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랍혁명이 일어난 지 11년이 지난 지금, 이집트가 구체제가 부활하는 테르미도르를 경험하고 있다면 튀니지는 보나파르티즘을 연상시키는 양상을 보인다. 이집트가 민주적인 과정을 통해 집권한 무슬림형제단 출신 대통령을 쿠데타로 몰아내고 폭압적인 체제를 부활시켰다면, 튀니지는 혁명 이후 수립된 ‘2014년 체제’의 주역인 이슬람주의 정당 엔나흐다를 무력화하기 위해 사이에드 대통령이 쿠데타에 가까운 조처를 했다. 아랍혁명의 불씨를 댕긴 2010~2011년, 민주적인 체제 수립으로 예외적인 성공사례로 칭송받은 2014년, 기성 정치권 출신이 아닌 인물이 대통령에 당선된 2019년, 튀니지는 언제나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그리고 2021년부터 1년여의 상황은 이전과는 다른 의미에서 주목받고 있다.
1. 국민이 원한(?) 새로운 헌법
지난 8월 17일 국민투표를 통해 확정된 신헌법이 발효됐다. 헌법을 전공한 카이스 사이에드 대통령 주도로 마련된 새로운 헌법은 대통령에게 막강한 권한을 부여한다. 대통령이 의회의 동의 없이 단독으로 총리와 장관을 임명하거나 해임할 수 있으며, 국회해산권도 갖게 됐다. 혁명의 산물인 2014년 헌법에 따르면 대통령이 의회를 해산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 카메라로 생중계되는 상황에서도 주기적으로 이런저런 종류의 폭력이 발생하는 의회, 사이에드가 추진하는 개혁에 걸림돌이 되는 의회를 제압할 길이 생긴 것이다. 역으로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 절차는 더 어렵게 만들었다. 5년 임기에 1회 연임이 가능한 대통령의 임기 역시 ‘임박한 위험’을 근거로 연장할 수 있게 됐다. 이로써 벤 알리 시대의 독재로 회귀하지 않게 대통령의 권한을 제한하는 2014년 헌법의 시대가 막을 내렸다.
7월 25일 국민투표에 부쳐진 개헌안은 94.6%라는 압도적인 찬성으로 통과됐다. 이는 2011년 혁명 이후 치러진 선거 중 가장 높은 지지율을 기록한 선거다. 혁명으로 퇴진한 벤 알리 대통령 집권기의 득표율을 연상케 하는 수치였다. 역설적으로 반대진영의 선거 보이콧 호소에도 사이에드에 부정적인 소수의 유권자가 투표소에 나온 덕에 우스운 결과를 면한 측면도 있다. 사이에드는 이렇게 말했다. “국민이 원한다. 국민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 그리고 적어도 투표로 의사가 표현된 부분만 보면 신헌법은 국민이 원하는 것이었다.
개헌안 투표가 치러진 날은 의회해산 조치를 발표한 지 정확히 1년이 되는 날이었다. 그동안의 과정을 되짚어 보자.1) 2021년 7월 25일 사이에드 대통령은 원내 1당인 엔나흐다 당과 수개월에 걸친 갈등 끝에 한 달 동안 의회의 기능을 정지시키고 같은 당 출신 총리인 히솀 메시시를 경질한다. 정적들을 무력화한 후 그는 9월 22일 대통령의 행정명령만으로 통치를 허용하는 조치를 발표한다. 2022년 1월 15일에는 헌법 개정을 염두에 두고 국민 의견을 직접 듣는다는 취지로 온라인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국민이 경제, 정치, 사회 등 여러 영역에 속한 30개의 질문에 응답하는 식이었다. 2월 6일에는 법관과 검사 임명 등을 담당하며 사법부의 독립을 보장하던 헌법기관인 고등사법위원회(CSM)도 해체됐다. 부패 혐의와 법관의 징계와 관련한 조사 업무를 지연시킨다는 이유로 내려진 조치였다. 2월 6일이라는 날짜를 선택한 것도 이유가 있었다. 즉, 9년 전 바로 이날 민주진영 인사였던 쇼크리 벨레이드가 급진 이슬람주의자들에 의해 살해된 것에 대한 보복이라는 점을 추정할 수 있다. 6월 4일, 사이에드가 임명한 자문위원회가 대통령 관저인 카르타고 궁전에서 개헌안 준비를 위한 첫 모임을 가졌다. 자문위 위원장을 엔나흐다 당에 매우 비판적인 입장을 취해온 법조인 사독 벨레이드가 맡았다는 점에서 새 헌법의 의미를 가늠할 수 있었다. 6월 30일 헌법 개정안이 발의됐는데 위원회의 작업 결과와는 상당히 다른 것이어서 사이에드가 임명한 위원장조차 크게 반발할 정도였다. 그리고 7월 25일 이 헌법에 대한 국민들의 의사를 묻는 투표를 실시했다.
