미국의 지원으로 중동의 맹주가 되었음(1990년 시작된 걸프전은 1991년 이라크의 완패로 끝남)
1989. 6. 3 호메이니 사망 다음날 하메네이 최고 지도자 취임
1997 무자헤딘 헐크는 미국무부에서 테러 단체로 규정됨
2002. 8 이란국민저항위원회가 이란 핵의혹 폭로하면서 이란 핵 사태는 국제문제가 됨. 좌파는 완전한 궤멸의 길에 들어선 것임.
2003. 미국의 이라크 침공 이후 이라크에서는 시아파 정권이 취임하면서 이란과 이라크 사이에는 시아파 연대 형성.
2004 무자헤딘 헐크는 테러 단체 리스트에서 제외되고 미군의 지원을 받고 있음. 이란 좌파 출신들의 완전한 청산.
이슬람 공화국 신정 체제하에서 실권은 이슬람 성직자회의가 선출하는 최고지도자에게 있다. 행정부 대통령이 추진하는 안건은 최고지도자에 의해 거부권 행사가 가능하며, 권력 행사에 필수적인 군 및 사법부도 최고지도자 지배하에 있다. 행정부 대통령의 권한은 지극히 제한되어 있다.
2009~2010년 이란 대통령 선거 항의 시위는 2009년 6월 12일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마무드 아마디네자드의 당선에서 촉발되었다. 야권 대선 후보로 나왔던 미르 호세인 무사비 전 총리와 메흐디 카루비 전 국회의장이 주축이 된 저항이었고 같은 해 12월 또 한 차례 대규모 시위를 벌였으나 역시 일회성으로 그쳤다. 아랍의 봄에 영향을 받았다는 2011년 2월 14일부터 시작된 이란 반정부 시위도 이 시위의 연장선으로 보아야 한다. 시위대가 "(튀니지의)벤 알리, (이집트의) 무바라크, 다음 순서는 사예드 알리 당신" 구호, 이는 2009년 대선 직후 시위에서 아마디네자드에 대한 비판이 먼저 나오고, 하메네이에 대한 규탄은 한참 후에 등장했던 것과는 달랐다. 더 급진화된 것이다.
아랍의 봄 때 하메네이는 1979년 이란의 이슬람 혁명과 유사한 "이슬람적 각성"이 카이로에서도 일어나고 있다며 기뻐했고 아마디네자드 대통령도 "이란이 (혁명 이후) 지난 32년간 던져온 메시지를 세계가 받아들이고 있다"고 환영했다. 당시 클린턴 장관이 이란의 반정부 시위를 환영했을 때 반정부 시위의 정당성을 훼손한다고 한 것은 민심은 반미 정부는 친미인 중동 국가들과 다르게 이란의 기본 정서는 민심도 정부도 반미이기 때문이었다. 이란 친정부 세력의 즉각적인 반응은 “서방정보기관들이 보내 스파이들에 의해서 테헤란에서 시위가 시작”이라는 것이었다.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의 2005년 강경한 반이스라엘 발언“이스라엘은 지도상에서 없어져야 한다.”나 이란 홀로코스트 국제 회의를 주최하는 것을 보면 강력한 리더쉽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보이나 국내에서 대통령은 거의 힘을 쓰지 못한다. 여성과 청년 학생들의 지지를 받던 모하마드 하타미(이란의 7,8대 대통령, 임기 1997년~2005년)의 개혁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고 보수파인 마무드 아마디네자드는 보구, 개혁 모두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 최고 지도자 : 알리 하메네이 – 1981년부터 1989년 3,4 대 대통령, 1989년 이후 최고 종교지도자임.
* 이란 대통령 : 하산 로우하니 – 2013년 – 최고국가안보위원회에서 하메네이의 대리인을 맡아 최고지도자의 신임이 두텁다. 2003년 초대 핵협상 수석대표를맡았고, 2004년에는유엔안전보장이사회 제재를 피하려고 우라늄 농축을 한시적으로 중단했다. 2005년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취임 이후 대통령과 논쟁 이후 핵협상수석대표자리에서 물러났다. 핵개발 지속은 해야한다는 것이 일관된 입장.
* 이란 정치의 희망인 녹색정치. 이슬람 공화국 체제를 거부하지 않는다. 체제 내 갈등이다.
