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 시민, 여성, 인권, 종교, 환경 단체 등 646개 단체는 8일 오전 여의도 이룸센터 누리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여성가족부 폐지와 저지와 성평등 정책 강화를 위한 범시민사회 전국행동’ 발족을 알렸다. 이들 단체는 윤석열 정부의 여성가족부(이하 여가부) 폐지 공약에 대해 반대 목소리를 내오며 다양한 활동을 펼쳐왔다. 그러다 10월 7일 정부조직법 개정안 발의로 여가부 폐지 수순이 본격화하자 전국적으로 반대 목소리를 내고 이를 논의할 국회를 압박하기 위해 전국적인 조직을 띄우기로 한 것이다. 이들은 “정부는 여가부에 대해 폐지가 아닌 성인지적 관점을 반영한 기구로 그 기능과 역할을 강화해 성 불평등을 해결해야 한다”라고 요구하고 있다.
김윤자 한국여성단체 공동대표는 단체 발족 배경에 대해 “대통령과 국민의힘은 대통령 지지율이 떨어질 때마다 여가부 폐지 입장을 밝혔다. 급기야 지난 9월 말 대통령 지지율이 20%대로 급락하자 돌연 10월 6일 행안부 장관이 정부조직법 개정안을 발의했다”라며 “여성가족부가 독립 부처의 위상을 잃을 경우 독립부처의 입법권, 집행권이 상실되며, 정부 부처, 지자체의 성평등정책 조정기능은 축소 폐지될 것이 자명하다. 여가부 폐지를 반드시 저지하기 위해 수많은 단체들이 범시민사회 전국행동으로 모였다”라고 밝혔다.
8일 범시민사회 전국행동 발족 이후, 전국 광역시도를 기반으로 한 지역행동 역시 활동을 시작할 예정이다. 더불어 범시민사회 전국행동은 국회를 압박하기 위해 ‘국회, 우리가 움직인다’ 캠페인을 시작한다. 국회의원들에게 여가부 폐지 반대와 성평등 정책 강화를 직접 요구하는 대시민 서명운동으로, 이를 위한 온라인 페이지도 곧 개설된다. 이외에 전국 집중집회, 정당 관계자 및 국회 위원회를 상대로 한 면담요구, 간담회, 토론회, 국제연대활동 등 다양한 활동을 지속할 계획이다.
이날 범시민사회 전국행동에 참가하는 다양한 단체들은 각 단체들이 여가부 폐지를 반대하는 이유를 밝히고, 현재 한국의 뒤떨어지는 성평등 수준을 토로했다. 참석자들 사이에선 “윤석열 정부와 여가부 장관은 여가부는 폐지되지만 기능은 강화될 것이라는 논리적 근거도, 현실적 근거도 없는 내용을 앵무새처럼 반복하고 있다” 등의 규탄이 나왔다.
류민희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여성인권위원회 부위원장은 “소위 ‘경제적 선진국’으로 분류되는 한국이지만 여성 인권과 성평등에 있어선 그렇게 선도적이지 못하다”라며 “이번 폐지안은 독립부처 형태로도 수월하지 않았던 성평등 정책 조정 및 총괄 기능을 악화시켜 성평등 정책을 크게 후퇴하게 만들 것”이라고 경고했다. 류 부위원장은 “완벽하지 않아도 대부분의 국가들이 국가체계에 다양한 법제도와 정책, 기구를 두고 성평등의 비전을 실현하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 성평등 전담부처는 헌법상 평등권, 차별받지 않을 권리의 보호, 여성차별철폐협약의 이행 의무를 정부 내 모든 부처에 부여하는, 이를 조정하는 수단으로 정부체계에 이 부처를 두는 것은 이 과업을 개인이나 사회로 전가하고 차별과 불평등을 방치하는 게 아니라 국가에게 역사적 차별을 시정할 책무가 있음을 분명히 밝히는 것이기도 하다”라고 강조했다.
