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보다 열악한 노동조건의 이주노동자"

[인터뷰] 이주노동자대회에서 만난 먼주 씨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26일 서울 종로 영풍문고 앞에 모여들었다. 흐린 날씨였지만 그들은 손팻말을 하나씩 들고 길에 자리를 잡았다. 손팻말에는 'I want labor rights', '이주노동자에게 자유롭게 일할 수 있는 권리를!', '이주노동자를 합법화하라'는 등의 문구가 적혀있었다.

이주노동자 집회에서 얼굴을 자주 볼 수 없었던 중국 조선족도 한 자리를 잡았다. 03년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경제위기가 계속되면서 국적과 인종이 다른 이주노동자뿐 아니라 조선족의 차별도 심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2004년 국회에서 통과된 재외동포법 개정안의 시행을 요구하고 있었다.

이날 집회는 다음 주에 열릴 119주년 노동자의 날에 앞서 이주노동자들이 모인 집회였다. 이주노동자가 주인공이 집회인 만큼 다양한 이주노동자의 발언이 이어졌다. 한국어로 발언을 하는 이주노동자도 있었지만 자신들의 모국어나 영어로 발언한 이들도 있었다. 이들 중 눈에 띠는 한 여성이 있었다. 집회 사회를 보던 먼주 씨다. 그녀는 시종일관 미소를 머금고 한국어와 영어를 번갈아가며 사회를 봤다.

이주노동자도 '사람'임을 알렸던 그녀, 학생으로 돌아오다

90대년 초 그녀는 17세의 나이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한국에 왔다. 1991년 처음으로 시행된 해외투자기업연수생제도(93년 산업연수생제도로 변화)를 통해 한국에 온 것이다. 그녀의 첫 한국행은 가혹하기만 했다. 먼주 씨는 산업재해로 손가락 두 개를 잃고 말았다.


산업재해를 당했음에도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한 그녀는 1994년 1월 10일 10명의 동료와 함께 사업장을 이탈해 '사람임을 증명'하기 위해 경실련 강당에서 농성을 시작했다. 이주노동자 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농성이었다. 그녀는 농성 후 한국사회에서 공식적으로 첫 번째 산재보상을 받은 이주노동자가 됐다.

먼주 씨는 2008년 학생의 신분으로 한국에 돌아왔다. 그녀는 아주대학교에서 NGO관련 석사과정을 밟고 있다. 체계적으로 운동을 하고 싶어서다. 그녀는 학업 중에도 이주노동 중 노동력을 상실한 산재피해자의 자녀를 돕는 일을 이어오고 있다.

그녀는 2008년 전까지 중국, 말레이시아, 이스라엘 등 각국을 돌아다니며 이주노동자 운동을 해왔다. 본국에 있을 때는 외국으로 떠나는 네팔 노동자의 상담을 했다. 네팔의 절대다수의 노동계급은 자국에 생산시설이 없어 생계를 위해 전 지구를 떠돌아다니고 있다.

"더불어 살면서 행복해져"

한국과 다른 국가의 이주노동자 조건에 대해 묻자 그녀는 "중국이나 말레이시아 같은 곳보다 월급은 많죠. 하지만 이마져도 임금에서 숙박비를 제하면 얼마 건지지 못해요. 노동조건은 더 열악해요. 8시간 이상 노동을 할 때 추가수당을 안 주는 경우는 적거든요. 경제위기로 최근 조건이 더 안 좋아지고 있어요. 한국노동자들도 힘들다는 것을 알아요. 하지만 같은 노동자잖아요"라고 답했다.


이주노동자 투쟁은 2004년 고용허가제 실시와 2007년 산업연수생제도 완전 폐기를 이끌어냈다. 그러나 지난 8일 공개된 출입국관리사무소 직원이 중국인 여성 2명을 폭력적으로 단속하는 영상만 봐도 알 수 있듯 이주노동자 현실은 크게 개선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이주노동자의 최저임금을 20% 삭감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는 등 한국의 이주노동자 정책은 후퇴하고 있다.

먼주 씨는 "한국에 처음 왔을 때는 가족만 생각했죠. 경실련에서 농성을 한 후로 더불어 가는 삶을 생각하게 됐고 그게 행복한 삶이라는 것을 알았어요. 삶이 완전히 바뀌었죠. 당시 한국사회도 이주노동자 쉼터 같은 곳도 거의 없을 때였어요. 당시 농성을 시작으로 이주노동자 단체들이 늘어나기 시작했죠. 희망은 세상을 만드는 우리 손에 있다고 생각해요"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