* 이란식 이슬람 근본주의 - 자국내 부르주아 계급과 성직자들의 이란식 이슬람 근본주의 : 이란 인민의 폭발적 에너지를 인민 전선 형태로 집권한 후 진보적 세력들을 제거한후 성직자/부르주아 계급이 구축한 신정정치체제를 추구하며 와하브주의에 기반을 둔 오사마 빈라덴, IS와 차별화되는 대의민주주의제를 수용한 어느정도 세련(?)된 이슬람 근본주의이다.
3. 이란과 이란 주변 미군 기지 – 이란의 핵무장에 대한 의혹을 서구와 미국이 버리지 않는 것은 그들 스스로 알고 있다.
▲ 이란 주변의 미군기지 – 미국이 같은 수의 기지로 둘러싸여 있다면... |
4. 중국과 이란 관계
- 저정학적 중요성
아랍, 중앙아시아, 남아시아-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와 연결
- 소련 몰락 전후로 나누어서 보아야 한다.
소련 몰락 전 - 인도양 분지를 둘러싼 전역에서 소련과 아프가니스탄이 전진하고 있었다. 이란과 중국은 이를 막아야 한다는 것에서는 이것은 1970년대에 중국과 이란 관계가 꾸준히 긴밀해지게 된 가장 중요한 동인이었다. 1970년대 초 미국과 중국 사이의 관계 회복. 중국은 미국의 힘을 이용해 소련의 확장을 저지하겠다는 생각 공유. 샤와 중국은 소련의 궁극적 목적은 파키스탄의 발루치스탄 해변에 있는 항구라고 확신했다. 국제주의 원칙을 강조하던 모택동(주은래) 또한 샤에 대해서는 완전히 실리적으로 접근했음.
소련 몰락 후 - 등소평의 시장사회주의가 미국과 이란 양자 사이에서 실리를 추구. 이란-이라크 전쟁 시 고립되어 있던 이란에게 중국은 무기 공급, 핵 관련 기술 제공. 중국에게는 미국과의 관계가 언제나 우선이었으나 미국의 일극 헤게모니 전략에 반대하는 원칙적 전략은 놓치지 않고 있음.
대만 카드로서의 이란 – 미국이 대만을 지원하겠다면 우리는 이란을 지원하겠다. 미국이 대만에 F 16 판매한다면 우리는 이란에 핵 기술을 전달하겠다.
각 나라의 국가 체제 존중 문제에 대해서 언제나 이란과 손을 잡고 있음(천안문, 티벳, 신장 등의 서구가 인권을 문제 삼을 때)
중국은 명분상으로 다극체제를 지지하고 실질적으로 미국의 관심이 동아시아 보다는 중동에 있기를 바라고 있음. 강한 이란은 중동에 미국이 계속 힘을 쏟아야함을 의미
5. 중국의 석유 수송로
6. 중동의 새 석유 수송로 - 파키스탄의 발로치스탄
중국이 파키스탄의 과다르 항을 인수해서 인도양에서 역관계를 재편하려고 한다. 인도양 북부의 아라비아해에 위치한 과다르항은 중동 산유국들의 주요 석유 수출 통로인 호르무즈 해협과 400㎞ 거리에 있는 전략적 요충지다. 호르무즈 해협을 통해, 세계 석유의 20%가 운송된다. 중국은 과다르항에서 신장위구르자치구의 카슈가르를 잇는 철도와 송유관 건설도 추진할 예정이다.
▲ 과다하르 노선 [출처: http://indiatoday.intoday.in/story/china-pakistan-persian-gulf-arabian-sea/1/257027.html] |
인프라 시설을 갖추게 되면 과다르 항구는 아라비아 해와 오만 해, 걸프만, 호르무즈 해협 등 인도양 전체의 중심으로 각종 물류와 에너지 교환의 중심지로 부상하게 되어 파키스탄의 중동과 중앙 아시아에서의 영향력을 키워줄 것이다. 가다르 항이 건설이 시작된 지난 5,000 명에 불과한 빈곤한 어촌이었으나 지금은 13만명으로 인구가 늘어났다. 인도는 이에 긴장하여 이란의 차바르 항구(Chabahar) 건설을 도와서 돕고 있다. 이란의 차바르 항구가 과다르 항을 재치고 에너지 물류의 중심으로 부상하면 가다르 항구를 부상시키려는 파키스탄의 계획은 접어야 한다. 이란-파키스탄-중국의 이해관계가 모두 얽혀 있는 발로치스탄 지역은 심각한 분리주의 운동이 있다. 현재 파키스탄의 가장 큰 문제는 탈레반 문제로 아프가니스탄 지역과 겹쳐 있는 파슈툰 종족의 문제도 아니고 인도와 분쟁이 끊이지 않은 자무-카시미르 지역도 아니고 이 발로치스탄 지역의 분리주의 운동이다
▲ 지도. 이란,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에 걸쳐 있는 발루치 종족 [출처: Balochistan Wikie] |
인도는 아라비아 해와 오만 만의 해상을 이용하는데 있어서 파키스탄의 카라치(Karachi) 항구 대신에 이란의 카바하르 항을 대안으로 이용하고 싶어한다. 이란으로서는 인도 외에도 아프가니스탄과 중앙 아시아 국가들이 카라치 항 대신에 카바하르 항을 이용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개발이 필요한 상황이다. 인도 재경부 P. 치담바람(P. Chidambaram)이 개발에 있어서 투자 수익률을 너무 높이 요구했는 데다가 이란이 경제 봉쇄가 되면서 카바하르 항 공동 개발은 중단되었지만 다시 논의가 될 것이다.
