룰라, “남미은행 목적 밝혀라” 차베스에 딴죽

메르코수르 브라질 독주 흔들

연대와 협력을 정신으로 내건 ‘남미은행(Bank of South:Bancosur)’ 출범이 늦어지고 있다. 6월 출범을 예상했지만, 28, 29일 양일간 열린 메르코수르 정상회의에서 회원국 정상들은 8월 리우에서 열리는 정상회의에서 남미은행 문제를 마무리 짓자고 결론 냈다.

이상한 것은 메르코수르 정상회담이 끝난 직후 나온 룰라 브라질 대통령의 발언이다. 3일 룰라 대통령은 “남미은행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규정할 필요가 있다”며 “왜 우리에게 이런 은행이 필요한 건지, 역할은 무엇인지”를 밝히는 것이 필요하다고 제동을 걸었기 때문이다.

룰라 브라질 대통령은 남미은행이 IMF, 세계은행, 브라질의 국가개발은행과 같이 차관을 제공하고 있는 은행과 무엇이 다른지를 질문했다.

남미은행, 연대와 협력의 정신을 기초로

남미은행은 ‘연대와 협력’의 정신을 기초로 베네수엘라에서 제안했다.

차베스 대통령은 남미 외채 위기를 심화시킨 주범은 IMF, 세계은행 등 국제금융기구라고 보고 있다. 차관 제공의 조건으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프로그램과 기간시설 사유화를 강요했고, 결국 남미에서의 외채, 빈곤 문제 등을 낳았다는 진단이다. 그리고 그 대안으로 조건 없이 사회, 경제 인프라에 투자될 수 있는 지역기금을 마련할 것을 제안했다. 바로, 남미은행이다.

차베스 대통령은 작년부터 메르코수르 회원국들에게 남미은행 창립의 필요성을 설득해왔으며, 베네수엘라가 140억 달러, 아르헨티나는 3억 5천만 달러를 투입할 예정에 있다.

브라질은 올해 4월 남미은행 참가를 결정했다. 브라질의 가입으로 남미은행의 운용가능 자금도 크게 늘 것으로 기대되었다. 브라질은 1105억 달러의 외환보유고를 가지고 있어, 313억 달러를 보유한 베네수엘라와 375억 달러를 보유하고 있는 아르헨티나를 3-4배 가량 앞서고 있다.

차베스, 메르코수르 불참하고 3개국 순방

그러나 기대했던 일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이번 33차 메르코수르 정상회의에서 회원국 확대문제와 지분규모에 대한 완전한 합의를 이루지 못해 남미은행 창립일정이 연기된 것이다. 그러나 뒤이어 나온 룰라 대통령이 발언은 창립일정 연기에 대한 진짜 이유가 무엇인가 의구심이 들게한다.

최근 브라질은 남미은행에 브라질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우루과이와 칠레를 끌어들이기 위한 노력을 해왔고, 여기에 대해 차베스 대통령은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고 알려졌다. 칠레와 우루과이가 남미은행에 참가하게 되면, 그 동안 남미은행을 주도적으로 추진해왔던 베네수엘라, 에콰도르, 볼리비아에 브라질이 대당할 수 있는 구도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참가국 확대를 이유로 늦어진 뒤에는 이런 브라질의 계산이 숨어있었다고 보인다.

남미은행 창립 일정이 늦어지는 것에 대한 불만을 웅변이라도 하듯, 차베스는 28, 29일 파라과이 아순시옹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33차 메르코수르 정상회의 불참을 통보하고 러시아-벨라루스-이란 순방을 떠났다.

차베스가 노골적으로 불만을 터뜨린 이유는 베네수엘라의 메르코수르 가입이 지연되고 있다는 점이다. 베네수엘라는 이미 지난 해 5월 메르코수르 정회원국으로 참가를 결정했으며, 각 회원국의 의회비준을 기다리고 있다.

브라질 의회는 지난 5월 RCTV 재계약 연장을 두고 차베스에 대한 비난 성명을 발표했고, 차베스는 이런 브라질 의회를 두고 미국과 EU의 “앵무새”라고 비난했다. 바로 이 것을 이유로 브라질 의회는 메르코수르 가입 인준을 거부해 왔다. 브라질과 우호적 관계에 있는 파라과이와 우루과이 의회에서도 아직 인준이 완료되지 않은 상태다.

