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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년째 투쟁하고 있는 과천 철거민 김이옥 부녀부장(왼쪽)과 방승아 위원장(오른쪽) [출처: 연정] |
길바닥에서 청춘을 다 보냈습니다.
4월 14일 아침 7시 50분, 서울 서초구 서초동 삼성 본관 앞에서 과천철대위(전국철거민연합 과천철거민대책위원회) 집회가 열리고 있다. 과천 철거민 김이옥 씨(과천철대위 부녀부장)가 마이크를 잡고 절규한다.
“55세에 철거민이 돼서 16년을 길바닥에 있습니다. 생각하면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5년만 장사 하려고 했던 것이 5년 계약했다가 겨우 2년 장사하고 아직까지 보증금 한 푼 받지 못한 채 오늘도 통곡을 하고 있습니다. 해결 약속 지키십시오. 얼마면 되냐 얼마면 되냐 얼마면 받을 거냐. 돈 자랑 할 데가 없어서 철거민을 상대로 돈 자랑 힘 자랑을 일삼더니 해결을 했습니까? 16년째 길바닥에서 이렇게 청춘을 다 보냈습니다. 해결약속 지키라고 이재용 부회장한테 외치고 있습니다. 힘자랑 그만하고 해결약속 지키십시오.”(김이옥)
55세에 투쟁을 시작해 올해 70세가 된 김이옥 씨는 노조파괴와 철거민 사찰까지 하는 삼성이라면, 지금도 여전히 철거민 집회 녹음과 비디오 촬영을 하고 있을 거라고 했다. 과천3단지 재건축 시공사인 삼성물산은 과천시청의 중재 하에 철거민들에게 두 차례나 해결 약속을 했으나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해결할 것처럼 ‘얼마를 요구 하냐?’는 말을 한 것은 헤아릴 수도 없다. 합의하자고 해놓고 일주일만 기다리라더니, 1억 5천만 원 손해배상 소송을 걸기도 했다. 피해보상 합의금을 낮춰달라고 해서 그러겠다고 했더니 연락을 두절한 일도 있었다. 김이옥 씨에 이어 과천철대위 방승아 위원장이 발언을 이어간다.
“법 없이도 살던 과천 철거민이 재건축 하면서 맨몸으로 쫓겨났습니다. 재건축을 하려면 이주 대책을 세워야 하지만, 이주대책과 투자했던 금액은 고사하고 맨몸으로 쫒아내 길바닥에서 16년을 났습니다. 가정에서 있었던 세월보다 이 차안에서 길바닥에서 보낸 세월이 더 오래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싸우다보니까 한이 맺혀서 우린 이미 목소리도 변했고, 성격도 변했고 가슴에는 악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방승아)
방승아 씨의 목소리에서 깊은 한이 배어 나온다. 이렇게 마이크 잡고 평화롭게 집회를 한 게 몇 년 되지 않는다고 했다. 과천 철거민들이 이곳에 처음 왔을 때, 합법적인 집회신고를 냈음에도 삼성은 삼성에스원 직원들을 동원해 1인 시위도 못하게 폭력을 행사하고 현수막과 피켓 하나도 걸지 못하게 했다. 이건희 회장이 2011년부터 3년 동안 이른바 ‘출근경영’을 하던 시기, 삼성에스원 직원 7~8명은 이 회장의 출퇴근 시간에 맞춰 1인 시위를 하는 과천 철거민의 목을 조르고 폭행했다. 일인시위 조차 하지 못하게 하는 삼성의 폭력을 경험하며 방 위원장은 밧줄을 목에 메고 카터 칼로 손목을 긋기도 했다. 목에 건 밧줄을 양쪽에서 잡아당긴 이들은 삼성 직원들이었다.