▲ 표시된 A – 이란의 카바하르 항구 [출처: 구글맵] |
그러나 이란으로부터 원유 수입 증가와 카바하르 항 공동개발 등의 인도-이란 경제 관계가 개선이 되더라도 인도는 이란에 대한 에너지 의존성을 점점 줄여나가도록 할 것이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가스 수입을 위한 IPI(Iran-Pakistan-India Pipeline)과 TAPI(Turkmenistan-Afghanistan-Pakistan- India Pipeline)이라는 두 가지 선택 중에서 IPI가 아닌 TAPI를 전략적으로 선택한 것이다.
걸프만에 있는 이란의 사웃 파스(South Pars) 가스전에서 생산된 천연가스를 파키스탄 카라치(Karachi)와 물탄(Multan)을 거쳐 인도 뉴델리로 수송하는 총연장 2,600km, 사업비 75억달러 규모의 IPI 라인은 미국의 반대로 중단이 되었다. 미국은 인도가 이란으로부터 가스 수입하는 대신에 두 가지 대안을 제시했다. 하나는 인도와의 핵 협정을 통해서 핵발전소를 인도 내에서 짓고 핵관련 기술을 인도에 수출하는 것이다. 2008년 미국과 이란의 핵협정 체결 이후에도 IPI에 대한 공개적인 포기는 선언하지 않았지만 파키스탄의 IPI 개발 자금 부족과 이란 측의 가스 생산 감소로 논의에서 물러났다. 또 다른 대안은 TAPI이다. TAPI는 단순히 이란과 인도의 관계 개입만이 목적이 아니다. 미국은 중앙 아시아에서의 영향력을 강화하여 러시아를 견제하고 아프가니스탄과 인도를 계속 자신의 영향력 아래 두기 위해 TAPI를 진행하고 있다.
1995년 투르크메니스탄과 파키스탄의 MOU로 시작된 TAPI 프로젝트는 러시아의 견제와 아프가니스탄의 정치 상황으로 쉽지 않았다. 첫 번째, 러시아의 견제. 카스피해 연안 국가 중 카자흐스탄과 아제르바이잔에 묻혀 있는 원유량만 사우디아라비아의 4배인 1조 배럴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되는지라 미국은 중동에서의 영향력만이 아니라 이곳에서의 헤게모니도 강화하려고 하고 있다. 2008년 있었던 이 지역에서의 분쟁은 IPI를 지지하는 러시아와 TAPI를 지지하는 미국의 경제적 이해관계의 대립의 노골적인 시작이었다. 이 지역 국가들과 NATO의 관계는 러시아 대 미국의 대립전선을 구체적으로 긋는 신냉전이다. 신냉전은 과거의 냉전과는 달리 이념이 거론되기 보다는 경제적 이해 관계가 노골적으로 부상하고 있다. 두 번째, 아프가니스탄의 정치 상황.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이 정권을 잡던 시기도 이 프로젝트 성사를 힘들게 만들었다. 1998년 탄자니아와 케냐의 미국 대사관 폭파 사건이 나고 오사마 빈 라덴이 배후로 알려졌지만 탈리반의 지도자인 무하마드 오마르(Mohammad Omar)는 오사마 빈 라덴을 지원한다고 발표함으로써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에 파견가 있던 이 프로젝트 관련된 인력들은 모두 철수를 하게 된다. 2001년 911테러 직후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에 들어가면서 탈레반을 몰아내기 시작하면서 다시 논의는 재개되었다. 2002년 12월 투르크메니스탄,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지도자들은 새로이 협정을 하고 2005년 아시아 개발은행은 개발 관련 최종안을 내게 된다. TAPI는 2012년 5월 23일 투르크메니스탄,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인도 모두 사인을 했으며 2014년부터 가스 판매가 시작될 것이다. 아시아 개발 은행에 의해 2017년까지 완료될 예정이다. 에너지 산업이 전체 GDP의 1/3를 차지하고 정부 재정 수입의 90%인 투르크메니스탄은 천연가스 수출 경로가 러시아의 가스관인 CAC(Central Asia Center)에만 묶여 있다. 이 노선은 투르크메니스탄의 다울레타바드(Dauletabad)에서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을 거쳐 러시아의 Alexandrov Gay로 이어진다. 이 노선을 통해 운송되는 투르크메니스탄의 가스는 우크라이나를 통해 유럽으로 공급되고 있고, 투르크메니스탄과 우즈베키스탄, 그리고 카자흐스탄으로부터 가스를 구입해 유럽에 국제시장가격으로 공급하면서 큰 수익을 내고 있다. 이는 유럽에 대한 러시아의 정치, 경제적 영향력의 원천 중 하나이다. 이 때문에 러시아는 인도에게 TAPI가 아닌 IPI를 권했던 것이다.