긴장한 룰라...공세펴는 차베스

의회 인준이 늦어지고 있는 것에 대해 차베스는 3일 “변화를 원하지 않는 낡은 메르코수르 가입에 목매달지 않겠다”며 3개월 안에 승인이 완료되지 않는다면 “불행히도 메르코수르에서 탈퇴할 수밖에 없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차베스는 “메르코수르의 구조에서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진정한 의지가 보이지 않는다며” 메르코수르 가입에 목매다느니 차라리 ALBA(미주볼리바르대안)에 더 힘쓰겠다며 ALBA의 존재를 과시하기도 했다.

아모링 브라질 외무부 장관은 “베네수엘라가 회원국에서 탈퇴하지 않을 것으로 기대”한다며, 달래기에 나섰고, “베네수엘라가 회원국이 빨리 될 수 있도록 하는 조건이 마무리되고 있다”며 마음을 돌리려 애쓰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아모링 장관의 이런 태도는 차베스가 정상회의 불참을 선언한 데 대해 보인 반응과는 사뭇 다르다. 메르코수르 정상회의에 앞서 24일 아모링 장관은 “메르코수르 가입을 희망하는 국가는 우선 블록이 규정하고 있는 원칙을 받아들여야 하며, 블록의 변화를 도모하는 것은 차후의 문제”라며 메르코수르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는 차베스에게 쓴소리를 한 바 있다. 일단은 브라질의 주도권 아래에 있는 메르코수르를 인정하라는 이야기다.

차베스는 작년 1월에 열린 31차 정상회의에서 자유시장의 틀에서 설립된 메르코수르이지만 “신자유주의 오염을 제거할 것”을 강력이 촉구해 왔으며, 최근 볼리비아, 에콰도르 등 차베스의 정책을 지지하고 있는 준회원 국가들의 가입을 설득하고 있는 중이다.

볼리비아와 에콰도르 등 베네수엘라의 정책을 지지하는 국가들이 메르코수르 정회원국이 되면, 그 동안 자유시장 정신을 모토로 삼고 있었던 메르코수르는 그 성격 자체가 도전받을 수밖에 없다.

33차 총회에서 에콰도르까지 가입신청서를 제출한 마당에, 베네수엘라를 거부하기에도 명분조차 마땅치 않고, 받아들이기에는 메르코수르의 브라질 독주가 위협받는 부담스러운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

룰라, 미국 파트너로 남미 주도권 잡으려
번번이 부딪히는 룰라-차베스


브라질은 대외적으로는 베네수엘라 정부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고 있다. 지난 5월 RCTV 재계약 거부로 브라질 의회가 차베스 대통령에게 ‘독재’라며 비난을 퍼부었을 때에도, 룰라 대통령이 소속된 노동자당(PT)은 차베스 대통령에 대한 지지를 표한 바 있다.

그러나 속을 들여다보면 상황은 다르다. 남미에서 미국의 파트너 역할을 해온 룰라와 전 세계적으로 ‘반미전선’을 확장하려하는 차베스는 긴장관계를 형성해왔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에너지이다. 브라질은 미국과 함께 에탄올 생산 증대에 열을 올리고 있다. 미국은 에탄올 에너지를 매개로 브라질과 전략적 동맹을 맺고, 남미에서 커져가는 차베스의 영향력을 억제하려는 전략을 갖고 있다고 라울 시베찌 IRC아메리카프로그램 연구원은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차베스 대통령은 쿠바의 카스트로와 함께 바이오에너지가 농민의 생존권을 위협할 것이라며, 바이오에너지 개발에 비판적 입장을 보이고 있다.

차베스 대통령이 ALBA 등을 통해 남미의 좌파 국가들의 연대를 확장하고 있는 것에 대한 ‘반대 행보’도 눈에 띈다. 올해 3월 부시 대통령의 남미 방문과 비슷한 시기 차베스가 남미 국가들을 방문하고, 4월 남미공동체 12개국 에너지 정상회담을 통해 남미 국가들의 지지를 모으자, 룰라 대통령은 칠레와 아르헨티나를 방문해 전략적 동반자의 수준으로 외교관계를 강화하는 행보를 취하기도 했다.

베네수엘라의 모델을 따라 변화를 시도하고 있는 볼리비아에서도 차베스와 룰라는 대립적 관계에 있었다. 볼리비아가 새로운 석유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브라질의 국영 에너지 기업인 페트로브라스에게 새로운 계약을 요구했을 때에도 브라질의 편이 아니라 볼리비아 편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