돈 많이 벌으라고 5년 계약을 해줬어
이십여 분간 진행된 아침 집회가 끝나고 과천 철거민들이 이들의 농성장인 봉고차에 오른다. 방승아 위원장이 보온병에 담아온 뜨거운 물로 커피를 타서 건넨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철거민들은 이곳에서 하루 24시간 주말과 휴일도 없이 노숙투쟁을 했었는데, 요즘은 오전 7시부터 오후 4시 까지 출퇴근 투쟁을 하고 있다. 어차피 해결 될 때까지 해야 하는데, 두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하자는 생각에서다.
“예전에는 여기가 삼성물산이어서 둥지들 튼 건데, 강동구로 가버렸어요. 그때는 미래전략실도 여기에 있고 이건희 회장과 이재용 부회장을 맨날 맞닥뜨리기도 했어요. 삼성물산이 이주하면서 은근히 우리한테 ‘그쪽(강동구)으로 와서 하시라’고 하는데, 삼성이 좋아하는데 갈 수는 없잖아요. 우리를 위해 그런 소리 하는 게 아니잖아. 안 갔죠. 삼성은 여기가 본사가 아니라고 하는데, 이재용 부회장도 여기를 신경 쓰고, 아직도 이곳에서 회의가 많아요.”(방승아)
2000년대 초, 방승아 씨는 남편 회사의 부도로 생계 전선에 뛰어들었다. 초등학생이던 아이 교육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과천 주공3단지 상가에서 동생과 함께 옷 가게를 시작했다. 자신과 남편 카드로 대출을 받아 다른 사람이 창고로 쓰던 공간 전체를 올 수리 하고 옷 공급업체에 체인비를 낸 뒤 장사를 시작했다.
당시 과천3단지는 주거용 아파트 3150세대와 상가 157개 점포로 이루어져 있었다. 상가 대부분에서는 상가세입자들이 장사를 했다. 10년 전부터 재건축을 하니 안하니 하는 말은 있었지만, 인허가가 나지 않아 승아 씨의 상가 주인도 사실상 포기하고 있던 때였다.
“대한민국 땅에는 어디든 개발이라는 말이 없는 데가 없어. 관리비도 못 내고 망하게 생겼는데, 월세라도 주겠다니까 얼마나 땡잡은 거야. 주인이 고마워가지고 내 손을 잡고 돈 많이 벌라고 5년 계약을 해줬어. 우리 가게가 후미진 곳이었는데, 동부이촌동에서도 오고 단골이 많았어요. 동대문에서 물건을 뗄 때도 내 단골손님 취향에 맞춰서 뗐어. 손님 취향에 맞춰서 옷을 떼어오니까 재고도 없고. 저는 솔직히 그건 타고났다고 봐요. 내가 옷이랑 옷 입는 걸 좋아했어요. 내 동생은 브랜드를 굉장히 잘 알아서 그런 쪽으로 특출 나고.”(방승아)
승아 씨는 옷이 마음에 안 들면 직접 리폼을 하고, 남는 재고로 가방을 만들며 즐겁게 장사를 했다. 비슷한 시기, 김이옥 씨도 장사를 하기 위해 과천 3단지 상가로 왔다. 보증금과 권리금, 시설비, 집기 구입 등 초기 투자비용이 만만치 않았다. 함께 가게를 시작했던 동업자가 중간에 그만두면서 그 사람의 투자비용을 돌려주는 일까지 겹쳐 이옥 씨의 부담은 더 커졌다.
“과천에 사는 아는 형님이 과천 3단지 상가가 장사가 잘 된다고 그래서 거기를 5년 계약했어. 딱 5년만 장사하면 그럭저럭 살겠다 싶어서 5년만 장사 하려고 그랬어요. 세상에 2년 장사하고 길바닥에서 16년 저기(투쟁) 할 줄은 상상도 못했어.”(김이옥)
반찬가게로 장사를 시작했는데, 마진이 별로 남지 않아 두 달 만에 김밥과 떡볶이를 파는 분식집으로 업종을 바꾸었다. 한 줄에 꼬마김밥 5백 원, 일반 김밥 천 원 씩 팔았는데, 조미료를 안 쓰고 좋은 재료로 팔다보니 사람들이 줄을 서서 사갈 정도로 장사가 잘 됐다. 이옥 씨는 가게에 있는 작은 방에서 거의 숙식을 하며 장사를 했지만 힘든 줄도 몰랐다.