2. 합의의 정치문화와의 단절
새 헌법안이 공개되자 우려의 목소리가 커졌다. 대부분 독재로의 길이 열릴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2019년 사이에드가 예상을 뒤엎고 대통령에 당선될 때, 정치계급의 이권 다툼으로 좌초되고 있던 혁명의 불씨를 되살릴 것으로 기대했던 이들도 등을 돌렸다. 물론 사이에드의 행보를 정치권이 왜곡한 2011년 혁명을 올바로 세우는 것이라는 평가도 없지는 않다. 기성 정당들이 이기적이고 한심하니 권력을 독점하더라도 국민과 국가를 위해 이를 용인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1년 전 권력 독점을 추진할 당시 사이에드가 제시한 명분 ‘임박한 위협’이 이러한 인식을 담고 있다. 즉, 부패와 정쟁이 튀니지 사회를 위태롭게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느낀 위협은 자신을 겨냥한 세력들이었을 것이다. 이들의 저항을 체계적으로 제압한 후 자신이 구상하는 정치를 헌법에 반영하고자 한 것이다. 구체제를 대상으로 하는 투쟁이라는 정당성을 부정할 수는 없다. 과거 독재정권의 잔재, 그리고 종교세력에 맞서는 민주 세력의 투쟁이라는 대의가 있다. 그러나 아무리 정당한 목적을 위한 것이라도 다원적이고 민주적인 방식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반론에는 답변이 궁색하다.
문화와 달리 정치 영역에서 다원주의는 주로 미국이 제국주의적인 목적으로 다른 나라를 비방하는 도구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 우선 의심을 하게 된다. 또한 중동 및 북아프리카 지역의 경우 식민 지배의 유산으로 사회가 여러 부분으로 갈라져 사회갈등의 원인이 되기 때문에 다원주의를 정치적 대안으로 주장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다원적인 현실을 무시할 수도 없다. 이슬람이 대표적인 사례인데 사회 전 영역에 걸쳐 존재하는 이 오래된 요소는 근대적인 발전에 장애 요소로 작용하기도 해 서구식으로 사적 영역에 국한됐으면 하는 생각을 갖게 된다. 하지만 근대 초부터 시도된 이런 방향의 시도는 번번이 실패했다. 그런데 이번 개헌은 대통령의 권한 강화와 함께 혁명이 낳은 타협의 정치, 즉 아랍-이슬람적 요소와 서구식 근대주의 간의 공존, 다양한 세력 간의 협치 가능성에 선을 그었다.
사이에드 자신도 준비 과정에 참여한 바 있는 2014년 헌법은 한 정당이 의회에서 과반의 의석을 차지하는 것을 방지하는 장치를 두고 있었다. 선거에서 제1당이 된 정당이 정부를 구성하기 위해서는 다른 정당과 연대해야만 하는 것이다. 합의의 모델은 이원화된 사회의 반영이기도 하다. 인구가 1,170만 명 정도이고 국토의 면적도 남한보다 조금 큰 정도인 튀니지도 다양한 세계로 갈라져 있다. 2011년 혁명은 지중해 북단 서구로 열린 해안지역과 배제된 내륙 간의 격차, 그리고 비대해진 비공식부문의 열악한 상황을 드러냈다. 정치와 이데올로기의 장에서도 이러한 사회적 균열이 반영된다. 이슬람 세력이 정치적 장의 주된 배역으로 등장한 1980년대 이후 튀니지 사회에서 이슬람의 세계는 민중들의 세계이고 근대적인 세계는 엘리트들의 세계로 여겨져 왔다. 정권의 역할 중 하나도 이 두 유형의 세계를 연결하는 고리 역할을 하는 것이고, 불리한 위치에 있는 이들을 효과적으로 통합하는 것이었다. 결과가 좋지 않은 경우가 많았고 반란이나 탈정치화, 이주는 이 과제가 제대로 수행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징표였다. 신헌법이 함축하는 이슬람주의에 대한 공격이 이를 지지하는 민중에 대한 포섭 전략을 동반하지 않는다면 사회가 둘로 갈라지는 비극을 반복할 수도 있다.
