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영/편집위원
지난 20여 년, 민주진보운동의 역사는 좌절의 시간이었고, 한편 이탈의 연속이었다.
선거나 개각을 전후한 때마다 주변의 동료들은 낯선 직장으로 자리를 옮겼고, 옛 친구들에게 새 명함 돌리기를 꺼려 했다. 그리고 그들은 대개 아주 짧은 시간만에 '용도폐기'되거나, 간혹은 "아는 놈이 더 해"라는 손가락질을 받으며 살아 남았다.
그들의 노력이 덧없는 것이었음을 재론할 필요는 없다. 거대한 기성정치집단의 질서 안에서 개인의 지명도나 영민함만으로 뜻을 펼치겠다는 야무진 계획이 예외 없이 좌절되었음을 조소할 필요도 없다.
그리고 '변절'이라 오해할 필요도 없다. 자유주의 정치세력을 한 식구로 생각하고 부르주아민주주의의 안정을 제 역할 삼는 대부분의 이탈자들에게, 변절이라는 낙인은 그들을 양심수로 만들 뿐이다.
그들은 단지, 자유주의 정치세력이 탄압받던 시절에 어쩔 수 없이 우리와 잠시 동거했을 뿐이고, 이제 제 자리를 찾아가고 있을 따름이다. 그들이 변절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탈자들 중에 그곳이 아닌 이곳에 있어야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이다. 한 개인이 도도한 현실에 굴복했을 때, 그리고 그런 굴복의 양산을 차단해야 할 때 우리는 '변절'이라는 수사(修辭)를 애용하지만, 수사는 어떤 경우에도 미래를 개척치 못한다.
냉정히 보자면 제 발로 걸어나간 이탈 뿐 아니라, 운동권 문화라는 비합리에 밀려난 축출도 적지 않았고, 그런 문제점을 개선치 않는다면 이탈이든 축출이든 우리의 왜소화는 계속될 것임을 직시해야 한다.
진보정당 운동에 입문하며 자기 희생의 각오를 다지지 않은 이는 없다. 하지만, 부자집 개만도 못한 생활을 20∼30년 동안 영위하게 될 때, 희생은 인간의 유예가 아니라 개인 발전의 지체와 운동의 장애로 바뀌게 되고, 이 때의 이탈은 변절이 아니라 불가피한 정리로 치부되는 것이다. 그동안 우리가 등한시해온 인적 자원의 개발과 관리에 시간과 돈을 투자하지 않으면서 더 이상의 발전을 기대할 수는 없다.
더욱 큰 문제점은 운동권이 지난 시대의 비합리를 금과옥조처럼 숭상하는 점이다. 매순간마다 목적 자체를 목청껏 외치는 것으로, 냉정하고 구체적인 실천을 대체하고, 토론보다 동지들을 무슨 무슨 '주의(主義)'로 매도하며 몰아세우는 데 열을 올리고, 능력과 기여가 아니라 연공서열식의 전근대성을 고수하는 대한민국 유일의 집단이 바로 운동권인 것이다.
우리 곁을 떠났으나 아직도 선의를 간직한 많은 이들이 '운동권 문화'에 치를 떠는 것은, 자신들이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법칙의 희생양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저항이라는 문화에 머무르고 있었을 때, 물리법칙을 초월하는 비합리는 우리의 동력이었지만, 정치라는 수단에 눈을 뜬 지금, 우리의 유일한 생존 방책은 합리뿐이다.
[84호] 4.22 ~ 4.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