“비법이 어디 있어요. 집에서 보편적으로 하는 방법이지. 햄하고 맛살은 유통기한이 긴 걸로 그때그때 썰어서 넣고, 프라이팬을 쓸 때도 딱 하나씩만 볶고, 재료를 오래 놔두질 않아. 꼬마김밥에는 단무지를 잔잔하게 썰고 계란도 얇게 썰어 넣어. 저는 시금치는 잘 안 쓰고 거기다 오이를 넣었어요. 그래가지고 바로바로 싸주니까 집에서 싸는 그 맛이라는 얘기지. 금요일은 밥하기 싫으니까 직장인들이 많이 사갔는데, 퇴근시간 되면 30분씩 기다렸어.”(김이옥)
법적으로 맨몸뚱이로 쫓겨나도 당연하다고 되어있어요
그렇게 승아 씨와 이옥 씨가 2년 조금 넘게 장사를 하며 이제 좀 할만하다 싶을 때였다. 2004년 10월 29일, 갑자기 과천시 주공 3단지 재건축사업시행 인가가 났다. 과천시는 교통영향평가, 환경영향평가, 주민공람 등의 절차가 모두 마무리 됐다며 과천3단지 재건축 사업을 승인했다.
“갑자기 6개월 만에 인허가가 난 거야. 아무도 모르게 진행이 된 거죠. 다른 개발 지역은 10년 동안 이사를 보내도 안가고 그러잖아요. 근데 여기는 얼마나 돈 많은 지역인지 6개월 만에 3150세대가 다 나가버렸어. 삼성으로부터 일당 20~30만원 씩 받고 재건축 동의 받으러 다니는 사람들이 우리 가게 단골이었어. 그 사람들이 우리한테 한 얘기가 있어. 삼성이 하면 안 되는 일이 없다.” (방승아)
방 위원장은 당시 과천3단지 재건축이 이해가 안갈 정도로 빨리 진행된 이유가 그 다음해 4월 시행을 앞두고 있던 재건축 개발이익환수제(재건축 시 임대아파트를 의무적으로 공급해야 하는 제도) 때문이라고 이야기했다. 돈 많은 과천 사람들이 거기에 임대 아파트 짓는 걸 보겠냐는 거다. 시공사인 삼성물산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재건축 사업을 진행했다.
“우리 장사하는 사람은 재개발이든 재건축이든 진짜 피해자지. 근데, ‘아야’ 소리도 못 하는 거잖아요. 법적으로 재건축 세입자들은 맨몸뚱이로 쫓겨나도 당연하다고 되어있어요. 법적으로 누구도 책임이 없는 거예요. 투쟁을 하느냐, 여유가 되서 딴 데로 가느냐. 두 가지 밖에 방법이 없어.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올 수밖에 없었어요. 장사하는 사람은 그게 생계고 생활 터전이잖아요.”(방승아)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에서는 개발 사업을 재개발과 재건축으로 나누고 있다. 도로와 상하수도 등 정비기반시설은 양호하나 노후·불량건축물에 해당하는 공동주택이 밀집한 지역에서 이루어지는 재건축은 민간개발로 분류된다. 그래서 이곳의 세입자들은 재개발 세입자들과 달리 이주비와 영업 손실보상금 한 푼 받지 못하고 쫓겨나야 한다. 이주대책은커녕 들어올 때 투자한 권리금과 시설비, 체인비 등 피해보상 한 푼 없이 보증금만 받고 나가라고 했다.
