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앞에서 내린 유가족들이 청와대로 가는 길목인 청운동 동사무소에 이르자 경찰들은 또 다시 벽을 쌓아 앞길을 막았습니다. 그곳에서 저는 지금도 잊지 못하는 참혹한 광경을 보게 되었습니다. 영정사진을 품에 안은 어머니들이 길을 막고 서 있는 경찰들 앞에 꿇어앉아 두 손을 싹싹 빌면서 하염없이 흐느끼는 것이었습니다. 아이들을 죽게 만든 자기들이 죄인이라고, 제발 용서해 달라고, 대통령님을 꼭 한 번 만나게 해 달라고 어머니들은 눈물을 펑펑 쏟으며 머리를 땅으로 조아렸습니다. 유가족들뿐만 아니라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다 함께 울었던 밤이었습니다.
그러나 1년이 지난 뒤 그날 밤보다 더 참혹한 광경을 보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참사 1주기가 되는 4월 16일. 시청 광장에서 열리는 추모문화제에 참여하기 위해 7만여 명이 모였습니다. 문화제를 마친 유가족들과 시민들은 광화문 분향소로 가려고 차도로 나와 행진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경찰은 동아일보사와 동화면세점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폴리스라인’을 미리 설치해 두었습니다. 높다란 벽 위에선 사진기를 든 경찰들이 쉴 새 없이 섬광을 터뜨리고 있었습니다. 유가족과 시민들은 청계광장 쪽으로 방향을 틀었지만 광화문 쪽으로 가는 길목들은 곳곳마다 경찰버스로 막혀 있었습니다.
을지로 쪽까지 가서야 뚫린 길이 있어 그쪽으로 나가 보니 종로 3가였습니다. 사람들은 다시 광화문으로 가기 위해 행진했지만 종각역쯤에서 다시 경찰에게 막혔습니다. 사람 하나 지나갈 수 없도록 경찰버스들이 줄지어 벽을 이루고 세워져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다 모이자 경찰들을 비난하는 아우성들이 종로 시내를 천둥처럼 울렸습니다.
그때였습니다. 광화문 가는 길목을 막고 서 있던 경찰버스들 위로 누군가가 기어 올라가기 시작했습니다. 금세 손뼉 치는 소리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자세히 올려다보니 노란 조끼를 입은 유가족들과 마스크를 쓴 시민들이었습니다. ‘시행령을 폐기하라’와 ‘진실을 인양하라’는 구호가 쓰여 있는 현수막이 버스 위에 내걸렸습니다. 유가족들은 버스 위로 올려진 마이크를 잡고 차례로 발언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날 밤 유가족들과 시민들은 어떻게든 광화문으로 가기 위해 인사동 쪽으로 가기도 했고 세종문화회관 뒷길을 이용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경찰들은 걸핏하면 최루액을 뿌리거나 방패를 휘둘러 댔습니다. 그 와중에 유가족 한 분은 경찰들의 거친 진압 때문에 갈비뼈가 네 대나 부러져 병원으로 실려 갔습니다.
그러나 이 글을 쓰는 지금 가장 참혹했던 기억으로 남아 있는 것은, 1년 사이에 ‘투사’가 다 되어 버린 유가족들을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1년 전만 해도 유가족들은 세월호 참사가 ‘정치’와 연관되는 것을 무척이나 꺼려했습니다. 유가족들과 함께 있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이 “대통령이 책임져라!”를 외치면 유가족들이 나서서 화를 내며 말렸습니다. 그리고 발언을 하면서도 항상 “저희는 정권 퇴진을 외치자는 것이 아닙니다”는 말을 덧붙이고는 했습니다. 아마 그때만 해도 대통령이란 사람에게 뭔가 기대를 걸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참사를 까맣게 잊어버린 듯한 대통령과 정부의 태도에 유가족들도 조금씩 변해 갔습니다. 해가 다 가도록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참사 1주기가 다 되도록 여전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대통령과 정부를 유가족들은 마침내 마음속에서 지워 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리고 평범한 학부모나 직장인에 지나지 않았건만 유가족들은 어쩔 수 없이 투사가 되었습니다. 싸우지 않으면 현실을 조금도 달라지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 버렸기 때문입니다.