김란희 광주전남여성단체연합 상임대표는 여가부 폐지 흐름이 지역균형발전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내다봤다. 김 상임대표는 “이미 대구, 부산 등에서 여성 사업들이 사회복지의 문제로 환치되거나, 통폐합되고 있다”라며 “2019년 광주광역시가 여성가족정책관을 여성가족국으로 격상시키면서 정책 중요도가 올라가고 시정 목표에 반영돼 지역의 성평등정책이 활기를 띤 것을 목격한 바 있다. 윤석열 정부의 지방정부 행정조직 개편은 성평등업무 부서가 밀려나는 것이며, 지역 성평등 정책은 결과적으로 낙후하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문애준 한국여성장애인연합 상임대표는 “남성중심 가부장적 사회에서 가장 취약한 존재인 여성장애인은 여성과 장애라는 점이 다양성으로 인정되지 않고 차별로 전환돼 삶의 주기마다 고충을 경험하고 있고, 인권의 취약성, 폭력의 대상화가 되어 주변인으로 살고 있다”라며 “여성장애인의 교차 차별에 대한 특수한 상황에 맞는 제도가 거의 없다”라고 여성 장애인이 겪는 현실을 전했다. 문 상임대표는 “복지부와 여가부 모두 여성장애인을 배제하는 상황에서 여성인권 보호 정책을 복지부로 이관하면 여성장애인 인권은 더욱 지켜질 수 없다”라며 “그동안 복지부의 여성장애인 관련 정책은 지금까지도 성인지 관점이 미비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종걸 차별금지법제정연대 공동대표는 보편적 인권에 대해 정부가 경쟁을 유도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 공동대표는 “윤석열 정부는 모두의 인권을 집단 대 집단의 문제로 갈라치기하고 있다”라며 이는 “누군가를 배제하려는 혐오와 차별의 정치”라고 꼬집었다. 이어 “(혐오와 차별의 정치는) 여성 뿐 아니라 소수자 인권이 배제되고 구조적 차별이 굳어지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에 차제연은 여가부 폐지에 단호히 반대한다”라고 밝혔다.
기자회견에선 여가부 폐지 논의 과정이 졸속적으로 추진된 점도 지적됐다.
이지현 참여연대 사무처장은 “20년 역사를 가진 성평등정책 전담부처 폐지안을 내면서 체계적이고 민주적인 의견수렴 절차를 갖지 않았던 것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라며 “그동안 정책과 제도 전반에서 남성이 디폴트값이었기 때문에 성평등 관점에서 국가정책을 검토하고 정부와 지자체를 총괄조정하는 독립부처의 역할은 여전히 절실하다”라고 말했다.
윤택근 민주노총 수석부위원장은 ‘여성노동’ 분야를 노동부로 이관해 기능을 강화하겠다는 정부의 계획이 거짓말이라고 비판했다. 윤 수석부위원장은 “노동부는 지난 6월 고평법 시행규칙을 통해 기업으로부터 제출받는 자료 중 직종, 직급별, 성별 임금현황 자료를 없앴다. 성별임금격차 해소를 위해 여성들이 간절하게 외쳐온 성별임금공시제의 단초를 주무부서인 노동부가 스스로 없앤 것이다”라며 “윤석열 정부가 기업의 의무를 자율에 맡기기 시작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노동부는 지난 6월 3일 남녀고용평등법 시행규칙을 개정해 적극적 고용 개선의 의무가 있는 기업들로부터 받아야 할 자료를 축소했다. 그동안 직종별·직급별로 나눠 제출하던 성별 임금 현황 정보를 내년부터는 전체 남녀 평균만 제출하도록 한 것인데, 임금 격차를 줄이기 위해 필요했던 정보들을 더 이상 알 수 없게 돼 노동부에 대한 비판이 쏟아졌다.
여가부 폐지는 저지하되, 여가부가 이전의 모습 그대로 존치되어선 안 된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최유경 청소년페미니스트네트워크 위티 활동가는 “현재 여가부는 ‘페미니스트를 위한 부서’라는 오명을 벗는 일에 급급할 것이 아니라 여가부 폐지론 강화 속에서 여가부가 필요한 소수자들의 목소리와 삶에 집중해야 한다”라며 “그런 맥락에서 여가부는 이전의 모습 그대로 수호되는 방식으로 유지되는 게 아니라 비판과 논쟁 속에서 완전히 새로운 목표 설정과 관점을 전환을 요구받아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그간 여가부가 가진 관점과 정책의 한계를 지적하며 “청소년의 권리와 행복추구권을 차등적인 것으로 밀어두고, 청소년을 ‘정상가족의 일원’이자 ‘미래인구’로서 건전하게 성장하도록 하고, 보호해야 하는 존재로 설정했다”라고 비판했다. 이어 “우리에겐 기존의 획일된 목표 설정 속에서 때로는 억압과 권리 침해의 선두에 섰던 여가부가 아닌 성평등과 청소년 인권 관점에서 적극적으로 소수자들의 삶을 바꿔나가는 여가부가 필요하다”라고 촉구했다.
한편, 지난 10월 6일 윤석열 정부는 성평등 정책을 총괄하고 추진하는 여성가족부를 폐지하는 정부조직법 개편안을 발표했다. 개편안의 요지는 ‘여성노동’은 고용노동부로, ‘청소년·가족’, ‘양성평등’, ‘권익증진’ 기능은 보건복지부 산하 '인구가족양성평등본부'로 이관한다는 것이다. 이에 여성계 및 시민사회단체들은 여성을 인구정책의 도구로 삼던 과거로의 퇴행이라며, 지난 20여 년간 이뤄온 여성인권 증진과 성평등 노력이 물거품이 됐다고 우려했다.