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11월 22일 ∼ 1999년 11월 28일 : 제315호
서민들은 우울하다
옷로비·언론문건 신물나는 정치, 경기회복 불구 고단한 삶 여전
국민 66% 우울증세… 고용안정·개혁완성 등 사회적 해결 시급
서민들이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
IMF사태가 대량해고, 소득감소로 등을 쳤을 때 특유의 인내력으로 불
안을 참아냈던 서민들이 최근 경기회복 대열에서 다시 소외당하면서
걷잡을 수 없이 무력감에 휩싸이고 있는 것이다.
각종 경기지표는 나아지고 있다지만 국민 삶은 나아질 조짐이 보이지
않는다. 사회적으로나 의학적으로 깊어만 다는 진단이지만 그렇다고 묘책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더 심각하다.
우울증의 확산은 통계에서도 확연하게 드러난다. 대한신경정신의학회
가 지난달 말 연 학술대회에서 가톨릭의대 채정호 교수는 국민의
66%가 우울증 증세가 있다고 발표, 충격을 던졌다.
전국 39개 지역에서 표본추출한 3천9백여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입원치료가 필요한 ‘고도우울증’ 환자도 17%나 됐
다.
지금까지 학계는 국민의 15% 정도를 중증이상 우울증 환자로 추정해
왔다. 응답자의 31%는 우울증 때문에 자살 충동을 느낀 적이 있다고
답했다.
실제로 자살도 급증하고 있다. 올해 하반기 자살인구는 최근 3년간 같
은 기간보다 두배이상 높을 것이란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추정이다.
얼마전 서울·부산의 ‘잘 나가던’ 시중은행 지점장들이 잇따라 자
살한데 이어 최근엔 촉망받는 벤처기업가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 사회
적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이런 현상이 피부에 와닿지 않는 경기회복세, 옷로비사건
등 권력형 부정비리, 언론문건을 둘러싼 정치권 공방, 사회적 도덕성
마비 등 암담한 사회현상에서 오는 극심한 상실감과 좌절감의 반영이
라고 풀이하고 있다.
실제로 옷로비 의혹이 불거진 직후 단속이 예고됐음에도 음주운전이
평소보다 20%나 늘어나고, 노래방이 주부들로 넘쳐난 것은 국민들의
불안감을 반증하는 사례로 볼 수 있다.
남대문 시장 상인 강석주(여·42)씨는 “IMF 시절엔 꾹 참고 견디면
되겠지하는 생각으로 버텼지만 이제 그럴 힘도 남아있지 않아 체념한
상태”라며 “요즘엔 아등바등 살아서 뭐하냐며 가게 문을 일찍 닫는
이웃들이 많다”고 말했다.
서민들의 무력감은 이처럼 커가는데도 우울증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극히 낮은 실정이다. 많은 우울증 환자들은 자신이 우울증을 앓고 있
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며, 안다 해도 치료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신체적 질환과 달리 정신적인 문제는 병으로 여기지 않는 탓이다.
그러나 우울증은 제대로 치료하지 않으면 갖가지 신체적 질환은 물론,
‘자신의 존재가치가 없다고 느끼거나’, ‘이유없는 죄책감’ 등 무
력감을 누적시켜 개인은 개인대로 파멸로 이끌고, 가족과 동료는 물론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피해를 끼칠 수 있는 ‘전염병’이다.
이진현(가명·31)씨는 3년째 실업자다. IMF가 터지기 1년전 이미 취
업문은 좁아졌고, 비인기학과인 탓에 몇차례 취업에 실패한 뒤 학위라
도 올릴 요량으로 대학원에 진학했다. 지난 여름 석사학위를 따고 다
시 몇군데 원서를 냈지만 어이없게도 ‘학력이 너무 높다’는 이유로
퇴짜를 맞았다.
이씨는 그 뒤로 갑자기 기운이 없어지고 일에 흥미를 잃었다. 커가는
아들 걱정에 잠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나마 생계유지 수단이었던 아
르바이트마저 포기할 정도로 피로가 쌓였다. 급기야 병원에서 ‘우울
증’ 진단을 받았다. 이씨는 “가만 있다가도 갑자기 참을 수 없을 정
도로 화가 치밀어 요샌 자꾸 술을 찾게 된다”고 토로한다.
전문가들은 이처럼 우울증에 시달리는 이들은 대부분 가장이거나 경
제력을 담당해야 할 사람이기 때문에 방치된다면 사회·경제적 손실
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사회적 원인에 의한 우울증 확산이니
만큼, 신속하게 개혁을 완수해 사회·경제적 안정을 다져야 한다는 지
적이다.
신경정신과 전문의 김병후 박사는 “서민들은 경제위기 때 졸라맨 허
리띠를 아직 풀지 않았는데, 정부와 정치권은 이를 외면한 채 정쟁만
일삼고 있어 서민들의 상실감이 커지고 있다”며 “정치·사회·경제
개혁을 빨리 마무리하고, 국민에게 희망을 주는 게 국가차원의 우울증
대책이 아니겠느냐”고 지적했다.
<배영환 기자 hansae@kng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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