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25일(현지시간) 치러진 그리스 조기총선에서 급진좌파연합(시리자)이 지난 총선에서 9.5% 늘어난 36.4%를 얻어 149석을 확보한 것으로 최종 집계됐다. 집권 신민당은 1.9% 줄은 27.8%로 76석에 그쳤다. 3위는 극우 황금새벽당으로 지난 선거에서 1석이 줄은 17석, 최근 창당한 중도 토포타미(강)는 17석, 그리스 공산당은 3석을 추가 확보해 15석을, 그리스 독립당은 7석이 줄어 13석, 사민주의 사회당은 13석에 머물렀다. 투표율은 1.4% 늘어 63.9%를 기록했다.
과연 이 선거 결과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출처: 가디언 화면캡처] |
유럽연합의 신자유주의 긴축 정책의 실패
이번 시리자의 승리는 유럽연합의 신자유주의적 긴축에 대한 분명한 반대를 나타낸 그리스 유권자의 승리라고 볼 수 있다. 이번 선거에서 10% 가까이 득표율을 늘린 시리자 외에 의석을 낸 정당 중 득표율이 증가한 당은 긴축에 반대를 나타낸 토포타미와 그리스공산당 뿐이다.
<가디언>은 26일 이러한 선거 결과에 대해 “그리스 유권자들이 유럽연합의 긴축을 거부하고 극좌정당의 급진적인 대안을 선택했다”고 일갈했다. “2009년 10월 그리스에서 시작해 단일 통화 생존 여부에 관한 질문을 제기한 5년 이상의 유로존 위기 아래 그리스 유권자들은 궁핍으로 치닫게 한 예산 삭감과 세금 인상에 단호하게 반대했다”는 것이다.
<뉴욕타임스>는 “치프라스는 수백만 명을 빈곤하게 만든 극적인 긴축 정책의 효과에 대해 결코 생각해보지 않은 이들 때문에 승리했다”면서 “그렇게 당한 자들은 이 과정을 변화시킬 정치인들을 찾고 있다”는 폴 드 그라우베 전 유럽위원회 자문위원이자 런던경제대학 교수의 지적을 전했다.
이에 따라 유럽연합과 독일 등 유럽 지도자들은 유럽연합의 신자유주의적 긴축 정책을 수정 또는 타협해야 한다는 압력에 직면하게 됐다. <파이낸셜타임스>는 “저항적인 좌파 시리자의 승리로 유럽 정부들이 도전에 직면하게 됐다”고 표현했다.
보수 양당 정치의 종식과 좌파정치를 향한 전환점
<뉴욕타임스>는 25일 “시리자는 유로존 가입국에서 권력을 접수한 최초의 반 긴축 정당이 됐으며, 지난 40년 간 우세한 양당 정치를 산산이 파괴했다”고 지적했다. 양당은 40년 동안 지속된 80~90%에 가까웠던 득표율을 냈지만, 지난 총선에 이어 이번 총선에서 결정적으로 허물어졌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그리스 경제 위기 시작과 함께 2009년 10월 43.9%의 압도적인 승리로 집권한 사민주의의 사회당은 2012년 12.3%에 이어 이번 총선에서는 4.7%로 곤두박질쳤다. 그리스 경제위기를 야기한 보수 신민당의 득표율은 2009년 33.48%에서 2012년 29.7%였다가 이번에 다시 27.8%로 줄어들었다. 시리자에서 이탈해 신민당과 연정을 꾸렸던 민주좌파당은 2012년 6.2%였다가 이번 선거에서는 0.49%로 추락했다.
이에 맞서 치프라스 당수는 정치적 과제로 “전후 사회민주주의의 완성되지 않은 과제를 단순히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와 민주주의에 기초하여 유럽 전역에서 급진적 변화를 추동하는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경제위기 아래 그리스 민중의 급진화
신민당과 사회당에 대한 지지율 변화 추이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리스 민중은 정치적으로 급진화 된 것으로 나타난다.
시리자는 이번 총선에서 유권자의 3분의 1이 넘는 36.4%의 득표율을 획득했다. 이러한 시리자의 선전에도 불구하고 유럽연합과 유로존 탈퇴를 주장해 왔던 공산당의 득표율도 늘었다는 것은 그리스인들의 좌향좌 경향이 더욱 확대됐다는 것을 나타내는 의미심장한 대목이다. 공산당의 지지율은 1% 늘어 3석이나 추가 확보했다. 그리스 반자본주의좌파전선(안타르시아)도 의석을 내지는 못했지만, 득표율은 약 2배가 늘어 0.64%에 달했다.
한편 토포타미는 그리스의 유명 언론인 등 전문가들이 나서 결성한 중도좌파지만, 현 사회당 표를 분산시켰을 뿐 2012년 사회당이 획득한 지지율 내에 머무르고 있어 유의미한 변화로 보기는 힘들다.
