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도 한 쪽에는 컴퓨터 두 대가 불을 깜빡이고 있고, 그 옆에는 각종 피켓과 대자보들이 약간은 어지러이 놓여 있다. 7층에서 8층으로 올라가는 층계는 마치 신발장인 것처럼 이주노동자들의 신발이 계단 하나에 한 켤레씩 가지런히 놓여 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에 어디 연대투쟁 나갈 곳이라도 있었다면 힘이 나겠지만, 방문한 날은 특별히 외부 투쟁도 없어 여기저기 이주노동자들이 담요를 덮고 이야기를 나누거나, 인터넷을 보면서 여기저기 돌아가는 사정을 보고 있다.
엘리베이터 앞쪽 복도 한편에 농성을 하고 있던 이주노동자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들 중에는 2003년부터 280일간 진행된 명동 농성에서 얼굴이 익은 이주노동자도 있고, 또 새롭게 얼굴을 보인 이주노동자들도 있었다.
미니(가명)의 얼굴이 꽤나 어둡다. 농성 첫날에는 보이지 않던 얼굴이었지만, 그도 2003년 명동 농성에 같이 했던 이주노동자다. 열아홉 살 어른이 되어 한국 땅을 밟은 그의 나이는 이제 스물여덟. 십년이 조금 못되는 시간동안 벌써 두 번째 농성이다.
‘맨발’로 끌려간 여자친구
2003년 농성 때는 ‘막내’라는 애칭으로 수줍어하는 모습도 보여주었던 미니는 이제 제법 ‘아저씨’같은 얼굴로 변했다. “어, 농성 같이 하세요?”라며 인사를 건넸다.
“여자 친구가 끌려갔어요.” 주변에 있던 이주노동자들이 한마디 언질을 준다. 반가운 마음에 인사를 건넨 기자가 머쓱해질 정도로 그의 얼굴은 어두웠다. 13일 오전 출입국 직원들이 그의 집에 들이닥쳐 함께 살던 여자 친구를 신발을 신을 새도 없이 맨발로 끌고 갔단다. 한국말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그녀의 공포에 질린 얼굴을 바라만 봐야 했던 그 때의 충격이 아직 가시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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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니가 여자친구를 다시 만날날은 언제일까?/ 이정원 기자 |
미니가 이불을 걷어내더니 앞으로 다가와 그때 이야기를 한다. 늦은 아침 일어나 쌀이 없어서 쌀을 하나 시켰단다. 그 때 쌀집아저씨 뒤를 따라 집으로 들어온 출입국 직원들은 위층에서 아침 식사를 준비하던 형들을 잡아갔다. 가는 길에 아래층에도 단속이 들어왔다. “두 명 잡고 내려가다가 한 사람 출입국이 방 쪽으로 와서 깔람(가명) 형에게 뭐라고 말 했어요. 내가 잘 못 알아들었어요. 출입국 관리직원이 한국 사람인지 신분증 보여 달라고. 깔람 형이 뭐라고 그랬는지는 모르고, 외국분이죠 그러면 패스포드 보여 달라고. 저는 옷장 쪽으로 숨었고, 여자 친구는 문 가까이에 있었어요.”
“조금 있다가, 5분 있다가 출입국 사람이 우리 자는 방문을 밀었는데, 거기 여자 친구를 봤는데, 여자 있네. 이렇게 얘기해서 여자 친구한테 오라고 했어요. 여자 친구는 한국말 잘 몰라요. 패스포드 보여 달라고. 비자 날짜가 지났네. 가자. 그렇게 얘기해서 맨발로 끌고 갔어요.” 집이라 자기 신발도 있었을 텐데, 신발도 제대로 신기지 않은 채 그대로 끌려가야만 하는 상황이 얼마나 긴박하고 숨이 가빴을까 싶지만, 서투른 그의 한국어 때문인지 표현은 건조하다.
지금 그녀는 화성 외국인 보호소에 있다. 3개월 동안 일거리를 찾지 못해 둘 다 일이 없었다. 지금 당장 본국으로 돌려보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지만, 미니도 그의 여자 친구도 비행기 값을 마련할 돈이 없다. 이 돈을 마련할 때까지 그녀의 여자 친구는 보호소에 갇혀 있어야 한다.
“여자 친구가 일산에서 일했는데, 사우나에서 빨래, 수건 같은 거 빨았어요. 4월 30일에서 9월 23일까지 월급도 아직 안 받았어요. 내 생각에는 월급 그거를 받아서 나라로 보낼 생각인 것 같아요.” 체불임금에 먹고 살기도 힘들었을 그녀는, 결국 그녀가 일한 체불임금을 받아 강제출국당하는 비행기 표값으로 다 써야 할 형편이 되어 버렸다.
함께 지내던 깔람 형도 그날 같이 잡혀갔다. 위층에 있던 형 두 명도 잡혀갔다. 그리고 그는 농성장으로 들어왔다. 2008년 세밑 그는 농성장에서 만난 그의 얼굴에는 ‘분노’보다는 ‘절망’이라는 짙게 드리워져 있다고 해야 맞을 것 같다.
씩씩한 께비씨
그래도 그 옆에 있던 께비(가명)는 그래도 희망을 꺾지는 않았다. 한국에 온지 6년 반 정도 되었다는 께비는 미등록이 된 자신을 오히려 사장이 붙잡았다고 한다. “비자 끝났잖아요. 사장님이 그대로 있으라고 자리를 만들어 줬어요.”
“일을 잘하셨나봐요”라는 물음에 “흐흐..” 쑥스러운 듯 웃는다. “회사에 네팔 사람들이 일 잘해서 많았어요.”
