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회찬 정의당 원내대표가 고층 아파트에서 투신해 사망했다. 노 원내대표는 포털 댓글 여론조작 혐의로 수사를 받고 있는 ‘드루킹’ 김동원 씨 측으로부터 정치자금을 수수했다는 의혹을 받아왔다. 고인은 유서에서 ‘드루킹 관련 금전을 받은 사실은 있으나 청탁과는 관련이 없다. 가족에게 미안하다’는 메시지를 남긴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에 따르면 23일 오전 9시 38분경 서울 중구 신당동 소재의 한 아파트 현관에서 사망한 채로 경비원에 의해 발견됐다. 고인의 외투가 아파트 계단에서 발견됐고, 신분증이 든 지갑, 정의당 명함, 유서로 보이는 글이 외투에 들어있던 것으로 알려졌다.
정의당은 오후 12시 40분 긴급 브리핑을 열고 “사건과 관련한 대략의 사실관계는 경찰의 발표와 같으며, 자세한 상황은 저희도 파악 중”이라고 밝혔다. 최석 정의당 대변인은 “참담한 마음을 금할 길 없다”며 “고인과 관련된 억측과 무분별한 취재를 삼가주실 것을 정중히 요청드린다”고 말을 아꼈다. 정의당은 오후 3시 고인의 빈소에서 긴급회의를 열 예정이다. 빈소는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돼 있다.
노회찬 원내대표 사망소식이 전해진 후, 진보정당들은 충격과 애도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노동당 유증희 대변인은 "참으로 안타깝고 비통한 일"이라며 "당적을 떠나 진보정당운동을 함께 일궈왔던 이들에게 큰 충격이 아닐 수 없다. 노동당은 노회찬 의원의 비보에 당원과 함께 정중한 애도를 표한다"고 밝혔다.
민중당도 추모논평을 내고 "노회찬의원의 급서 소식을 듣고 황망한 마음을 감출 길이 없다. 민중당은 대표단회의를 잠시 중단할 정도로 충격에 휩싸였다. 당원들 모두가 같은 마음일 것이다"라며 "고인은 오래도록 진보정치의 산증인이자 핍박받는 민중의 대변자였으며 민중당의 정치적 동지였다. 지난 총선에서 민중당 당원들은 창원성산선거구에서 노회찬 후보로 단일화하여 당선을 돕기도 했다"고 고인을 기억했다. 이어 "진심으로 명복을 빈다. 아울러 고인을 갑작스럽게 잃고 슬픔에 잠겨있는 정의당 이정미 대표와 당원들, 유가족에게 위로의 인사를 드린다"고 했다.
여당과 보수정당 등도 애도를 표하고 나섰다. 더불어민주당은 오전 추가 서면브리핑에서 “어떤 말로도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슬프고 충격적인 일”이라며 “고인의 명복을 진심으로 빌며, 유가족에게도 마음 깊이 애도를 표한다”고 밝혔다.
이어 “노회찬 의원은 우리나라 진보정치의 상징으로서 정치인이기 이전에 시대정신을 꿰뚫는 탁월한 정세분석가이자 촌철살인의 대가였다. 또한 척박했던 90년대 초부터 진보정치의 희망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왔던 진보정당 역사의 산증인이었고, 뛰어난 대중성을 바탕으로 많은 국민의 사랑을 받아왔다”라며 “노회찬 의원이 지향했던 진보와 민주주의 가치들은 후배 정치인들이 그 뜻을 이어받을 것”이라고 추모했다.
자유한국당도 논평을 내고 “확고한 정치철학과 소신으로 진보정치 발전에 큰 역할을 하셨던 고 노회찬 의원의 충격적인 비보에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진보 정치의 상징으로 서민과 노동자를 위한 의정활동에 모범을 보여주셨고, 정치개혁에도 앞장서 오셨다. 현실에서의 고뇌는 모두 내려놓으시고 영면에 드시길 바란다”고 애도를 표했다. 이어 “고인이 못다 이룬 정치발전에 대한 신념은 여야 정당이 그 뜻을 이어 함께 발전시켜 가겠다”고 밝혔다. 민주평화당도 논평을 내어 “충격적이고 슬픈 일이다. 고인이 겪었을 심적인 고통을 생각하니 뭐라고 할 말을 못 찾겠다. 진보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평생을 헌신해온 고인의 명복을 빈다”고 덧붙였다.
고인은 노동운동에 헌신하며 진보 정치의 길을 걸어왔다. 1956년생으로 올해 62세인 고인은 고려대 재학 시절 민주화 운동을 시작했으며, 특히 80년 광주민중항쟁에 큰 영향을 받고 노동운동에 전념했다. 87년 6월 항쟁 이후, 고인은 인천, 부천의 노동조합과 노동운동 단체들을 결집해 인천민주노동자연맹(약칭 인민노련)을 출범시킨 핵심 멤버로 활동한다. 인민노련의 목표는 노동자 계급의 정치세력화였다. 하지만 곧 인민노련 결성 관련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1989년 구속됐고, 3년의 투옥 생활을 거쳐 만기 출소했다. 이후 1992년 대선에서 백기완 후보 선거대책본부에서 활동하며 재야 정치를 이어나간다.
이후 1997년 ‘국민승리21’ 기획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본격적인 중앙 정치 활동에 뛰어들었다. 민주노동당 창당 이후에는 2000년부터 2002년까지 민주노동당 부대표를 지냈다. 2004년 17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민노당 비례대표로 당선돼 처음 국회에 입성했다.
민노당이 노동당과 진보신당으로 분당된 이후 2008년 심상정 대표 등과 함께 진보신당을 창당하고, 공동대표를 지냈다. 2012년 19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통합진보당 공천을 받아 서울 노원병에 출마해 당선됐으나 과거 ‘삼성 X파일’ 관련 ‘통신비밀보호법’ 위반 혐의로 유죄 판결이 확정되며 의원직을 상실했다. 2016년 20대 국회에서 정의당 공천을 받아 경남 창원시 성산구에 출마해 당선됐다. 정의당 원내대표를 3연임하면서 당을 이끌어왔다.
특히 고인은 ‘삼성 X파일’ 사건으로 주목받았다. ‘삼성 X파일’은 옛 안기부가 1997년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과 이학수 전 삼성그룹 구조조정본부장의 대화 내용을 불법 도청한 사건으로 고인은 현역 국회의원이던 2005년 8월 이 파일에서 떡값을 챙겨줘야 할 대상으로 나온 전현직 검사 7명의 실명을 폭로해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이 사건으로 고인은 의원직을 상실했지만 검찰은 삼성 이건희 회장, 이학수 부회장,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 등을 횡령혐의로 처벌하기 어렵고 뇌물공여혐의도 공소시효가 완료됐다며 무혐의 결정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