“우리가 투쟁하는 대상이 그렇잖아요. 처음에는 인허가 내준 시청, 개발의 주체자인 조합, 그리고 삼성물산 같은 시공사. 이렇게 세 곳에 의해 개발이 이루어지잖아요. 과천시에는 최소한 이주대책 정도는 세우라고 요구하는 거고요. 조합에도 과천시와 시공사와 함께 논의하면서 우리 이주대책을 세우라고 싸움을 해나가는 거지. 우리는 사회적인 책임을 요구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방승아)
전철연 조끼 입고 붉은 띠 두르니 뒤로 한 명 두 명 빼내
방 위원장은 당시 재건축 조합 책자에 영업보상비 3백억 원이 기재돼 있었음에도 세입자들에게 이사비조차 지급하지 않았다고 했다. 이러한 행태에 문제제기 하는 세입자들에게 돌아온 것은 명도소송과 압류였다. 명도소송을 당하고 수원지방법원을 오가다가 그 앞에서 전철연을 만나게 됐다. 그리고 백여 명의 세입자가 전철연에 가입하면서 본격적인 투쟁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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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년째 투쟁하고 있는 과천 철거민들의 삼성 본사 앞 농성장. [출처: 연정] |
“전철연 가입하고 조끼를 입고 붉은 띠를 두르니까 ‘큰일 났다’ 이래갖고 과천시청이랑 조합 삼성물산이 뒤로 한 명 두 명 빼냈어요. 어느 날 보니까 한 번에 돈을 다 주고 17명 남았다니까. 그 17명도 시청에서 죽어라고 머리에 양배추를 얹고 투쟁을 하니까 7명 남겨놓고 다 해주고. 7명이 점거투쟁을 하니까 3명 해결해주고, 어느 날 보니까 4명 남은 거야. 알고 보니 삼성물산이 다 해결 했다는 거야. 우리는 도저히 길이 없다. 삼성으로 가자해서 여길 온 거지. 여기서 또 죽어라 투쟁하니까 또 한 명이 해결 되서 떠나고 3명만 남았어요. 우리 철거민 중에는 삼성이 시공사인 데가 몇 군데 있었어요, 삼성이 그러더래요. ‘몇 푼 받고 갈래, 아니면 너희도 삼성 와서 걔네처럼 12년 투쟁할래?’ 우리가 얼마나 처절하게 투쟁하는지 아니까 무섭잖아. 얼른 받고 다 나가버린 거야. 그렇게 우리를 본보기로 남겨놓은 거지.”(방승아)
마지막 남은 세 명 중 한 명은 옷가게를 함께 했던 방승아 위원장의 동생 방준아 씨다. 그는 삼성의 폭력으로 자살충동을 느껴 시골에서 요양 중이다. 방 위원장이 동생이 바짝 마른 나뭇가지처럼 생명력이 없어 보인다며 눈물을 글썽인다. 철거민들이 집회에서 삼성의 폭력을 이야기하면, 곧바로 명예훼손죄와 업무방해 등의 고소가 뒤따랐다. 철거민들은 벌금 낼 돈이 없어 양로원 청소·설거지와 임대아파트 청소 등 두 차례의 사회봉사활동을 했다. 현재도 집행유예 상태다. 삼성은 심지어 생활이 막막해 임대아파트라도 들어가라고 딸이 챙겨주던 김이옥 씨의 주택 청약통장 까지 압류했다. 이들의 집회용 봉고차도 무수한 과태료 딱지로 사실상 압류 상태다. 각종 고소·고발에 벌금 빚만 수 천 만원이 넘어 이제는 투쟁을 포기하려야 포기할 수조차 없게 됐다.