그는 팔 한 쪽에 깁스를 하고 있다. “물건 들어야 되고 포장해야 돼서 인대가 늘어났어요. 300미터, 500미터 전선 잘라서 포장하는 일 했어요. 의정부 쪽에 있는 회사인데 하루 12시간 주야 맞교대요. 그래도 너무 힘들어요. 그냥 이렇게 농성장에서 12시간 있는 것도 힘든데.”
“날치기”로 강제 출국된 라주 이주노조 부위원장과도 절친한 사이였던 그는 “마음이 아파요”란다. “(한국에) 와서 열심히 일하고 돈 벌고 가야되고, 고향도 가고 싶어요. 그렇지만 우리가 언제까지나 한국에서 이주노동자 권리 찾아서 노동자는 하나다 생각하면서 이주노조 만들었는데, 제대로 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한국 정부가 노조 탄압했기 때문에 지금 좀 어려운 상태예요.” 그래도 그는 씩씩하다. “모든 이주노동자 97개 나라에서 온 노동자들. 고용허가제는 14개 나라밖에 안되는데, 이주노동자들을 위해 노동허가제로 가야 되겠다. 이렇게”라며 가야 할 길에 대한 확신은 흔들리지 않는다.
“희망이요? 지역조직 건설해야지요.”
지도부 3인이 ‘표적 단속’되어 강제출국을 당한 후 가장 바빠진 사람은 토르나 위원장 직무대행. 그는 이제 투쟁의 중심에 서 있다. ‘목사’라는 애칭을 갖고 있는 토르나 위원장 직무대행은 평소의 그 느긋한 성격을 잃지 않아 보인다. 편안한 목소리로 “힘든 거요? 집행부 역할 하는데 힘들어요. 원래 자유인이잖아요. 책임감이 크고 하게 되더라도 잘 못하는 것도 있고. 스트레스도 받고...그런게 힘들어요.”
‘자유인’이 되고 싶다던 그는 투쟁의 중심에 서면서 점점 자기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정부 정책에 대해서 비난하는 그의 목소리에도 힘이 실린다. “어려움 속에서 이주노조를 탄압하는 건 정부가 이주노조를 파괴하려는 음모잖아요. 이주노조를 위해서 열심히 했던 분들을 정부에서 한꺼번에 싹쓸이하는 자체가 너무 야만적이다. 이주 정책이 이것밖에 없느냐 이런 생각도 많이 드는데 우리가 해야 할 투쟁이 이거 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이주정책이 이것밖에 없느냐’는 그의 지적은 아직도 이주노동자들을 1회용 물품 쓰다 버리듯, 실컷 일시키고 내쫓는 한국 사회 이주정책의 “야만성”에 대한 지적이다. 법무부 통계로 2006년 현재 국내 미등록 이주노동자는 21만 명. 2003년부터 강력해진 단속과 추방에도 미등록 이주노동자는 계속 증가하고 있다.
이주노동자들은 단속과 추방으로는 미등록 이주노동자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며, 근본적인 이주노동자 정책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제기해왔다. 그러나 정부는 올해 말 ‘영장’없이 의심만으로도 이주노동자 단속을 가능하게 하는 출입국 관리법 개정을 추진 중에 있다. “아무데다 단속하잖아요. 그걸 더 자유롭게.” 이주노동자 정책은 없고, ‘단속’만 있는 것이 한국 이주노동자 정책의 현실이다. ‘노동법’ 적용은 희망사항일 뿐이고, 오로지 이들에게 강요되는 법은 ‘출입국관리법’ 즉, 단속과 추방에 관한 법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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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정원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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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정원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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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년에는 이 촛불이 '자유로운 노동'을 향한 씨앗이 되길.../이정원 기자 |
“희망이요? 변할거라는 희망은 없어요. 그래도 농성하면서 법무부의 야만적이고 비인간적이고 인종차별적인 행위가 알려졌다는 것이 하나의 결과이고, 민주노총을 비롯해서 진보적인 지식인들이 비대위를 구성해서 여기까지 왔어요.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큰 성과지요. 이주노조 지역부터 분회부터 연행되면서 이주노조 조합원이 4-50명 연행되었는데, 지역 조직건설해야 하는 것이 목표지요.”
너무나 당연한 소망들..."희망이 있어 투쟁한다"
이주노동자들의 2008년 이주노동자들의 희망을 어디에서 발견할까? 이주노동자들은 스스로를 “바닥 노동자”라고 부른다. 정규직 밑에 비정규직, 그리고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들 밑에 어떤 신분의 보장도 없이, 사장 한 마디에 시장에서 찬거리를 사다가도 당장 내일 한국에서 쫓겨날 수도 있는. 그래서 사장이 욕하고, 때리고, 신고한다고 윽박지르고, 휴가도 없이 일해도, 월급을 주지 않아도 아무 말 못하는 것이 ‘바닥 노동자’인 이주노동자들이다. 아니, 그렇게 살아야 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이주노동자들은 그렇게 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싸움을 통해, 같이 투쟁한 ‘동지’를 잃어가면서 깨달았다. 2008년 세밑 한국 땅에서 이들은 이렇게 차가운 복도에서도 ‘바닥 노동자’들의 희망을 일구고 있다.
2003년 이주농성에 이어 두 번째 농성을 하고 있는 나렌드라 경기남부 지부장에게 2008년의 희망을 물었다. 나렌드라 지부장은 너무도 담담하게 “세계에서 이주노동자들이 자유롭게 노동하는 거”라고 대답한다. 너무나 당연한 일이 희망이 되고 꿈이 되는 세상이다.“희망이 있으니까, 꿈 있으니까, 희망을 위해 투쟁하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