3. 보나파르티즘의 부활
한편, 혁명 정신의 계승자를 표방하면서 국민의 지지를 등에 업고 선거를 활용해 권력을 독점하는 사이에드의 행보는 보나파르티즘을 연상시키는 면이 있다. 선거제도의 역사를 보면, 보편적인 제도로 자리 잡는 과정은 전혀 순조롭지 않았다. 누구에게나 정치적 권리를 준다는 생각은 영국이나 미국에는 낯선 제도였고, 본고장인 프랑스에서도 상당한 반발에 직면했다. 역량 있는 적극적인 시민과 정치에 참여할만한 능력이 부족한 소극적인 시민을 구분했고, 대중의 비합리적인 속성을 강조하고 민주주의의 과잉을 우려했다. 엘리트들의 우려가 정치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모두의 정치 참여는 모두를 위한 정책을 낳을 수 있고 그것은 경제적 평등이라는 악몽으로 가는 길이었다. 역으로 평등을 향한 길은 경제적인 투쟁과 동시에 정치적인 투쟁이라는 쌍두마차가 이끄는 과정이었다. 그래서 지배 세력은 어떻게든 투표권을 제한하려 했다. 그러나 차티스트 운동이나 1848년 혁명과 같은 민중의 거센 저항이 이전과는 다른 대응을 강요했다.
새로운 통치 모델을 제시한 이는 나폴레옹 1세의 조카로서 왕족이자 1848년 12월 직선제로 뽑힌 프랑스 최초의 대통령이기도 한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였다. 그도 당시 대부분의 지배 세력과 마찬가지로 대중을 경멸했지만, 투표와 같은 방식으로 대중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억제하는 대신에 정권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기제로 활용하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하게 된다. 지배계급에게 투표는 더 이상 두려운 것만은 아니게 됐다. 무지하고 위험한 민중을 효과적으로 통제하는 수단이 된 것이다. 나폴레옹 3세가 된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항상 인민과 대중을 이야기했다. 그런데 이때 인민은 누구인가? 루이 나폴레옹이 필요로 했던 인민은 권력으로부터 독립적인 위치에 있는 정당이나 노조에 조직돼 있는 이들이 아니었다.
노조, 정당을 제쳐두고 조직되지 않은 개인으로서의 대중에 호소하고 투표를 동원의 계기로 활용하는 방식은 이후 많은 사례로 이어진다. 프랑스의 독립 영웅 드골이 보여준 통치방식은 정당보다 우위에 서서 국민을 통합하고 의회를 불신하고 선거로 선출된 대통령에 우월한 지위를 부여하는 것,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대외적으로 강한 국가를 추구하는 것이었다. 이는 공화주의적인 현대 정치에 적용된 보나파르티즘의 전형적인 사례였다. 민주주의가 보편화된 현대사회에서도 이러한 방식은 사라지지 않았다. 현대사회에서 영웅, 구세주, 카리스마적 지도자는 제도권 밖, 즉 사회와 동떨어진 곳이 아니라 매체나 선거를 통한 제도의 중심에서 탄생한다. 그리고 국민은 이 구세주가 보호해줘야 할 연약한 아이들이다.