“가족들도 믿지를 않아. 어쩌다가 얘기를 한마디 꺼내면 ‘삼성이 설마 그런 짓을 할라고.’ 애들도 ‘엄마, 설마...’ 하니까 누구한테 얘기를 못해. 우리만 속으로 끙끙. 그게 쌓이고 쌓여서 한이 된 거에요.” (김이옥)
배신감과 한이 더 쌓이니까 더 못가는 거야
과천3단지 시공사인 삼성물산 측에 전화 인터뷰 요청을 했지만, 담당부서인 커뮤니케이션팀에서는 “외부 인터뷰는 하지 않는다. 이 부분에 대해 답변해줄 사람이 없고, 답변을 해줄 수 없다. 그 내용을 갖고 있는 게 없다.”며 전화 통화조차 거부했다. 당시 과천3단지 재건축 인허가를 해준 과천시청 측의 입장과 해결방안을 듣기 위해 과천시청에도 인터뷰를 요청했다. 관련 실무 부서에서는 3단지 재건축이 끝나 팀이 해체돼 담당자가 사라져 답변을 해줄 수 없다고 했다. 과천시청 소통·정책자문관실에 연락을 하니 과천 철거민 문제를 알고 있고 안타깝게 생각하지만, 과천시는 문제 해결의 직접적인 주체가 아니라고 했다. 시공사인 삼성물산은 이제 이 문제가 자신들과 관계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며, 최근 1년 이상 삼성물산 측과 소통하지 않고 있다고 했다. 과천시와 삼성물산이 함께 대안을 마련하는 방안에 대해 묻자 삼성물산이 꿈쩍도 하지 않아 어렵다고 했다.
16년이 흘렀다. 투쟁을 시작할 때 초등학생이던 아이가 20대 중반이 되고, 고등학생이던 아이가 30대 중반이 됐다. 과천 주공3단지는 ‘래미안슈르 3단지’라는 이름으로 완공돼 입주가 끝나고 재건축 조합도 해산됐다. 하지만, 승아 씨와 이옥 씨는 여전히 강남 삼성 앞에서 피켓을 들고 서있다.
“아휴...어떻게 왔는지 어떻게 시간을 보냈는지 그게 생각이 안나. 너무 억울하고 분하고 한 맺혀서 왔는데 지금부터 3년을 투쟁하라고 하면 못 할 것 같아. 끔찍해요. 나는 딱 한 번 2~3년 쯤 됐을 때 재판 갔다 오다가 버스 안에서 (뒷거래 제안) 전화를 받았어. 적당히 투자금에다가 조금 더 받고 가라고. 그래서 내가 위원장한테 전화로 보고를 했어. (그때 왜 안가셨어요?) 나만 가는 게 아니라 다 해결돼야지. 함께 가자고 했잖아. 요즘은 옛날 같으면 투쟁한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피곤할까 생각하다가 ‘아, 70이지. 아이구.’ 그래요. 얼마나 더 살 수 있을까 생각하면 서글퍼. 내가 어떻게 이렇게 투쟁을 했나. 투쟁한 만큼 살 수 있을까. 투쟁을 하기는 끝까지 해야지. 제발 좀 사회적 책임을 다 하는 차원에서 여기 민원인들 해결을 다 해줘야 하지 않겠습니까.”(김이옥)
‘철거민 투쟁을 이렇게까지 해야 되는지 나는 진짜 몰랐었어. 더 많이 당하면 더 강해진다고. 둘 중에 하나에요. 강해지든가 두려워서 가든가. 나는 다 망가지고 그러니까 더 강할 수밖에 없었던 거잖아. 나는 명도소송 들어오고 본격적으로 법정에 끌려 다니기 시작했어요. 고소에 현행범 체포에 2년 되고 3년 됐어. 별거 아닌 위원장이란 게 그렇잖아요. 나는 적당히 가고 싶어도 옆에 있는 사람이 억울하면 더 가야되는 게 있어요. 우리 부녀부장님이랑 오죽하면 그랬잖아요. 해결 안 되면 관 뚜껑이라도 들고 온다. 농담이 아니에요. 어쩔 수 없잖아요. 우리 철거민 동지는 이런 개발 악법에서 없어질 존재들이 아니야. 사람은 바뀔지 모르지만 내가 죽으면 내 가족이 있고 우리 동지들이 있으니까 누군가는 연대해서라도 승리해줄 거야. 이재용 부회장은 대국민 사과 이전에 삼성 때문에 고통 받는 사람들 문제를 다 해결해줬으면 좋겠어요.(방승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