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9일 5시,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앞에는 때 아닌 호루라기 소리가 울려 퍼졌다. 호루라기를 연신 불어대는 300여 명의 사람들은 다름 아닌 농아인들. 한국농아인협회와 420장애인차별철폐공동투쟁단(공동투쟁단)이 주최한 ‘농아인 생존권보장촉구 집회’에 모인 이들은 비장애인들이 외치는 구호와 함성 대신 호루라기를 불고 있었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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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을 방조하는 정부, 농아인 생존권 해결하라”
이날 집회는 불법노점 벌과금 70만원이 없어 지난 달 20일 스스로 목숨을 끊은 한 청각장애인 노점상을 추모하는 한편, 농아인에 대한 차별철폐와 생존권 보장을 위한 대책 마련을 촉구하는 집회였다. ‘자살을 방조하는 정부, 농아인 생존권 해결하라’는 주제로 열린 이날 집회에서 참가자들은 △영화진흥법· 도로교통법· 선거법 개정 △장애인연급법 제정 △빈곤 농아인의 생계대책 마련 등을 촉구했다.
지난 정기 국회 때 청각장애인과 관련해 한글자막 상영을 의무화하는 영화진흥법개정안, 청각장애인들의 1종 운전면허 제한을 폐지하는 도로교통법개정안, 참정권 보장을 위해 수화통역과 자막방송을 의무화하는 선거법개정안 등이 발의된 상태다. 또 장애인 방송 접근권 확보를 위한 방송법 개정안이 발의를 앞두고 있다.
특히 관련 법률 중 청각장애인의 1종 운전면허 취득을 제한하고 있는 도로교통법은 청각장애인들의 생계유지와 직접적으로 관련되는 것으로 개정이 시급히 요청되고 있다. 청각장애인들은 2종 운전면허와 1종 운전면허가 큰 차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청각장애인에게 1종 운전면허의 취득기회를 주지 않는 것은 행복추구권 및 직업 선택의 자유를 침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김기범 한국농아인협회 이사는 “지난 1월과 2월에도 도로교통법개정 위한 시위를 벌인 적 있다. 도로교통법 개정이 이번 4월 국회에서도 이뤄지지 않으면 또 1년을 기다려야 할 것”이라며 “모든 장애인들이 힘을 합쳐 장애인 생존권 확보를 위한 도로교통법개정을 반드시 이뤄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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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이은 장애인 자살의 원인은 정부의 장애인 정책 부재”
이날 집회에서 참가자들은 장애인 정책이 부재하는 현 정부를 강하게 성토했다. 이문희 한국장애인단체총연맹 실장은 “장애인들은 정부에 일반국민의 평균적 삶을 살게해달라고 요구한 적 없다. 단지 인간답게 살기 위한 최소한의 삶을 보장해달라고 했다”며 “그러나 이 정부는 장애인들의 자살을 방조했고, 이제는 자살 방조를 넘어 장애인들을 학살하고 있다”며 강한 어조로 현 정부의 장애인 정책을 비판했다.
이어 이문희 실장은 “정부는 ‘너희를 해결할 수 없으니, 자살로 해결하라’고 하고 있다”며 “노무현 정권은 장애인에게 있어 사악하고, 더러운 정권”이라며 비판의 수위를 높였다. 이어 그는 “이 정권이 이제 3년 남았지만, 끝까지 살아남아 투쟁해 반드시 이 정권을 몰아내자”며 현 정부에 대한 분노를 표출했다.
김수경 시각장애인협회 회장 역시 연대사를 통해 “연이은 장애인 자살의 원인은 정부의 장애인 정책 부재”라고 지적하며 “장애인에게 속옷까지 벗어줄 것 같던 출범 당시의 약속은 다 어디 갔는가”라고 현 정부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또 “장애인들의 빈곤문제는 일부분의 문제로 치부하고 넘기기에는 심각한 수준”이라며 “장애인 빈곤은 장애유형별 차이가 없다”고 덧붙였다.
이날 집회에서 신동진 한국농아인협회 고양시 지부장은 촉구발언을 통해 “현재 우리나라 농아인의 실업률은 20%에 달하며, 취업분야도 농업과 단순노무직에 편중되어 있다. 더욱이 취업재가장애인 중 농아인의 월평균 소득은 67만원에 불과한 실정”이라며 “한 농아인의 자살 문제는 한 개인의 불행이라기 보다는 우리나라 35만 농아인 전체의 문제”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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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신동진 지부장은 “지속적으로 요구해 온 인간단운 삶, 행복추구권을 농아인들도 누릴 수 있도록 관련 법안을 이번 임시국회 회기 내에 반드시 통과시켜 줄 것을 요청한다”며 “또국회와 정부는 장애인연금법을 조속히 제정하고, 농아인의 안정적인 직업개발과 빈곤농아인의 생계대책을 세워 더 이상 자살하는 농아인이 생겨나지 않도록 촉구한다”고 밝혔다.
한편, 이날 집회가 끝난 뒤 참가자들은 추모제가 열리는 시청 앞까지 행진을 벌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경찰이 도로 행진을 가로 막아, 곳곳에서 경찰과 참가자들 간 충돌이 발생했다. 참가자들은 안전한 행진을 위한 차선 확보를 요구했지만, 경찰은 인도 이외에 차도를 내줄 수 없다는 입장으로 맞섰다. 이에 참가자들은 행진 도중 기습적으로 세종로 사거리 편도 2개 차로를 막고 항의 시위를 벌였고, 한 때 참가자들은 광화문에서 시청 방향 편도 차로를 완전 점거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