튀니지가 프랑스 식민지였다는 것이 사회 곳곳에 흔적을 남겼지만 정치에서도 마찬가지다. 2011년 혁명 후 수립된 정치체제가 프랑스를 닮은 이원집정제였다는 점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보나파르티즘의 사례도 발견할 수 있다. 튀니지에 국한된 것은 아니지만 독립 영웅이자 초대 대통령을 지낸 부르기바의 통치방식은 온정주의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삶의 기쁨’을 약속했던 당시 부르기바는 이를 실현하기 위해 의료, 주거, 교육 분야의 인프라 확충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국민에게 국가는 자신들에게 축복을 주는 존재로 여겨졌다. 부르기바 시대에 지리학자였던 하비브 아티아는 이러한 당시 상황을 농촌 주민들이 신의 축복보다 국가의 축복을 더 기다렸다고 표현한 바 있다. 그렇다고 이들이 권리까지 부여받은 건 아니었다. 이 온정주의 국가 모델은 부르기바에 이어 1987년에 집권한 벤 알리 정권에서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정치적 처방은 동일했지만, 그 배경이 되는 경제 상황은 크게 달라졌다. 이제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시대가 됐고 온정주의는 신자유주의가 낳은 양극화의 문제에 대한 대증요법의 수단으로 축소됐다. 국가는 설사 그럴 의지가 있었다고 해도 이전과 달리 모든 국민의 요구에 대응할 능력을 상실한 상태였다. 사이에드가 통치하는 지금도 물질적인 양보로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사회적 평화를 달성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적어도 투표 등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기제를 통해 통치 기반을 굳건하게 하는 전략은 항상 가능하며 실제 적지 않은 성공을 거두고 있다.
사이에드가 보여주는 대중에 대한 흡인력은 이미 하비브 부르기바와 벤 알리 대통령의 권위주의적이고 온정주의적인 모습에서 그 선례를 찾아볼 수 있다. 이와 함께 튀니지 사회가 겪었던 수십 년간의 독재로 인해 정치 문화라고 할 만한 것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도 있다. 70여 년간의 프랑스 지배에 이어진 50년의 독재, 10년의 혼돈은 정치에 대한 환멸을 낳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국민은 구체적인 이런저런 개혁 조치나 제대로 된 민주주의 제도의 작동과 같은 것에 더 이상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있다. 그보다는 구세주로 여겨지는 한 인물이 행하는 기적을 믿고 싶은 것이다.
4. 전망
튀니지 혁명은 이제 새로운 단계로 넘어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평등의 두 바퀴, 즉 정치적 민주화와 경제적 민주화를 어떻게 달성할지 지켜봐야 한다. 정치적으로는 혁명의 산물인 형식적 민주주의가 한계에 부딪힌 상황에서 사이에드가 주도하는 변화가 실질적인 참여 민주주의로 이행할지, 많은 이들이 우려하듯이 아랍세계에서 흔히 보아온 독재로 귀결될지 이목이 쏠리고 있다. 경제적 민주화의 길은 더욱 험난해 보인다. 새로운 헌법 도입이 현재 튀니지가 겪고 있는 사회경제적인 문제를 완화하는 데 기여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애당초 그럴 목적이었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회적 민주화에 대해서도 사이에드 개인에 기대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동성애나 상속법 같은 사회문화적 영역에서 사이에드는 진보적이라고 볼 수 없다. 오히려 보수적인 인물에 가깝다. 그보다는 시민의 역량과 참여 공간이 늘어난 혁명의 성과에 기대를 걸어야 할 것이다. 이제 헌법에 새겨진 제왕적 대통령제에 대한 평가는 사이에드가 내세우는 국민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국민과 어떤 관계를 맺을지에 달려있을 것이다. 그 결과에 따라 최근 일련의 조치들이 튀니지식 타협의 정치문화를 저버린 역사적 과오였는지, 새로운 정치의 판을 짜는 진통이었는지 판가름이 날 것이다. 그가 말하는 국민이 보나파르티즘의 신봉자들이 즐겨 썼던 ‘위대한 민족’ 스타일의 것은 아니기를 바랄 뿐이다.
1) https://www.lesechos.fr/monde/afrique-moyen-orient/tunisie-le-virage-autoritaire-de-kais-saied-en-sept-etapes-1778574, 2022년 8월 22일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