신민당은 또 시리자가 집권할 경우 그리스가 북한과 같은 독재체제가 될 것이고, 유럽연합에서 이탈해 국제사회로부터 고립될 것이며, 유입 인구 증가에 따라 사회 불안이 확대될 것이라고 협박해 왔지만, 이 또한 작동하지 않았다. 이는 기성 정당에 대한 신뢰가 이제는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회적 투쟁을 힘으로 성장한 좌파정치에 대한 시험대
<가디언>이 25일 “청년이 부패한 엘리트에 맞서 나설 때 무엇이 일어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고 지적했듯이, 시리자의 승리는 경제위기 이후 그리스 민중의 역사적인 투쟁을 배경으로 한다.
그리스에서는 2006년 대학 민영화에 반대한 대중적인 대학 점거 운동, 2008년 12월 경찰의 총에 맞아 사망한 16세 소년 알렉산드로스 그리요로풀로스 사건을 계기로 치솟은 반정부 시위, 2011년 이래로 4년 간 35번 이상의 대중적인 총파업과 긴축 반대 시위가 진행됐다. 한편, 경제위기와 긴축에 따른 사회적 악영향이 팽배하게 나타나기 시작한 2011년부터는 다양한 풀뿌리 연대 운동이 조직됐다.
국제식품연맹(IUF)이 지난 23일, “시리자는 대중적 봉기의 여파로 부흥했으며, 이 봉기는 촉진돼야 할 것”이라고 지적한 것처럼 그리스의 사회적 투쟁은 시리자 정부가 국제 채권단과 국내 우파에 맞서고 그리스 전망을 열어가는 데 중요한 토대로 평가되고 있다.
특히 시리자가 단독정부를 세울 수 있는 득표율을 확보하지 못한 상황에서 그리스 좌파와 사회운동의 역할은 더욱 중요해 보인다.
한편, <월스트리트저널>이 시리자 당수 알렉시스 치프라스에 대해 ‘발칸의 우고 차베스’라고 불렀지만 “석유는 없다”고 말했듯이, 그리스가 한정된 자원을 토대로 어떻게 새로운 전망을 만들어 낼지도 주목된다.
유럽에 부는 봄바람...유럽 좌파정치에 활력
25일 저녁 시리자의 승리가 확실시 된 후 진행된 알렉시스 치프라스 시리자 당수의 연설에서 유럽 전역의 좌파 정당들은 함께 모여 승리를 축하했다. <슈피겔>에 의하면, 독일 좌파당의 당원들은 “이 결과는 쇼이블레(독일 재무장관)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고 말했으며, 이탈리아에서 온 청년 공산주의자들은 “치프라스와 함께 다른 유럽은 가능하다”는 문구를 들고 적기를 흔들면서 인터내셔널가를 부르며 연대를 표하기도 했다.
그리스 시리자는 구소련의 몰락 이후 후퇴해 왔던 유럽연합 좌파정당들 중 첫 승리를 기록한 정당이다. 시리자의 승리는 일국에 그칠 것인가 아니면 유럽에 전환점을 새길 것인가? 세계 언론도 그리스 시리자의 승리가 유럽 좌파에 활력을 불어넣을 것인지에 대해 주목하고 있다. 유럽 좌파정당들이 부상하고 공동의 전략을 채택할 경우 자본주의 정치 체제 아래 확대돼 온 경제 위기와 인종주의, 그리고 전쟁에 맞서 이제 좌파는 새로운 사회를 위한 기회를 가지게 된다.
유럽 좌파 정당들은 시리자의 승리를 축하하고, 좌파 정치의 확대를 위한 잇따른 성명과 논평을 내놓고 있다. 유럽의회 좌파당동맹은 25일 논평을 내고 “정치 엘리트의 빈곤화 정책을 종결시키는 첫 번째 걸음”이라고 밝혔다. 파블로 이글레시아스 스페인 포데모스(우리는 할 수 있다) 대표는 “희망이 다가오고 두려움은 사라지고 있다”며 “시리자, 포데모스, 우리는 승리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앞서 23일 시리자에 대한 지지 연설에서 “선거의 승리가 권력에서의 승리를 의미하지는 않는다”며 다가오는 도전에 대한 공동의 연대를 밝히기도 했다. 카트야 키핑 독일 좌파당 대표는 트위터를 통해 “그리스에서 유럽의 봄이 시작됐다”고 기록했다.
유럽 좌파정당 중 스페인의 풀뿌리 대중운동 정당 포데모스 외에도, 아일랜드 ‘신페인(우리들 스스로)’, 또 올해 총선이 진행되는 영국, 포르투갈 등에서 좌파가 얼마나 선전할 수 있을지 관심을 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