마이크를 쥐고 쭈뼛거리며 더듬더듬 발언하던 유가족들이 언젠가부터 집회 사회자 뺨치도록 말을 조리 있게 술술 할 줄 알게 되었습니다. 무대 위로 올라가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게 발언하는 유가족들을 볼 때마다 제 마음은 몹시 아팠습니다. 저분들이 왜 저렇게 변해야 했을까. 가족들과 함께 평범한 삶을 살아가던 사람들이 어찌하여 투사가 되고 거리로 나와야 했을까. 도보행진을 하고, 오체투지를 하고, 단식을 하고, 삭발을 하고, 심지어 “우린 죽을 각오를 하지 않았다. 우린 이미 죽었다. 그래서 두려울 것이 없다”고까지 말하도록 유가족들을 몰아붙인 것은 대체 무엇일까.
그러나 그런 물음들의 답이 너무나도 뻔하다는 사실은 또 다른 안타까움이자 슬픔이었습니다. 답은 분명했습니다. 유가족들이 투사가 된 이유는 1년 전 세월호 참사가 벌어진 이유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생명보다 이윤을 앞세우는 사람들. 안전보다 이해득실을 더 따지는 사람들. 힘센 권력 앞에 넙죽 엎드리는 사람들. 참사마저 ‘종북몰이’의 도구로 써먹으려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멀쩡히 존재하는 한 가족을 잃은 슬픔과 한이 결코 풀리지 않는다는 것을 유가족들은 깨달았습니다. ‘대통령’과 ‘정부’라는 이름으로 존재하고 있는 바로 그 사람들 말입니다.
2015년 4월 16일. 참사 1주기에 다시 만난 유가족들은 더는 슬픔에 찌들어 있지도 않았고 영정사진을 끌어안으며 울부짖지도 않았습니다. 가슴속이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졌을지언정 유가족들은 더 강해진 것처럼 보였습니다. 경찰의 폭력을 두려워하는 유가족들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방패를 휘두르면 온몸으로 받아내고 경찰버스가 길을 막으면 버스 밑으로 들어가 누웠습니다. 길바닥에 누워 며칠 밤을 지내는 건 이제 일도 아니었습니다. 참사 1주기가 끼어 있는 4월 셋째 주를 ‘추모주간’이 아니라 ‘행동주간’으로 하자고 주장한 건 바로 유가족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글을 쓰는 제 마음은 무척 참담합니다.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가장 앞장서서 싸워야 하는 시대.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갈비뼈를 분질러 버리는 시대.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얼굴에 최루액을 뿌리는 시대.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누구보다도 더 강한 투사가 되어야 하는 시대. 그런 시대에 저는 살고 있습니다.
투사로 변하기까지 유가족들의 마음속에서는 과연 어떤 일들이 벌어졌을까요? 그들은 어떤 지옥을 맛보았으며 어떤 절망에 휩싸였을까요? 저는 감히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경찰버스 지붕 위로 올라가 우뚝 선 채로 시민들과 경찰들을 향해 힘차게 발언하던 유가족들의 모습이 도무지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습니다. 삭발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푸릇푸릇한 머리를 한 채 맨 앞에 서서 경찰들과 몸싸움을 하던 유가족들의 모습이 지금도 또렷이 기억납니다. 아무리 거지같은 시대라고 하지만 정말 이럴 수는 없는 겁니다.
유가족들은 ‘이젠 잊지 않는 것으로는 안 된다’고 입을 모아 부르짖고 있습니다. ‘행동해야 한다’고 외치고 있습니다. 당분간은, 아니 어쩌면 아주 긴 시간이 지나갈 때까지 유가족들은 투사로 살아야 합니다. 다음에 다시 만날 때는 투사가 아닌 평범한 우리 이웃으로, 길거리에서 흔히 마주치는 아줌마 아저씨로 만나고 싶지만 그날이 언제쯤이면 찾아올지 여전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유가족들은 아마 이렇게 말하겠지요. 그날은 우리에게 저절로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고. 우리가 우리 손으로 쟁취해야 하는 것이라고.
더 열심히, 더 다양한 방식으로, 더 꾸준히, 더 차근차근 싸워야겠습니다. 유가족들과 함께. 시민들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