세계 원유 수입 4위국인 인도는 이란에 대한 경제 제재 완화로 원유를 보다 낮은 가격으로 구매할 수 있는 길이 열렸고 이란의 카바하르 항 공동개발 등을 통해서 이란과 경제 협력을 늘려갈 것이다. 그러나 인도의 경제 정책 특히 에너지 정책은 이란에 대한 원유 의존을 높이기 보다는 에너지 자원에 대한 다각화 방안에 있다. 이 다각화 방안은 단순하게 경제 정책의 문제가 아니라 국제 정치와 맞물려 결정된다. 인도가 IPI가 아니라 TAPI와 미국과의 핵협상을 선택한 이유는 러시아나 중국 보다는 미국을 동반자로 보기 때문이다. 인도의 맘모한 싱 수상은 올해 이란에서 열렸던 16차 비동맹국가 정상회의에 참석했다. 그러나 인도는 더 이상 네루 수상 시기의 비동맹 국가의 중심 국가로서의 인도의 역할은 더 이상 생각하고 있지 않다.
남아시아, 중동, 중앙아시아, 이란과 함께 보아야 한다. 남아시아를 바라보는데 인도를 중심으로 보는 시각 즉 인도란 남아시의 맹주가 있고 그 주변에 인도 보다는 약소국인 무슬림 국가들인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가 있다는 시각은 국제 정세 속에서 남아시아를 를 보는데 한계가 있다. 파키스탄의 가장 큰 문제는 발로치스탄 문제인 것을 모르고, 자무 카시미르 문제라고 알고 있는 것이 한 예이다. 이란, 러시아, 중앙 아시아국가들, 중국, 아프가니스탄, 남아시아의 파키스탄, 방글라데시을 엮어서 보아야 한다. 인도를 포위하고 있는 무슬림 국가들은 중국, 이란과 긴밀하게 협력해오면서 인도가 남아시아의 맹주 역할을 할 수 없게 이미 만들어버렸기 때문이다.
* 이란에서부터 파키스탄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사례. EX) 호메이니의 할아버지인 사이드 아메드(Sayid Ahmed) 는 1840년경에 가족을 데리고 호메인으로 이주했다. 그는 카슈미르 지방에서 태어났는데,그의 아버지가 아들의 교육을 위해 이란의 북부 지방에 있는 니샤푸르라는 도시로 보냈다. 그는 그곳에서 결혼하여 정착해 살다가 호메인으로 이주했던 것이다. ex)타고르가 쓴 소설 까불왈라(kabulwala)가 있고 영화화도 되었다. 아프가니스탄 까불의 상인들은 벵골 지방에까지 견과류를 팔러 온 것을 알 수 있다. 이 소설은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인도 국경이 분리되기 전에는 이들은 하나의 지역으로 살았음을 알 수 있다.
* 한국은 이란의 4대 교역국이고, 이란은 한국의 4대 원유공급국이다
시간 : 2014년 12월 17일
장소 : 참세상 회의실 3층
참조할 기사 :
파르진 바흐다트(20100125) - 이란 ‘녹색운동’에 거는 기대
http://www.hani.co.kr/arti/SERIES/58/400995.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